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줄리언 반스,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
나는 요리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요리를 아주 못 하는 건 아니고 그냥저냥 먹을 만큼은 하지만, 잘한다거나 즐겨 한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그래도 학생 때, 특히 코비드-19로 인한 락다운 때는 집에 있을 시간이 많아서 어느 정도 ‘내가 요리를 즐기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이제 직장인이 되니 요리를 즐길 힘도, 시간도 없어졌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대충 아무거나 먹기 바쁜데 무슨. 그래도 내가 정말 신기하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존경하는 이들이 요리를 직업으로 하지 않는데 다른 일도 많이 하면서 요리까지 즐기며 잘 챙겨 먹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러지?
이 에세이의 저자 줄리언 반스는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맨부커 상을 수상한 영국의 작가다. 개인적으로 내가 그의 작품을 접한 이력은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를 시도했다가 어떤 부분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어떤 부분은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서 중반에 그만둔 게 전부다. 이건 요리에 관한 이야기니까 그래도 가볍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내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폭풍우로 배가 뒤집히고 어쩌고 하는 얘기(<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에 나오는, 내가 지루하게 느꼈던 장(章) 중 하나)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반스는 나이가 들어서 요리를 시작한 “늦깎이 요리사”다. 어릴 때 요리를 배우지도 않았다. “아무도 요리가 사내답지 못한 일이라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가정에서 남자가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무엇”이었다는 분위기에서 자랐다. 반스가 어릴 적, 아버지는 아들에게 샌드위치를 싸 주면서 반스가 좋아한다고 알고 있던 비트를 추가했고, “샌드위치는 눅눅해져 해체되었고 아버지가 자른 티가 역력한 비트 뿌리에 시뻘건 물까지 들었다.” 덕분에 동료 럭비 부원들 앞에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다가 20대 중반쯤 반스는 요리를 시작헀고, 점점 요리 종목은 늘어났다. 부모님은 아들의 변화를 이렇게 받아들였다.
집에 다니러 갈 때마다 내가 직접 요리를 한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지자 아버지는 자유민주주의자적인 가벼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예전에 <공산당 선언>을 읽는 나를 보았을 때나, 버르토크(헝가리의 작곡가)의 현악사중주를 들어보라는 나의 강요가 못마땅했을 때의 눈초리와 같았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만 않으면 그 정도는 그냥 봐줄 수 있어”라는 듯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달리 나의 변화를 반기는 기색이었다. 딸이 없는 마당에 아들 하나라도 당신의 오랜 부엌일을 옛날까지 소급해서 알아주게 되었으니 그러셨을 만도 하다. 그렇다고 어머니와 내가 식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요리 정보를 주고받는다거나 한 건 아니다. 어머니는 그저 내가 아주 오래 된 <비턴 여사(영국의 저술가)의 살림 교본>에 눈독 들이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다. 형은 대학 강단과 결혼 생활의 비호를 받아 나이 쉰이 넘도록 해본 요리라곤 달걀 프라이가 고작이었다.
하지만 성인이라면 당연히 자기 한몸 먹여 살릴 정도의 요리를 당연히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좋아할 필요도, 잘할 필요도 없지만 먹고살기 위해 최소한의 요리는 해야 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저자가 ‘현학자가 요리를 해주는 그녀’를 종종 언급하는 걸로 봐서 아내를 위해 요리도 해 주는 모양이다. 이야, 결혼생활의 ‘로망’이 아내가 해주는 아침밥 받아 먹는 거라는 어떤 남자들과 질적으로 다르다!
부엌의 현학자(이 책의 원제는 <부엌의 현학자(The Pedant in the Kitchen)>이고, 옮긴이의 주석대로 “여기서 현학자로 옮긴 ‘pedant’란 ‘학식을 자랑하여 뽐내는 사람’이 아니라 ‘실속 없는 이론이나 빈 논의를 즐기는 깐깐한 공론가’를 뜻한다.”)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다. 특히 이런 부분.
