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그래디 헨드릭스,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

제목부터 너무 흥미롭지 않습니까. 원제는 ‘The Southern Book Club’s Guide to Slaying Vampires’로, ‘호러북을 읽는 북클럽’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보다는 ‘(미국) 남부’ 가정주부들의 북클럽이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이 1980-1990년대인 데다가, 미국 남부라고 하면 다른 지역보다 좀 더 전통적인(그러니까 여성 혐오적인 분위기가 더 강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미국 남부의 가정주부들이다. 이들이 속한 ‘딱히 북클럽은 아닌 북클럽’은 테드 번디 같은 살인자나 살인, 또는 호러 등과 관련된 책을 읽는다. 어느 날 이 동네에 미끈한 젊은 남자 제임스가 이사 온다. 창백한 피부에, 어릴 적에 늑대에게 물려서 경미한 뇌 손상을 입어 눈의 운동 제어가 안 되고 햇빛을 보면 극도로 고통스럽다고 한다. 남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어오세요’라는 초대를 받아야만 발을 들여놓는 것도 수상하다. 누가 봐도 뱀파이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퍼트리샤 캠벨은 멀쩡한 사람을 마약상 취급한다며, 심지어 같은 북클럽 회원들인 주부들에게도 외면당하고 마는데… 그래도 책 제목대로 이들이 뱀파이어를 처단하겠죠?
이 소설은 ‘가정주부’들이라는, 능력도 없어 보이고 대단치 않아 보이는 여자들 한 무리와 ‘뱀파이어’라는 초자연적인 존재의 대치 구도를 보여 준다(본문에 인용된 것처럼, 1971년 소형판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주부(Housewife)’라는 단어를 ‘(명사) 가볍고 무가치한 여자 또는 소녀’라고 풀이했다). 싸움도 안 될 것 같은 이 구도는 참으로 신선한데, 저자는 본문 시작 전에 나오는 ‘작가의 말’에 이렇게 썼다.
이 소설은 뱀파이어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뱀파이어는 데님 옷을 입고 과거도 연줄도 없이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방랑하는 미국식 떠돌이 남자의 유명한 전형이다. 생각해보라, 잭 케루악*, 셰인**, 우디 거스리***를. 생각해보라, 테드 번디****를....
*1950년대 비트족과 히피 문화를 대표하는 미국 작가.
**잭 셰퍼의 동명 소설에 등장하는 떠돌이 총잡이.
*** 미국의 포크 싱어송라이터.
**** 1970년대 미국의 연쇄살인범.뱀파이어는 타고난 연쇄살인마이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걸 상실했다. 친구도, 가족도, 뿌리도, 자녀도 없다. 가진 건 허기뿐이다. 먹고 또 먹지만 결코 배부를 수 없다. 나는 이 소설에서 자신의 식욕을 제외하고 그 어떤 책임도 질 일이 없는 남자와 삶 전체가 끝없는 책임으로 점철된 여자들을 싸움 붙이고 싶었다. 드라큘라와 내 어머니를 싸움 붙이고 싶었다.
이제부터 보게 되겠지만, 그건 공평한 싸움이 아니다....
와! ‘자신의 식욕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책임도 질 일이 없는 남자’와 ‘삶 전체가 끝없는 책임으로 점철된 여자들’의 싸움이라니! 뱀파이어를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이 표현이 너무너무 신선했고, 머리 위에 전구가 켜지는 듯했다. 맞지. 사람이 살아 있으려면 피가 필요한데 그걸 빼앗는 것만큼 이기적인 행위가 어디 있겠나. 그리고 가정주부만큼 무시당하고 자신이 하는 일에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직업도 없을 것이다. 책임 없는 쾌락만 즐기는 남자와 쾌락 없이 책임만 지는 여자들. 이 둘이 싸워서 결국 후자가 이긴다는 게 정말 너무너무 좋았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단연코 유머다. 소설 초반부터 진짜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데, 예컨대 이런 것들이다. 맥락을 알려드리자면, 퍼트리샤가 북클럽에서 정한(아직 ‘딱히 북클럽은 아닌 북클럽’은 아니고, 아주 딱딱하고 재미없는 북클럽이다) 책을 읽지 못하고 북클럽 모임에 가서 책을 읽은 척을 하려고 하는데, 북클럽 사회자가 ‘타계한 작가를 위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집시다’ 하고 제안한 상황이다.
