[책 감상/책 추천] 심너울,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각각 2019년, 2020년, 2021년에 쓴 단편소설 세 권을 엮은 책. 애초에 ‘트리플’이라는 시리즈 기획 자체가 한 작가의 세 작품을 싣는 기획인데, 어쩜 신기하게 이 ‘트리플’ 시리즈가 마침 또 심너울 작가의 세 번째 소설집이 되었다. <대리자들>,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 <문명의 사도> 세 작품 모두 삼삼한데(하하, 말장난 재미있다) 저자 말대로 1년 간격으로 쓴 이 작품들은 나름대로 차이가 있고, “시간에 따른 저의 변화와 그 변화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저만의 축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 작품들을 골랐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제일 기가 막히게 좋았던 건 <대리자들>이다.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이 세상은 하나의 무대요,/모든 인간은 제각각 맡은 역할을 위해/등장했다가 퇴장해버리는 배우에 지나지 않죠.”라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 중 한 구절이 인용되는데 이게 많은 것을 암시한다. <대리자들>의 배경은 2041년, 고도로 발전한 CGI 기술 덕분에 배우의 얼굴을 ‘빌리기만’ 하면, 배우에게 직접 연기를 시키지 않고도 영화 한편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 주인공 도영은 아역 출신 배우이지만 성인인 지금은 거의 잊혀져 작은 연극 무대에 오르는 게 전부인 처지이다. 어느 날 그는 한 영화 스튜디오로부터 ‘영화를 만들 수 있게 얼굴을 빌려 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말 그대로 얼굴와 몸을 비롯한 외형을 스캔하고, 목소리를 녹음해하게주기만 하면 되는 일. 실제로 대사를 외우거나 연기할 필요도 없다. 이건 진짜 ‘연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거절하려던 도영은 스튜디오 측이 제안한 금액도 금액이지만, 배우보다 적은 관객이 찾던 소극장을 기억하며, 이것이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킬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데…
이 소설에서 특히 내가 개쩐다고 생각하는 건 후반에 나온다. 도영의 친구이자 역시 배우인 나영은 도영이 우러러보는 대상이기도 한데, 나영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현대적으로 업데이트한 작품에 햄릿 역으로 오른다. 이 <햄릿> 극이 진짜 기발한 게, 우리가 아는 이야기의 뼈대는 그대로 유지한 채 고도로 발전한 기술의 시대로 배경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걸 보시라.
하지만 달랐다. 호레이쇼는 무대 위의 랩톱 앞에서 뭔가를 빠르게 타이핑하더니 말했다.
“공주님, 드디어 발견했습니다!”
갑작스레 무대 위에 입체 홀로그램 영상이 나타났다. 푸르게 번뜩이는 여왕의 모습이었다. 이미 2030년대에 고전적인 기술이 된 홀로그램이지만 관객들은 잠시 숨을 멈췄다.
권나영, 혹은 햄릿이 그것을 보고 외쳤다. 상당히 과장되고 어쩌면 우스꽝스러운 대사일 수 있지만, 그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그렇게 외칠 법한 말이었다.
“하느님, 우리를 지켜주소서! 그대는 누구인가? 사람인가, 인공지능인가? 그대 모습을 보니 차마 말을 걸지 않을 수가 없구나. 오, 덴마크의 여왕, 햄릿이시여, 대답하라. 나를 의혹에 빠뜨리지 말고, 죽어서 땅속에 묻힌 사람이 어찌하여 사이버스페이스에 접속 중인가?”
홀로그램이 조금씩 움직여 손짓했다. 그 손짓을 따라 알 수 없는 URL이 나타났다. 관객들은 조금씩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 장면부터는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단지 성별만 바꾼 것이 아니라, 각본을 현대 세계와 교묘히 접합하여 재창작한 것이었다.