부엌의 현학자는 새 레시피를 마주하면 간단한 음식이라도 불안감을 느낀다. 단어들은 ‘일단 정지’ 도로 표지처럼 그를 향해 번득인다. 이 레시피는 설명이 애매한데, 그러면 적절한(아니 그보다는, 겁나는) 해석의 자유가 있다는 건가? 아니면 저자가 더 정확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어서 그런 건가? 간단한 단어부터 문제다. 한 ‘덩어리(lump)’는 얼마만큼이지? 한 ‘모금(slug)’ 또는 한 ‘덩이(gout)’는 얼마만큼이지? 언제를 이슬비라고 하고 또 언제를 그냥 비라고 하느냐 하는 문제와 다를 게 없다. ‘컵(cup)’이라는 말은 편리한 대로 대충 쓸 수 있는 용어인가 아니면 정확한 미국식 계량 단위인가? 포도주 잔은 크기가 다양한데 왜 단순히 ‘포도주 한 잔’만큼이라고 하지? 잠시 잼 이야기로 돌아가겠다. “두 손을 합쳐 최대한 덜어낼 수 있을 만큼의 딸기를 넣으시오.”라는 리처드 올니(미국의 저명한 요리사이자 저술가, 화가)의 레시피는 어떤가? 정말들 이러긴가? 고 올니 선생의 저작관리인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손이 얼마나 컸는지 물어보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어린이가 잼을 만들려면 어떡하란 거지? 서커스단의 거인은 어떻게 하지?
이와 같은 사항을 알고 나면 내가 왜 레시피에 제시된 예상 준비 시간을 무시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전문 요리사에게 필요한 시간의 두 배를 주어도 요리책의 예상 준비 시간은 항상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요리책 저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사서 보는 독자가 손을 떨면서 계량스푼을 쓸 때 그 모양이 ‘둥그스름한’ 것인지 ‘수북이 담긴’ 것인지 결정하는 일에, 또는 “과다한 비계는 잘라내라”라는 말에서 ‘과다’라는 단어를 해석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는지 상상도 못 하는 듯하다. 최근 나는 “밤새 또는 일하는 동안 콩을 물에 담가놓으시오”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혹시 둘 중 어느 한쪽이 더 좋은 방식이라는 암시는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저자는 주간의 빛과 소음에 노출된 콩보다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야간의 콩이 물에 더 잘 붇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난 짧고 간단한 레시피를 선호하는 편인데, 개중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재료(예를 들어 콩)가 들어 있으면 과감히 생략하기도 한다. 애초에 나는 요리 순서가 다섯 개 이상 있는 것을 평일 저녁에 요리할 수 없다. 다섯 개까지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 이상은 너무 복잡하고 힘들어서 주말이나 되어야 마음과 시간을 내서 도전해 볼 수 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숨돌리고 쉬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어떻게 요리를 해요? 그런 의미에서 내가 요즘에 유행한 밈(meme) 중 가장 공감한 것은 ‘girl dinner’(참고)였다. ‘girl dinner’란, 대체로 노력이 많이 들어가지 않은 간단한 식사를 말한다. 예를 들어, 빵과 크래커에 치즈, 포도, 피클을 얹은 것이라든가(애초에 이 밈을 만든 사람이 먹던 것), 옥수수를 쪄서 버터를 바른 것, 또는 보통 사람들이 그냥 ‘간식(snack)거리’라고 부를 만한 먹거리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girl dinner’ 수준을 넘어서 ‘이혼한 백인 아빠(divorced white dad)’처럼 먹는다는 말도 하는데, 이건 그보다 더 영양학적으로 뒤떨어진, 정크 푸드 같은 걸 대충 먹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너무 공감되고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요리를 즐겨 하시는 분들 정말 존경합니다…
저자는 집에 요리책이 스물일곱 권이나 있다고 하는데, 그중 한 권은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요리책들이 문제의 일부라면, 해결책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 우리 집 부엌의 영웅 에두아르 드 포미안이 총대를 메고 나서서 도움을 준다. <포미안과 요이를>의 첫 두 페이지에는 ‘주인의 의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런 제목은 읽는 사람을 우울하게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복사까지 해서 가스레인지 환풍기처럼 잘 보이는 데 붙여놓아 마땅하다. 포미안의 분류에 따르면 우리 집에 쳐들어오는 손님에는 세 분류가 있다.
