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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by Jaime Chung 2025.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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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세랑, <옥상에서 만나요>

 

 

아마도 <시선으로부터>나 <피프티 피플>, <보건교사 안은영>으로 잘 알려진 정세랑 작가의 소설집. 고백하건대 나는 유행을 알아차리는 것도 느리고 별로 따라가고 싶어 하지도 않는 사람이라 아직도 <보건교사 안은영>을 안 읽고, 드라마 버전도 보지 않았다. 왜냐고 묻는다면 내가 방금 상기한 이유 외에는 없다. 드라마가 엄청 인기 있었던 것도 아는데 딱히 볼 마음이 안 들었달까…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이 트윗을 봤다. 흥미가 생겨서 어떤 책인지 검색했다. 알고 보니 정세랑 작가의 <옥상에서 만나요>에 수록된 소설 중 하나인 <웨딩드레스 44>의 일부분이었다. 여성 작가의 여성 서사 책이라길래 읽어 봐도 괜찮겠다 싶어 바로 구매했다. 내가 구매한 건 2025년에 출간된, “달라진 용어와 새로 밝혀진 사실들을 반영하고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사건을 교체하거나 묘사를 더하기도 한” 개정판이다. 이 소설집의 주제는 대체로 크게 여성(대문짝만 한 글씨라고 생각해 주시라), 결혼과 이혼 등인데, 물론 결혼과 이혼이라는 틀에 해당하지 않는 글도 있으나 그런 경우에도 여성의 이야기임에는 변함이 없다. 작품은 아홉 편이나 실려 있는데 각각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웨딩드레스 44>는 한 웨딩드레스를 드레스숍에서 대여해 입은 44명의 여자들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옴니버스 식으로 쓴 것이다. 위에서 내가 언급한 트윗에 실린 짤은 ‘26’이라고 되어 있으니 스물여섯 번째로 그 웨딩드레스를 입었던 여자의 이야기다. 44명의 여자 중 특히 “결혼 생활 안에서 너를 변호해줄 사람은 없어. 너밖에 없어. 그게 안 되면 언니한테 전화해.”라는 말을 들었던 열세 번째 여자나, 결혼 생활은 어떠냐는 친한 후배의 질문에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라고 대답한 열다섯 번째 여자, “매사 우울해서 어떻게 사니?”라는 남편의 질문에 “내 우울은 지성의 부산물이야. 너는 이해 못해.”라고 받아친 스물 한 번째 여자 등이 기억에 남는다. 결혼 제도 안에서도 굴하지 않는 멋진 여자들!

 

<효진>은 도쿄에서 베이킹을 배우고 있는 효진이라는 여자 이야기. 친구에게 전화 통화를 하는 것처럼 쓰여 있는데 그 안에도 서사가 있는 게 신기했다.

 

<알다시피, 은열>은 ‘가왜(假倭)’라는 역사적 사실 한 가지만 가지고 완전히 새롭게 상상해 낸 이야기이다. 가왜란 “고려 말부터 조선에 걸쳐 수탈에 지친 백성들이 거짓으로 일본계 해적인 척하며 약탈과 방화를 저지른 경우를 칭하는 말”로, 작가는 은열이라는 이름의 여성 가왜를 상상해 본다. 그리고 극 중 주인공인 정효는 역사교육학을 전공한 작가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하고 나도 상상해 보았다.

 

<옥상에서 만나요>는 단연코 내 최애 작품. 이 작품집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유명 스포츠신문의 광고사업부에서 일하는 주인공은 “사무실에서 일한 시간보다 룸살롱에서 접대한 시간이 훨씬 길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거지같은 회사 문화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주인공에게 힘이 되는 건 마치 운명의 마녀들(또는 여신들)처럼 함께인 세 언니들. 그런데 그 언니들이 다 결혼하고 다니던 회사를 관뒀다. 한 명씩 탈출해서 더 나은 회사로 간 것. 이 거지같은 회사에 혼자 버려진 주인공은 언니들에게 ‘어쩜 다들 나만 놔두고 결혼했냐’라고 투정 반 진심 반으로 묻고, 언니들은 그에게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주문”을 전수해 주는데…

“우리가 비결을 말해주면, 다른 데 안 말할 자신 있어?”

의자 깊이 기대어 있던 소연 언니가 물었어.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순진하고 믿음직한 얼굴을 했고.

