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스즈키 이즈미, <여자와 여자의 세상>
일본 여성 SF계의 전설이라고 하는 스즈키 이즈미의 ‘프리미엄 컬렉션’. 그가 쓴 소설 7편과 에세이 4편이 담겼다. 개인적으로 일본 문학에는 전혀 조예가 없고 SF도 엄청난 팬은 아니니(종종 읽긴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해 내리는 평이 얼마나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무척 사적인 리뷰를 써 보려 한다.
전반적으로 스즈키 이즈미의 작품에서 느낀 감상은, ‘여간내기가 아니다’라는 것. 소설에는 외계인이나 미래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단순히 소재뿐만 아니라 그냥 여러 가지 면에서 저자가 보통 여자가 아님이 느껴진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까 작가가 누드모델도 하고 성인영화 배우로 활동도 했으며, 천재 색소폰 연주자와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발가락을 절단하는 소동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가. 내 어휘력으로는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말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다.
솔직히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별로 구분이 가지 않는, 어떤 목적으로 쓴 건지 모르겠는 에세이들을 제외하고 소설들을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표제작인 <여자와 여자의 세상>은 남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 ‘여자들의 세상’이 배경이다. “남자들은 폭력과 지능으로 사회의 지배자가 되어 전쟁만 해댔다. 그들은 크고 작은 전쟁에서 사는 보람을 찾아내고 있었던 것일까. 전쟁은 일상생활에까지 파고들어 와, 교통 전쟁이라든가 입시 전쟁이 생겨났다. 그런 것들이 궁지에 몰리자 끝내 전쟁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었다. 물론 사태가 나빠진 것은 남자들의 책임이다. 그리고 교통사고와 입시 경쟁이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 되자, 그것들은 지옥이라는 말로 바뀌어갔다. 교통 지옥, 입시 지옥 같은 말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말 이상하게도 20세기 후반부터 태어나는 남아의 수가 적어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특수 거주구에 가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다.” 여자들만이 사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 ‘나’는 우연히 집 근처를 지나가는 남자아이를 보게 되는데… 극 중에서 주인공은 급우들과 같이 거주구 견학을 가게 되는데 그때 말로만 듣던 ‘남자’라는 존재를 직접 보게 된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학생들은 “기대한 거랑은 달랐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지금 학교에서는 예전 만화가 유행이다. 예전 것은 영화나 소설 등 금지된 것이 많지만, 그 무렵 순정만화라 불렸던 것은 허가되어 있다. 거기에 나오는 남자들은 주로 소년이 많은데, 굉장히 매력적이다. 남자를 모방하는 여자들은 이 순정만화를 참고로 하는 경우가 많다. 소녀들은 그런 것이 남자라고 믿고 있다. 여주인공이 마음을 둔 상대는 대체로 말랐다. 돼지보다 살찐 남자는 조연으로 나오는 경우는 있어도 주연은 못 된다. 연약하고 긴 팔다리에 얼굴이 섬세하게 생겼고, 차갑거나 상냥하거나 순정파다. 정열적인 사람은 거의 안 나온다. 그 남자다움으로 소녀들애게 인기가 많은 배우는, 레이의 말에 따르면 ‘무척 정열적’이라고 한다. 소녀들은 예전 만화를 읽고서 남자란 이런 거였다고 믿고 있으니, 오늘은 실망한 것이다.
아무렴 기대한 것과는 다르겠지… 너희들이 본 것은 여성이 재창조한 버전의 남자란다. 실제 남자와는 백만 년 정도 떨어져 있지.
<계약>의 주인공은 우주 외계인과 텔레파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남자의 딸 아키코이다. 그도 아빠와 마찬가지로 텔레파시 능력이 있으며, 고향 별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믿는다.
<밤 소풍>은 괴이한 존재들이 평범한 ‘인간’을 흉내내 소풍을 가는 이야기이다. 이 행성, 적어도 이 도시에는 그들 이외에 다른 ‘인간’은 없는 것 같아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니 영화 속에서 본 ‘인간’들처럼 행동하려 하는 이유는 뭘까?
<유 메이 드림> 속 세상은 인구 조절을 위해, 자원한 사람의 몸은 냉동하고 정신은 원하는 상대의 ‘꿈’에 들어가게 해 준다.
<페퍼민트 러브 스토리>는 무려 12살이나 차이가 나는 커플의 이야기이다. 참고로 여자 쪽이 연상이다.
<달콤한 이야기>에서 주인공 여자는 외계인 같아 보이는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외모는 인간 같은데, 행동거지가 묘하게 인간 같지 않은 이 남자, 진짜 외계인일까 아니면 사기꾼일까?
<무조건 지루해>는 인생조차 프레임에 넣어 영화처럼 그저 ‘보기’만 하는 미래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예컨대 주인공 커플은 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무겁고 딱딱한 것으로 때려 피를 흘리며 쓰러지게 만드는 광경을 목격하는데, 남자는 “피 냄새를 맡으려다가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그건 연기다. <그>에게는 후각이라는 게 거의 없으니까. 냄새도 맛도 모르니까. 그런 경향은 내게도 있다. 요즘 애들이 먹는 데 흥미가 없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이 텔레비전 속 한 장면으로 보이는 것도.”
스즈키 이즈미의 작품을 페미니즘 SF 소설이라고 하는데, 흔히 생각하는 ‘여성이 어려운 일을 해낸다!’류의 단순한 서사는 아니다. 여성 캐릭터들이 주가 되는 것은 맞고 반여성주의적이라는 건 아닌데… 설명하기가 어렵다. 취향에 따라 반응이 갈릴 수 있으니 흥미가 느껴진다면 한번 시도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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