(1)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
(2) 부득이 함께 어울리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
(3) 꼴 보기도 싫은 사람들
등급에 따라 각각 “훌륭한 요리, 그저 그런 요리를 준비한다. 마지막 등급의 경우에는 아무것도 요리하지 말고 이미 만들어진 것을 사다가 준비할 수 있다.” 유용한 구분이다. 미리 손님 선호도를 정하는 구두쇠 또는 도덕가처럼 구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수고를 알아볼 줄 모르는 따분한 사람을 위해 정성들여 좋은 요리를 하는 것보다 더 맥 빠지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이 방식을 따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위한 ‘훌륭한 저녁’을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은 그대로 남는다. 다시 포미안의 말을 들어보자. “성공적인 저녁이 되려면 여덟 명을 넘어선 안 된다. 요리는 맛있는 것 하나만(내가 아니라 그가 강조한 것이다) 만들어야 한다. 마음이 좀 가벼워지지 않는가? 그래도 세 코스 식사 또는 대괄호 속의 치즈를 포함하면 네 코스 식사지만, 모든 수고는 메인코스에 집중된다. 그리고 언제든 포미안의 암시대로 애피타이저나 디저트, 또는 둘 다 케이터링 서비스나 제과점에서 사다 쓰면 된다.
아니 저는 애초에 여덟 명이 넘는 사람을 제 집에 초대해서 요리를 대접할 생각이 없고요, 두 명도 어렵습니다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귀하게 대접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그냥 근사한 곳에서 만나서 좋은 음식을 먹이면 안 될까요? 영화나 드라마에서 집에서 ‘디너 파티’를 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극도로 내향형인 저는 손에 땀이 난다고요! 꼭 집에 누군가를 초대해서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그냥 배달 음식으로 해결합시다…
마지막으로, 요리를 한 번이라도 해 본 사람은 크게 공감할 교훈 하나.
요리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교훈은, 요리책이 아무리 솔깃해 보여도 어떤 요리들은 반드시 음식점에서 먹어야 제일 맛있다는 사실이다. 내 경험으로는 디저트가 대개 그렇다. 생지가 양피지처럼 얇고 살짝 깨물어도 바삭거리고, 표면의 글레이즈가 반짝이는 그 완벽한 애플타르트를 만드는 건 어떨까? 일찌감치 꿈을 깨는 게 좋다. 뒤집어 굽는 타탱(설탕과 버터를 바른 팬에 과일 토핑, 반죽을 붓고 구운 것을 뒤집는 방식) 제빵 원리에 의존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렇다. 아 참, 런던 북부에 있는 음식점 모로(Moro)의 눈부신 요구르트 케이크도 마찬가지다. 나는 모로에서 펴낸 요리책을 보고 딱 한 번 그걸 만들어보았는데, 맛은 훌륭했지만 모양은 무언가를 게워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디저트 레시피를 읽기는 해도 매번 한숨만 쉬고 아이스크림 기계를 꺼낼 따름이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도, 나처럼 좋아하지 않더라도 일단 요리를 조금이라도 해 보았다면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에세이다. 이걸 읽고도 나는 내가 요리를 잘하게 되는 날이 오는 것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 요리를 시도해 볼 시간이 조금 더 생기기를 바랄 뿐… 그렇지만 시간 여유가 생긴다면 나는 아마 책을 읽는 데 쓰지 않을까. 어쨌거나 책은 마음의 양식이니까 이것도 먹는 걸로 치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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