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에밀리 부틀, <우리는 왜 진정성에 집착하는가>
‘진정성’, 이처럼 상투적이고 깊은 생각 없이 쓰이는 말이 있을까. 사람들은 연예인이 ‘진실(authentic)’하지 않다고, 가식적이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에 대한, 정확히는 이 단어가 가리키는 바에 대한 믿음을 잃은 지 오래다. 아마 10년쯤 전, 내가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의 <혁명을 팝니다>를 읽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어떤 연예인이 한 말이 (예컨대 “팬 여러분 사랑해요!”)가 진심인지, 미디어에서 비추어지는 모습이 실제 그 자신의 모습과 같은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까. 연예인은 다 이미지 장사인데. 그 연예인이 유난히 솔직한 사람이라고 해도, 애초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연예인이든 아니든) 진심을 알 수가 있나? 너무 회의적이라고? 글쎄. 어쨌든 나는 진정성이라는 말에, 특히 연예인이나 미디어와 관련해 쓰이는 이 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역사를 이렇게 설명했다.
진정성은 개인의 자기표현을 중시하는 예술 운동이었던 낭만주의의 태동과 함께 18세기 후반에 부상했다. 진정성은 우리 각자의 내면에 고유하고도 진실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진짜 내가 아닌 것들과 별개로 ‘진짜 나’가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진정성이란 여러 면에서 성실성과 상반되는 개념이었다. 진정성은 개인의 영혼에 내재하지 않는 것들 즉, 사회 구조나 환경을 적극적으로 전복시키고 진정한 내적 자아를 해방하여 군림하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어원적으로 보았을 때 진정성은 그리스어 오토auto에서 유래한 단어로, ‘자기, 자기 자신의, 혹은 그 자체의’라는 의미가 있다. 찰스 귀논이 《진정성에 대하여On Being Authentic》에서 말한 바와 같이, 진정성은 ‘자신을 소유하는 것, 자기 소유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는 하나의 이상’이었다. ‘자신을 소유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해석한 현대 사회의 ‘개인 브랜드personal brand’ 개념을 고려해 볼 때, 귀논의 정의는 큰 의미를 지닌다.
요즘 이 말은 상업적인 면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이 책의 첫 장은 ‘셀럽’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나는 아래에 인용하는 이 문단이 내가 이 단어에 대해 갖는 느낌을 정확히 설명한다고 본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공감이 간다고 말할 수는 있다. 공감하는 주체가 당신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면 진정성을 객관적인 용어로 정의하기는 그보다 어렵다.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내적 진실을 세상에 실현하는 것인데, 당신 자신의 진정성은 당신의 느낌으로 알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의 진정성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국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성이 오직 행동으로 표출되어야만 한다는 명백한 역설을 제쳐 두더라도, 이것은 진정성이 눈에 보이는 상징에 의존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공감성이 등장한다. 공감이 간다는 말이 의미를 갖게 되는 상황은, 온라인에서 상투적으로 쓰이는 표현에 따르면 대체로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행동이나 평상시라면 숨기고 싶었을 행동을 의미할 때이다. 바로 그런 상황에 공감이 가는 것과 진정성 있는 것이 포개어진다. 물론 단지 우연의 일치일 뿐이지만.
그리고 셀럽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카다시안 가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다시안 가족은 ‘유명한 걸로 유명한’ 현상의 좋은 예이자, 진정성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예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팔리고 있는 진정성이라는 개념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거짓이고 가짜이기 때문이다. 진정성은 고백의 개념으로 팔리고 있고, 자신의 가식을 인정하는 개념으로 팔리고 있다. 카다시안 가족은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한 적이 없다. 그들은 만들어진 사람들이고 물질적인 사람들이다. 자신들이 가짜임을 인정하는 한 그들은 방탄복을 입은 셈이다. 2015년에 방영된 〈카다시안 따라잡기〉의 어느 한 에피소드에서, 카다시안 자매는 막내 카일리 제너(크리스 제너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났다)에게 그 점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당시 17세였던 카일리는 입술 모양이 심하게 변형된 상태였다. 누가 봐도 필러 시술을 받은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그러한 변화가 자신의 ‘립 키트’ 제품 덕분인 것처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기자들이 입술에 대해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은, 카일리의 언니 클로에의 말을 빌리자면, 카일리가 자신의 시술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피소드 초반에는 클로에가 엉덩이의 셀룰라이트를 레이저로 제거하는 장면이 버젓이 나온다. 카일리 제너는 입술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인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신이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프로에서 이미 시술을 받았다고 명백히 밝힌 상황에서, 카일리의 그런 발언은 그 자체로 놀라웠다. 결국 킴과 클로에의 격려 덕분에 카일리는 변화한다. 그는 ‘언니들이 자신의 불안을 인정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말한다. 이렇듯 시술 받은 것을 내면의 불안을 인정하는 행위로, 내적 진실의 외적 발현으로 만드는 순간 그 행동은 진정성을 지닌다. 그 결과 카일리 제너는 용감하고 정직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리고 여전히 입술이 가장 유명하다.
