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경일, 류한욱, <적절한 좌절>
저자 김경일은 인지심리학자, 류한욱은 소아정신과 의사다. 둘이 합심하여 ‘이 시대 심리적 미성숙’에 관해 책을 썼다. 거의 전 세계적으로 요즘 젊은 세대들은 ‘나약하다’고들 하는데 애비게일 슈라이어의 <부서지는 아이들>이 미국 버전의 이야기라면, 이것은 한국 버전이다. 좋은 대학교에 가서 돈을 많이 버는 ‘좋은 직업’을 갖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이자 성취가 된 젊은 세대는 부모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며 진정한 의미의 개인으로서, 성인으로서 ‘독립하지’ 못했다는 평들이 많다. 두 저자는 특히 이러한 한국의 젊은 세대를 키우는 부모와 젊은 세대, 그러니까 성인이 되었으나 아직 충분히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조언을 제공한다.
저자들은, 아이가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안정적으로 분리-독립 과정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부모와의 관계에서 적절한 독립을 이루고, 서로 균형 잡힌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요즘 부모들은 “스스로 좌절할 기회”를 빼앗는다. 아이가 너무 소중하고 귀하게 느껴지다 보니 가능하면 원하는 것을 모두 다 해 주고 싶고, 마음 아파하지 않도록 지켜 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좌절을 통해 세상은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는다는 현실을 배우고 적응해 나간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면 아이는 제대로 성장할 수 없게 된다.
아이와의 적당한 거리를 설정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원적인 방법은 ‘잠자리 분리’라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 방이 있었고 혼자 잤기 때문에 초등학교 3학년인데도 잠자리 분리가 되지 않았다는 한 아이에 대해 읽었을 때는 무척 놀랐다. 그 정도 큰 애가 부모 사이에서 잔다고? 저자 말마따나, “잠자리 분리는 단순한 공간적 독립이 아니라 아이가 부모로부터 심리적으로도 한 걸음 떨어져 자신만의 정체성과 감정 세계를 형성하도록 돕는 과정의 시작”이다. 만약에 아이가 잠자리 분리를 원치 않으면 어떡하냐고? 그에 대한 대답이 무척 인상깊다. 일단 한번 아래 인용문부터 읽어 보시라.
그렇다면 이런 변화에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중요한 것은 가정에서 ‘분리-독립’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점이에요. 저는 그 첫걸음이 ‘잠자리 분리’라고 강조했습니다. 아이가 부모와 떨어져 자는 것은 단순한 생활습관을 넘어,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중요한 과정이에요. 잠자리 분리에 관해 상담을 할 때 부모님들이 많이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아이가 싫어하는데 그래도 해야 하나요? 언젠가 스스로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여기서 꼭 기억하셔야 할 개념이 있습니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 ‘중요한 의사결정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아이가 기저귀를 떼기 싫다고 해서 그냥 기다렸어요.” 아이에게 물어봤더니 싫다고 해서 존중해줬다는 겁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헷갈려 하시는데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과 중요한 결정을 아이에게 맡기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기저귀 떼는 걸 아이의 뜻에 맡겼다면, 학교 가는 것도 아이가 싫다고 하면 안 보내야 할까요?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교육은 의무이기도 하고요.
부모는 아이가 싫어해도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걸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에 가는 것, 규칙을 지키는 것, 식사 예절을 지키는 것, 그리고 잠자리 분리 같은 것들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아이가 싫어해도, 성장 과정에서 반드시 경험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적응하려면 꼭 필요한 과정이 있어요. 기저귀 떼기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인데, 이 결정을 아이에게 맡겼던 겁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아이를 독립적인 존재로 대해야 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아이에게 중요한 의사결정을 넘기지 말라고 하면 부모님들이 혼란스러워하시는데요. 기본적으로는 주어진 상황에서 식사 시간, 수면 시간 조절을 스스로 할 수 있느냐에 기준을 두시면 됩니다. 유치원에서 가르쳐주는 것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
잠자리 분리, 식사 시간 지키기 등 자기 생활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심리적 연령’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연령보다 더 높은 수준의 의사결정은 부모님이 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일례로, 잠자리 분리가 안 된 초등학교 4학년에게 중학교 수준의 선행학습을 시키는 것은 일관성 없는 양육 태도인 것이죠.
