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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슈테판 츠바이크, <우체국 아가씨>

by Jaime Chung 2025.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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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슈테판 츠바이크, <우체국 아가씨>

 

 

⚠️ 아래 후기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우체국 아가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의 한 시골 마을. 우체국에서 일하며 소박하고 무료한 삶을 살던 크리스티네의 삶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오래전 미국으로 떠난 이모가 스위스 휴양지에서 크리스티네를 초대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에 크리스티네는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긴장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는 마음으로 스위스로 떠나는데…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름만 들었는데 작품은 이번에 처음 접했다. 초반에는 지루하다 싶었는데 크리스티네가 돈 많은 이모와 이모부와 지내며 ‘돈의 맛’을 보고 화려한 삶을 즐기면서 변하는 모습을 보니 흥미진진해졌다.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로 쫓겨나듯 그 휴양지를 떠나 집으로 돌아온 크리스티네는 예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데, 이게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호화롭고 편한 삶을 잠시나마 맛보았으니 과거로 돌아가긴 어려울 법도 하지만(이건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자기가 뭐라도 된 듯, 다른 사람들보다 낫고 귀한 사람인 양 구는 건 정말 재수없었다(이건 이해가 안 된다). 그렇다면 크리스티네는 ‘돈’ 때문에 변한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러 기질이 있었는데 돈 때문에 그게 드러난 것에 불과한 걸까?

개인적으로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대니얼 키스의 <앨저넌에게 꽃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싸가지 없음’의 씨앗은 이미 이 주인공들 안에 있었던 거다. <앨저넌에게 꽃을>의 주인공 찰리의 경우를 보면, 갑자기 뭐 뇌를 건드려서 IQ가 천재 수준으로 상승했는데 성격이 개싸가지 없게 변했다? 말도 안 된다. IQ가 높으면 사회적 공감도 지능의 일부라는 걸 모를 수가 없다. ‘천재’가 됐다고 자기를 연구하는 의사나 다른 사람들에게 경우 없이 구는 찰리를 보면서 ‘이렇게 약자에게 강한 척하는 새끼가 지금까지, 수술 전까지 ‘착하고’ ‘순수한’ 모습을 보였던 건 그냥 강자 앞에서 약자가 되어 설설 기는 거였구나’ 생각했는데, 이걸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화려하지 않고 소박해도, 큰일은 없어도 예측 가능하고 소소하게 사는 것도 그 나름대로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인데, 그것도 모르고 그저 무조건 화려한 삶! 돈이 넘치는 삶! 예쁜 옷 입고 맛있는 거 먹는 삶! 이런 것만 그리워하고 있으니 크리스티네가 한심해 보였다.

개중에 제일 한심한 건, 군인 출신이자 지금은 이런저런 일용직으로 살아가고 있는 페르디난트랑 연인 사이가 되어서 인생을 망치는 거다. 처음에는 그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그를 도와주고 싶고 편하게 해 주고 싶어 하는데, 이 정도는 착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연애를 잘 안 해 본 여자답게 동정심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그에게 몸을 던지는 게 진짜 못났다. 남자들은 절대 동정심으로 사랑을 시작하지 않는데 여자들은 왜 그러는 걸까? 남을 돌봐주고 도와주는 게 여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하도 어릴 적부터 세뇌되어서, 그런 데서 자신의 가치를 찾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추측만 할 뿐이다. 어쨌거나, 그 동정심으로 시작한 관계 내에서 딱히 행복하지도 않다가 페르디난트가 처음엔 자살을 제안하니까 자기도 그러겠다고 하다가, 크리스티네가 일하는 우체국 안에 돈이 있다는 걸 그가 알게 되어 그 돈을 훔칠 생각을 하니까 거기에도 가담하려고 하는 게, 하나같이 추하다. 소박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범죄자로 타락하는 엔딩? 가슴이 옹졸해진다… 애초에 그 범죄도 자기가 직접 구상하거나 원한 게 아니고 자기 남자 친구란 자가 ‘나는 군인이었는데 국가가 나에게 충분히 보상해 주지 않았다’ 어쩌고 하는 혓바닥 긴 소리를 하니까 거기에 동조해서 하는 거라는 게… 모든 게 짜친다.

다 읽고 나니 그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이런 무드의 글을 좋아하는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실 듯. 나는… 일단 다 끝냈으니 이걸로 만족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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