사실 내가 제일 흥미롭게 읽은 것은 제2장 ‘예술’이다. 예술만큼 ‘진정성’이 중요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하지 않은 분야도 없는 것 같다. 일단 ‘자전적 소설’ 이야기부터 먼저 해 보자. 저자는 자전적 소설을 이렇게 평한다.
자신을 좀 더 잘 알기 위해 타인에게서 자신을 보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이 아마도 현대 사회에서 자전적 소설 즉, 작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한 소설에 대한 집착을 부추겼을 것이다. 작가들이 이런 식으로 내면을 드러내어 취약해지면, 독자들은 자신의 진정성을 확인하며 힘을 얻고 안도한다. 혹은 강력한 ‘타자’의 세계에 완전히 몰입하여 유동체가 되는 경험을 한다. 저자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고정되어 있을 때, 독자는 작가를 정신적 지주 삼아 비로소 생각들과 자기 인식을 자유롭게 펼쳐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종의 공감성으로 표출된다. 타인이 드러낸 자아로 의해 우리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거나 그 타인이 우리 자신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을 더 잘 포착하고 표현했다고 느끼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 어떤 식으로든 타인의 내면세계를 드러낼 때, 우리가 그 작품에 완전히 몰입하려면 일종의 굴복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종의 신뢰 연습이다.
베를린 예술 대학의 미디어 이론가 브리기테 바인가르트는 현실과 상상의 충돌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장르인 자전적 소설에 대해 2019년에 이런 글을 썼다. ‘소위 일상의 소소한 사건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가치 있는 자원으로 거래된다면,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날것’이고 공감 가는 책들이 갈수록 출판 시장을 점령하는 현상은 자신의 이야기를 서사화하려는 대중의 열망이 반영된 것이다. 언론계와 출판계 전반에 걸쳐 자전적 소설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자전적 소설은 1977년 세르게이 두브로프스키가 자신의 소설 《휠스Fils》를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한 용어이다. 최근에는 자전적 요소를 지닌 모든 허구의 작품에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자전적 소설’이라는 분류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 대한 탐구가 일상화되기 이전에 출간된 수많은 소설에 소급 적용된다. D. 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Sons and Lovers》,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카퍼필드David Copperfield》를 예로 들 수 있다. 진정성에 대한 집착이 자전적 소설에 대한 현대인의 열광을 더욱 부추긴다. 자전적 소설에 대한 논의는 작품 자체의 서사에서나, 더 크게는 진화하는 문학 정전에서나, 자아와 자아의 정당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어떤 작품에 ‘자전적 소설’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행위는 과거에는 암묵적이었던, 작품이 실제와 허구의 결합이라는 사실을 명시한다. 그러한 명시가 오히려 그 혼합물을 망가뜨린다. (…)
작품 속에서 작가의 존재가 선명하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독자의 진정성 있는 경험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 있다. 라이오넬 트릴링이 말한 것처럼, 20세기 초 모더니즘 문학은 ‘충격적일 정도로 사적이어서 우리가 결혼 생활에, 직업에, 교우 관계에 만족하는지를 묻고 ···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는지 묻는다.’ 그런데도 작가들은 자아를 초월한 예술가임을 자처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예술가의 개성은 ··· 존재하지 않음으로 마침내 스스로 정제되는 것’이라 했고, T. S. 엘리엇은 ‘예술가의 발전은 ··· 지속적인 개성의 소멸’이라고 했다. 