그러자 예진 언니가 얄팍하고 누리끼리한 노트 같은 걸 하나 내밀었어.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주문서야.”

“고려대에 뭘 주문한다고요?”

“이 바보 자식, 똑바로 들어. 오더(order) 말고 스펠(spell)이라고!”

소연 언니가 발끈했는데, 나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어. 언니들이 단체로 맛이 갔나 싶었거든. 워낙에 사주 보러 다니고 점 보러 다니고 그런 거 좋아하는 언니들이긴 했지만 나름 단단한 생활인들인데 이거 왜 이러나, 셋이 짜고 놀리는 건가 짧은 시간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지.

“……고대로부터 내려왔다는데 왜 인쇄물이에요?”

“고대로부터 내려온 걸 구한말이나 식민지 시대 초기에 인쇄한 거 같아.”

“어디서 구했어요?”

“동대문. 청계천 쪽 헌책방.”

“……”

“야, 안 믿기면 하지 마. 그만큼 절박하지 않으면 하지 말란 말이야!”

“아, 알았어. 절박하다고, 절박해요.”

언니들의 서슬에 질려, 나는 얼른 책을 받아 왔지.

 

<보늬>에서 주인공은 두 친구와 함께, 돌연사한 자신의 언니 보늬를 기리기 위해 ‘돌연사.net’이라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만든다. 슬프지만 아름다운 이야기.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원히 77 사이즈>는 을지로의 오래된 지하보행로에서 뱀파이어에게 물려 ‘영원히 77 사이즈’로 남은 여자 이야기이다. 근데 이제, 죽기 전부터 좋아하던 남자의 피를 쪼로록 마셔 버리는…

사슴 피는 흡수가 되긴 했으나 심한 두통과 구토를 동반했다. 사슴이 문제인지, 가공 과정에서 들어간 항응고제와 방부제가 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거의 모든 기능이 멈췄는데도 감각만은 오히려 생생해졌고, 공정하게도 통감(痛感)까지 포함이었다. 여자는 첫 포에서 사슴 피는 아니란 걸 깨달았지만, 돈이 아까워서 끝까지 비우며 2주 정도를 연명했다. 그간 회사에서는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하는 여자를 두고 여러 소문이 돌았다. 아버지 친구가 하는 중소 의료기기 회사에 낙하산으로 취직한 것이라 꽤 곤란했다. 결국 식사 시간마다 큰 소리로, 새로 다이어트용 한약을 먹기 시작했는데 부작용이 끔찍하다며 떠들어댈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77 사이즈였다. 가끔은 88을 입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납득했고 소문은 잦아들었다.

 

<해피 쿠키 이어>만이 유일하게 이 소설집에서 여성이 화자가 아닌 작품이다. 이스마일이라는 이름의 아랍 남성이 화자인데, 과연 여성이 그린 남성답게 사랑스럽고 다정하다. “새삼 여성이 쓴 창작물 속 남자는 아예 새로운 인류”라는 글(원본은 이거, 캡처본은 이거)이 떠오른달까. 진짜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자’가 존재할 수 있을까? 아랍 남자가 정말 이럴지는 모르겠지만, 남자 작가들은 여자 캐릭터를 망상으로 막 자기 마음대로, 망상대로 쓰는 거에 비하면, 여자 작가들이 남자를 좀 ‘인간답게’ 그리는 건 아주 땡큐한 일 아닌가.

 

<이혼 세일>은 이혼하게 된 이재가 집 안의 모든 물건을 친구들에게 판다는 이야기.

 

<이마와 모래>는 소식국과 대식국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는 ‘이마’라는 이름의 소식국 여인과 대식국 소년 이야기라고 할까. 여기에서 소식국과 대식국은 말 그대로 적게 먹는 나라, 많이 먹는 나라다. 발상이 너무 귀여워서 조금 웃었다.

 

9편 모두 다 좋은데 개중에 <옥상에서 만나요>가 표제작이기도 하고 제일 마음에 들었다. 정세랑 작가님이라는 귀한 인재를 알게 되어 너무 기쁘다. 이 작가님 작품도 다 도장 깨기 해야지!! 뒤늦게 작가님을 알게 되어 좀 민망스럽기는 해도 어쨌거나 여러분께도 이 책을 추천한다! 아 한번 읽어 보시라니까요! 여성 서사가 최고로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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