퍼트리샤의 뇌가 꼬리잡기를 하며 빙글빙글 돌았다. 작가가 죽었어? 최근에? 신문에서 아무것도 못 보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어떻게 죽었지? 살해당했나? 들개에 물려 갈가리 찢겼나? 심장마비?
“아멘.” 마저리가 말했다. “퍼트리샤?”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퍼트리샤의 영혼이 저세상으로 승천함으로써 그녀는 사방을 둘러싼 여자들의 처분에 맡겨졌다. 그레이스 캐버노가 있었다. 퍼트리샤네에서 두 집 떨어진 곳에 살았지만 두 사람이 만난 건 그레이스가 초인종을 누르고 이렇게 물었을 때가 유일했다. “귀찮게 해서 죄송한데요, 여기에 사신 지도 반년째니 이젠 좀 알아야겠어요. 마당 외관을 일부러 이렇게 꾸민 건가요?”
“퍼트리샤, 이 작품이 넬슨 만델라에 대해 했던 말에는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정말 감동적이었죠.” 퍼트리샤가 대답했다. “그의 존재는 무엇보다 두드러지잖아요. 그렇게 언급되는 것만으로도.”
“그런 것 같지 않은데요.” 마저리가 말하자 슬리크가 끄덕임을 멈췄다. “넬슨 만델라가 언급된 부분을 어디서 봤죠? 몇 페이지요?”
퍼트리샤의 영혼이 다시 빛 속으로 승천하기 시작했다. 잘 있어, 영혼이 말했다. 잘 있어, 퍼트리샤. 이젠 네가 알아서 해……
“그게.” 퍼트리샤가 꺽꺽거리며 말했다. 그녀는 이제 죽은목숨이었고 보아하니 죽음은 아주, 정말, 건조한 것처럼 느껴졌다. “저자가 그러려고 했다고요. 생각이 발전하는 걸 느낄 수 있다고요. 여기. 이 작품에서요. 우리가 읽은.”
“퍼트리샤.” 마저리가 말했다. “책을 읽지 않았죠, 그렇죠?”
시간이 멈췄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싶었지만 퍼트리샤는 평생에 걸친 가정교육으로 완성된 숙녀였다.
“약간요.”
이런 유머에 킬킬대면서 읽어 나가면 오래 지나지 않아 이 소설에 푹 빠질 것이다.
이 책 원서 표지에는 아주 탐스러운 복숭아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도 다 이유가 있다. 퍼트리샤의 남편인 카터의 어머니, 즉 퍼트리샤 입장에서 보면 시어머니인 미스 메리와 관련이 있다. 미스 메리는 고령으로 인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정말 그럴까? 미스 메리는 제임스의 비밀을 안다.
미스 메리는 커피찌꺼기로 날씨를 예측할 수 있었고, 동네의 목화밭 농부들은 그 예측이 얼마나 용한지 익히 알았기에 그녀가 우편물을 가지러 허스커 얼리네 가게에 들를 때면 늘 손에 커피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뒷마당 복숭아나무에 제아무리 훌륭한 복숭아가 열려도 아무도 못 먹게 했다. 그 나무가 슬픔 속에 심겼고 열매에서 쓴맛이 난다는 게 이유였다. 퍼트리샤가 한번 맛을 봤을 때는 부드럽고 달콤하게만 느껴졌으나 그 사실을 얘기하자 카터가 화를 내는 바람에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호러물, 특히 공포 ‘영화’는 페미니즘과 거리가 먼 장르처럼 보인다. 주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결국 마지막에 살아남는 여자 ‘파이널 걸(Final Girl)’ 트로프(트로프에 대한 설명은 여기에)는 거의 언제나 성 경험이 없는 ‘정숙한’ 여자다(이 트로프를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 기사를 참고하시라). 이 트로프를 뒤짚어, 어쩌다 살아남은 여자들이 ‘자조 그룹(support group)’을 형성한다는 설정의 소설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 이 작가 그래디 헨드릭스의 또 다른 작품이다. 사실 나는 이 작가를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이라는 책에 대해 들어서 알게 되었는데, <호러북클럽이 뱀파이어를 처단하는 방식>이 더 먼저 출간되었기에 이것 먼저 읽었다. <파이널 걸 서포트 그룹>도 읽어야지! 이 책도 너무너무 재미있으니까 공포와 여성 혐오를 연결한, 참신한 여성주의적 소설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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