트릴링은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자아에 대해 질문하게 하는 작품의 힘이 쇠퇴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의 진실은 작품 속 더 깊은 곳에 박혀 있는 것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논의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예술가가 표절을 하거나, 작품 속 어떤 (사실 또는 개인적 경험에 기반했다고 여겨졌던) 부분이 거짓으로 판명난다면, 그것도 저자의 ‘진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거짓으로 쓴 작품이 때때로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하는 게 사실이니까 말이다(위키페디아에는 아예 거짓으로 판명된 회고록과 일기를 다루는 페이지가 따로 있다). 가장 유명한 게 아마 국내에서는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일 것이고(미국 체로키 인디언 후손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전직 KKK단 회원인 백인 우월주의자의 작품이다), 미국에서는 오프라 윈프리의 북클럽에 소개되어 큰 인기를 얻었던 제임스 프레이의 <A Million Little Pieces>를 들 수 있겠다(처음에는 이 책이 회고록으로 출판되었으나, 저자가 약물 중독과 재활원에서 지낸 세월에 대한 부분이 많이 창작되었음이 밝혀졌다). 진짜인 줄 알고 감동받았는데 사실 거짓이었다면 ‘내 눈물 돌려 줘!’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논할 것도 없이 ‘진정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저자가 언급하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작품에서 예술성을 (원한다면)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이게 꼭 ‘진실’이어야 한다는 생각만 버리면, 이야기가 어찌나 극적으로 잘 진행되는지(물론 삶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없다), 또는 문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등등. 심지어 진실에 어느 정도 기반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저자와 작품을 따로 떼어놓고 비평할 수도 있지 않나? 나는 이런 이야기가 더더욱 궁금했는데 예술에 대한 이 장의 논의는 페르소나로 흘러가 버려서 딱히 찾아볼 수가 없었다.
3장 ‘제품’에서는 현대 산업 사회에서 소비주의와 관련해 진정성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힙스터’들은 많은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것, 새롭고 ‘힙’한 것을 찾아다니는데 그것은 그들 나름대로 ‘진정성’을 (그런 제품들을 소비함으로써) 보이는 행위이다. 이때 그들의 대척점에 있는 게 ‘기본적인 년(basic bitch)’다(이 단어는 내가 “Ya basic!” - ‘베이식(basic)함’은 왜 여성들에게 모욕인가라는 포스트에서도 다룬 적 있다). 이 책 속 논의에서는 그 여성 혐오적인 함의는 쏙 빼놓고 이야기가 되었지만, (역시나 방금 언급한 내 포스트에서도 말했듯) 남자들은 다 똑같은 옷, 유행하는 옷을 입고 다녀도 ‘기본적이다(basic)’라는 비난을 받지 않는다. 이런 비웃음을 당하는 건 늘 여성이다. 이 점도 언급해 주면 좋으련만. 어쨌거나 나는 힙스터들의 그런 모습이 참 우습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특별함, ‘진정성’을 보여 주기 위해 남들과 다른 제품을 소비한다? 이게 음악으로 가면 홍대병인 거고 다른 예술 및 대체적인 분야에서는 마이너병인 건데. 사실 나는 자기 자신은 이러이러한 사람임을 보여 주기 위해 어떤 제품을 ‘소비’해야 한다는 점이 제일 웃기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행동, 그러니까 투표나 어떤 정치적인 행위(데모에 참여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떤 법안을 막거나 통과시키기 위한 서명 운동에 참여하는 일 등) 또는 일상적인 행위(예를 들어 주위 사람들 배려하기, 친절하게 대하기, 하루 끝에 자기 반성하고 더 나은 사람 되려고 다짐하기 등)를 통해 보이는 게 아닌가? 소비를 통해 자신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건 너무나… 자본주의적인 것처럼 느껴진달까… 이 자본주의 사회를 당장 내가 깨부술 수는 없더라도 나를 소비에 의존해 정의하지 않을 수는 있는데. 어쨌거나 저자는 이렇게 썼다.