아이가 기저귀를 떼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 아이가 뭘 안다고 그걸 기다리고 앉았지? 부모가 됐으면 부모가 가진 권위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도록 대신 결정을 내려 주고, 이것저것 가르쳐 줘야 하는데, 자기가 가진 그 권위를 아이에게 넘긴다? 이거야말로 직무 유기 아닌가. 아직 뭐가 좋고 나쁜지도 모르는 아이한테 왜 결정을 미루는 거지? 아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애쓰다 보니 아주 아이에게 쩔쩔매고 훈육도 제대로 못하는 못난 부모가 되어 버렸다. 예전에 우연히 봤던 한 응급실 의사의 쇼츠에서도 비슷한 말을 하더라. ‘아니요, 싫어요(no)’라는 대답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게 아니면 질문 아닌 질문을 하지 말라는 거였는데, 예를 들어서 아이에게 ‘주사 맞을래?’ 이러면 아이는 십중팔구 ‘싫어요’ 할 것이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위해, 아이를 대신해 아이에게 최고의 이익이 되는 결정을 내려 주어야 한다. 따라서 아이가 ‘주사 맞기 싫어요’ 한다고 진짜 주사를 안 맞힐 게 아니라면(말 그대로 바보 같은 짓), ‘주사 맞을래?’ 따위의 질문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다. 그냥 독단적인 결정으로 주사를 맞히되, 차라리 주사를 맞을 때 내 손을 잡을래, 아니면 인형 손을 잡을래 따위를 물어보는 게, 이 응급실 의사 말마따나 맞는 거다. 아이에게 이를 닦고 싶냐고 하면 대체로 싫다고 할 것이니 그냥 가서 이를 닦으라고만 말하면 된다. 이때 아이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그려진 칫솔이나 치약을 구입해 주는 정도의 자유는 허용할 수 있겠지만. 나는 아이도 없고, 가질 계획도 없지만(정확히 말하자면 아이를 ‘안 가지는 게’ 내 계획이다), 이런 조언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들려서, 이걸 하지 않는 쪽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다.
2부는 ‘독립하지 못한 어른들’이라는 제목으로, “적절한 좌절을 거치지 못한 채 어른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 실패와 좌절, 그리고 여러 사례를 통해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극복할 방법을 함께 찾아”본다. 이게 또 이 책의 놀라운 점인데, 본인이 나르시시스트, 거부 민감성이 높은 사람, 관계적 공격성이 높은 사람, 늘 타인의 기준을 좇는 사람, 모든 것 붙잡고 있어야 안심하는 사람, 회복탄력성이 유난히 낮은 사람, 세상이 나만 미워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괜찮은 척하며 좋은 사람으로만 보이고 싶은 사람 등 2부에서 설명하는 ‘미성숙한 성인’의 한 유형에 속한다면 꽤 도움이 될 구체적 조언이 많다. 예컨대, 거절을 잘 못 하는 사람이면 ‘자기(self)’ 인식이 부족한 사람일 수 있다. 나는 무엇무엇을 하고 싶다, 어떤 목표를 이루겠다는 자기 인식이 있으면 거절이 쉽다고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무리한 부탁을 했을 때 단순히 “죄송하지만 어렵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 “저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라는, 삶의 기준이 담긴 이유를 제시한다면 거절은 쉬워진다. 아래의 현실적인 팁도 꽤 도움이 될 것 같다. 이런 실현 가능하고 구체적인 조언 너무 좋아요!
이제 조금 더 현실적으로 얘기해볼까요? 우리가 거절을 못해 곤란을 겪는 순간은 대부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마주할 때입니다. 그래서 ‘미리 연습해 놓은 말’도 필요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소망, 정체성을 말로 정리해두면, 막상 상황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고 내 입장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준비된 말 한 줄이 나를 지켜주는 방패가 되는 셈이죠. 즉흥적인 반응이 어려운 사람일수록 말의 ‘사전 준비’는 훨씬 더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 시기에는 가족과의 시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라든가, “지금 제 우선순위는 팀 프로젝트 마무리라 다른 요청은 어렵습니다.” 같은 문장을 미리 만들어놓는 겁니다. 이는 예의 바르면서도 단호한 거절의 좋은 예시입니다.
거절은 단순한 대답이 아니라, 나를 지키는 말이며, 내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적절한 좌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이 한마디가 낯설고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태도를 인식하고 그에 맞는 언어를 미리 준비해두면, 거절은 더 이상 두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준비가 쌓일수록, 우리는 타인의 기대보다 나 자신의 기준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삶의 중심을 스스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이 2부가 좋은 또 다른 이유는, ‘미성숙한 성인’에 대한 조언을 건네는 동시에 이 사회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회복탄력성이 유난히 낮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정체성 기반의 위로”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넌 원래 잘하잖아”보다 “넌 그런 상황에서도 절대 포기 안 했잖아”)를 하면서, 우리 사회는 똑똑한 사람보다는 견디는 법, 빠르게, 잘 회복하는 사람을 선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회복탄력성은 비인지적 능력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지능이나 정보 처리 능력과는 별개이기 때문에, 회복력이 뛰어난 사람은 오래 버틸 줄 아는 사람이다. 실패는 똑똑한 사람에게도 오는데, “그때 회복탄력성이 없는 사람은 조직을 위기로 몰고 가고, 회복탄력성이 있는 사람은 그 위기를 버텨내는 중심”이 된다. 또한 회복탄력성은 가르칠, 배울 수 있는 역량이니 “조직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문화”를 만들고, “개인은 다시 일어서는 방법”을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크, 기가 막히네. 이 문제를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보지 않고 우리가 사회 차원에서도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진짜 좋고 신선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애비게일 슈라이어의 <부서지는 아이들>이 미국 버전이라면 이건 진짜 한국적인 현실을 다뤄서 그 점이 좋았다. 크레마, 리디 셀렉트, 밀리의 서재, 교보샘, 만권당, 윌라 등 거의 모든 플랫폼에서 다 이용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한번 읽어 보시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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