아니 이렇게 개쩌는 생각을? 햄릿은 호레이쇼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주소로 접속하고, “덴마크의 여왕, 햄릿의 어머니가 햄릿의 이모에게 살해당하는 동영상”을 보게 된다. 그 영상이 끝나고 나서는 햄릿의 어머니 형태를 한 홀로그램이 “비겁하기 짝이 없는 네 이모에게 복수하라”고 햄릿을 종용한다. 이 기술 발전 시대의 햄릿은 연극 대신에 “애니메이션 회사에 시켜 어머니의 살해 장면을 이모 앞에서 재현하도록” 한다. 햄릿과 부왕(父王), 삼촌을 전부 여성으로 바꾼 것도 좋은데 홀로그램과 URL, 동영상 같은 기술까지 써? 홀로그램이나 애니메이션 같은 영상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당연히 조작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이 작품에 의미 층위를 더한다. 햄릿의 어머니 형태를 한 홀로그램은 진짜 그녀가 남긴, 사이버스페이스의 아바타인가? 햄릿의 어머니가 이모에게 죽임당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은 조작된 게 아닐까? 햄릿이 이모를 떠보기 위해 애니메이션 회사에 그런 영상을 재현하라고 시키는 것처럼. 사실 원작 속에서 부왕의 유령이 나타나는 것도 진짜 부왕인지, 이를 믿을 수 있는지 아닌지도 관객이 생각하기 나름이고, 햄릿이 배우들에게 부왕의 살해 장면을 연극으로 만들어 삼촌 앞에서 공연하게 시키는 것도 ‘연기’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다. 관객은 햄릿이 자기 수하의 배우들에게 연극을 시키는 것을 보지만, 이때 그들은 기본적으로 <햄릿> 자체가 연기이고 허구의 이야기라는 점은 잠시 잊어버리거나 논외로 친다. 이 허구의 이야기 안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분하는 게 중요한가? 의미가 있나? 실제로 햄릿이라는 사람은 (적어도 이 연극에서 그려진 대로는) 존재한 적도 없는데. 근데 이제 이 소설은 여기에다가 기술까지 접목해서 그 의미를 더욱 모호하고 깊게 만들었다 이겁니다! 게다가 이 연기 또는 배우라는 소재가 또 나름대로 이 소설의 작은 반전의 키워드가 되어서 그 점까지 아주 완벽하다. 너무 좋아요…
<꿈만 꾸는 게 더 나았어요>는 그야말로 ‘꿈만 꾸는 게 더 나았던’ 어떤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걸 소개하면서 스포일러를 안 할 자신이 없으니 이 정도로만 해 두겠다. 재미있는 이야기.
<문명의 사도>는 우주 제국의 한 집정관이 맞닥뜨리는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이다. 집정관으로 임명되어 ‘미로’라는 이름의 행성을 농업 행성으로 테라포밍하라는 명령을 받은 호라티아. 그곳의 생태계는 단순했는데, 호라티아가 ‘실피움’이라고 이름 붙인 버섯 같은 생물이 전부였다. 좀 더 조사해 본 결과, 행성 표면의 몇 미터 아래에 실피움의 덩어리가 있었다. 그 덩어리에서 뻗어 오른 뿌리, 아니 촉수들이 호라티아가 본 그 버섯들이었던 것이다. 즉, 그 실피움 덩어리는 실피움의 뇌였고, 이 실피움의 촉수들이 행성을 뒤덮고 있었다. 호라티아는 황제의 명령대로 이 실피움을 ‘정화’, 즉 실피움을 파괴해야 할까, 아니면 이 실피움도 하나의 지적인 생명체로 존중해 그들을 보존해야 할까? 호라티아는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 이것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 좋았다.
책 말미에 실린 <세 편의 글로 자기를 소개하기>라는 저자의 에세이는 이 세 편의 작품에 대한 짧은 소개 글이다. 무엇을 생각하면서 썼는지 얘기하는 것뿐인데 왜 재미있지? 심너울 작가님의 능력인 듯. 그가 쓴 에세이가 좋다면 <일인칭 전업작가 시점>도 읽어 보시라. 어쨌거나, 짧지만 재미있는 SF 단편소설집이다. 2025년 6월 기준 유일하게 국내 이북 구독 플랫폼 중에서는 교보 샘에서만 서비스 중이니 참고하시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무라타 사야카, <소멸세계> (4) | 2025.06.20 |
---|---|
[책 감상/책 추천] 이얼 프레스, <더티 워크> (0) | 2025.06.18 |
[책 감상/책 추천] 맥스 디킨스, <남자는 왜 친구가 없을까> (7) | 2025.06.16 |
[책 감상/책 추천] 레이첼 요더, <나이트비치> (5) | 2025.06.11 |
[책 감상/책 추천] 유즈키 아사코, <미안한데, 널 위한 게 아니야> (4) | 2025.06.09 |
[책 감상/책 추천] 오 헨리, <오 헨리 단편선> (9) | 2025.06.06 |
[책 감상/책 추천] 클레어 데더러, <괴물들> (4) | 2025.06.04 |
[책 감상/책 추천] 빌리 베이커, <마흔 살, 그 많던 친구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2) | 2025.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