힙스터리즘은 자신들이 표방하는 ‘진정성’이 ‘진정성 없음inauthenticity’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쇠퇴했다. 그 결과 ‘기본적인 년’들의 ‘진정성 없음’과 그들의 대중적 취향이 오히려 진정성 있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서 진정성을 연기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진정성은 그 의미를 잃는다. 자기 인식이 없어도 진정성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저 주류의 취향에 순응하며 살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하지 않는다면, 진정성 있는 자아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더 나아가서, 대중적 흐름에 의존하건 거부하건 간에 당신의 진정성이 오직 그것만을 위해 구축된다면? 그것을 진정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은 여전히 당신 자신인가?
이 책에서 다룬 모든 논의들을 내가 여기에서 다 언급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으로 이것만은 짚고 넘어가고 싶다. 저자는 트랜스젠더에 대해 이렇게 썼다.
페미니즘은 당신이 갖고 태어난 육체와 상관없이 외적 정체성의 표식으로 판단되지 않고 진정한 자아를 구축할 자유를 말한다. 이 개념의 그 어떤 대목에서도 트랜스 여성이 여성임을, 또는 트랜스 남성이 남성임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의 육체는 역사적으로 폭력의 대상이었고 개인의 자아는 그러한 조건들을 중심으로 구축되었기 때문에(아마도 그 개인들 역시 폭력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일부 시스젠더 여성은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진정성 있는 경험을 정의해 왔던 젠더 경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여성 정체성의 경계에 대한 의심은 여성의 자기 이해에 균열을 일으켰다. 여성성이 진정성을 요구하려면 오직 한 가지 버전의 여성성만이 존재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은유하는 동상은 펜스를 두르고 수호하면서 다른 이의 동상은 훼손하는 사람들, 트랜스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말해서, ‘타인의 주체성을 제압하거나 침해하거나 말살하려는’ 사람들이다.
일단 첫 줄은 옳은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문장은 ‘어라?’ 싶다. 이건 너무나 트랜스-친화적인 소리다. 현실적으로 내가 여성이라는 신체를 타고난 것은, 소위 ‘트랜스 여성’(타고난 성 남성)이 한 것처럼 내가 입거나 벗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트랜스 여성’이라는 남자들은 자신의 ‘남성' 신체를 벗고 여성이 되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여성이라는 젠더에 가해지는 (이미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여성 혐오적 사회가 만들어 둔 이미지며 규율 등을 마음대로 벗을 수 없다. 게다가 ‘트랜스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어쩜 그렇게 진짜 여성의 현실에 관심이 없는지. 어릴 적부터 여자애들이랑 친근하게 지냈다거나, 화장하거나 꾸미기 놀이를 하고 싶었으니 나는 여자인 게 틀림없다는 생각은, 그 케케묵은 사고방식에 기반한 것 아닌가. 나는 그런 거 전혀 하고 싶지 않아도 여자인데요. 자기가 여자라고 생각한다면 진짜 여자들의 현실을 인지하고 공감하고, 그것을 더 낫게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지 않나.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내가 어떻게 같은 여자라고 봐 줘야 한다는 거지? 어쩄거나 저자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입장에서는 틀렸다고 말하고 싶었다. 쉴라 제프리스의 <젠더는 해롭다>를 추천드립니다.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이건 이렇다!’ 하고 딱 명확하게 어떤 정의를 내려 주는 책은 아니고, 내가 위에서 말했듯 ‘모든’ 논의를 다 다루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조금 아쉽다. 표절이나 거짓으로 밝혀진 작품들에 대한 논의는 저자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음직한데 왜 없을까. 한번 읽어 보기에 괜찮은 책.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김관욱, <사람입니다, 고객님> (0) | 2025.09.03 |
---|---|
[책 감상/책 추천] 줄리언 반스, <또 이 따위 레시피라니> (3) | 2025.09.01 |
[월말 결산] 2025년 8월에 읽은 책들 (7) | 2025.08.29 |
[책 감상/책 추천] 민지형, 정재윤, 임소라, 미역의효능, 류시은, 들개이빨,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 (4) | 2025.08.25 |
[책 감상/책 추천] 크리스타 K. 토마슨, <악마와 함께 춤을> (1) | 2025.08.22 |
[책 감상/책 추천] 김선지,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3) | 2025.08.20 |
[책 감상/책 추천] 단요, <마녀가 되는 주문> (3) | 2025.08.18 |
[책 감상/책 추천] 김선미, <스티커> (10) | 2025.08.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