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들개이빨, <진짜진짜최종>

by Jaime Chung 2026. 3. 13.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들개이빨, <진짜진짜최종>

 

 

내가 재미있게 본 <한국에 남자가 너무 많아서>에 참여한 들개이빨 작가의 산문집. 계약한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원고가 밀리고 밀려서 뒤늦게 나오게 된 책이라서 제목이 ‘진짜진짜최종’인 듯하다. 거의 모든 꼭지가(드물게 아닌 꼭지도 있긴 하지만) 편집자에게 원고가 늦어서 죄송하다는 말로 시작한다. 내용이라 하면, 저자 말마따나 ‘징징대고’, ‘앓는 소리’만 하는 게 전부다. 근데 그 불평과 ‘습관적 자기 비하’가 너무 웃기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이다. 참고로 아래 인용문은 무려 프롤로그, 본문의 가장 첫 문단이다.

죄송합니다, 편집자님. 산문집을 내기로 계약한 게 엊그제 같은데, 최최최종 마감일로부터 1년 반이나 지난 오늘에야 첫 글을 보내드리게 되었네요. 깊이 사죄드립니다. 원치 않으시겠지만 잠시만 변명의 시간을 좀 갖겠습니다. 변명 1) 글 원고는 만화 원고보다 훨씬 시간이 덜 걸릴 거라 오판하고 팽팽 놀았습니다. 2) 몸이 좋지 않았습니다. 3) 결정적 변명, 저는 ‘만화가’를 주제로 한 글을 쓸 자격이 없는 만화가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자격이 있는가. 만화를 보고 그리는 게 너무 즐거워 어쩔 줄을 모르는 만화가입니다. 혹은 만화로 떼돈을 벌었거나 전 국민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한 만화가입니다. 이런 작가님들이 써야 공익이 증진됩니다. 저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만화를 적당히 좋아하고, 세상의 한쪽 구석에 이름이 아주 조금 알려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상은 변변찮은 인간입니다. 게으르고 툭하면 싫증 내고 조그만 난관에도 쉽게 절망하여 “에휴, 이 망할 놈의 만화 일 얼른 때려치워야지”라는 텅 빈 푸념을 일삼는 인간일 뿐입니다. 이런 제가 무슨 글을 쓰겠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하루빨리 이 만화에세이를 그만두는 편이 모두에게 이로울 것 같습니다.

 

저자는 자기가 그리는 만화는 대단치 않고, 심지어 산문집은 더더욱 자신이 없다면서 이렇게 썼다. ‘정신적 기저귀를 끝도 없이 갈아줘야 한다’ 같은 표현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산문집은? 아, 큰일입니다. 이쪽의 상태가 더 심각한 것 같아요. 지금 쓰고 있는 글이 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공감이 되나요?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나요? ‘만화가’가 들어간 부제에 이끌려 책을 선택한 독자의 기대를 채워줄 만한 통찰과 유머가 있나요? 만화가가 되는 데 유용한 정보가 있나요? 하나도 없고 자학만 한가득이죠. 아아, 정말 큰일입니다. 같이 있기 진짜 짜증 나는 인간 중 하나가 습관성 자학자잖아요. 제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하고 “아니야…… 그런 소리 마…… 너 정도면 괜찮은데 왜……” 따위의 리액션으로 계속 기를 살려줘야 하니까요. 정신적 기저귀를 끝도 없이 갈아줘야 하는 거죠. 죄송해요. 제가 좀 그런 스타일이에요. 면목이 없습니다. 책을 홍보할 때 전면에 나서서 열심히 매력을 발산해야 할 작가가 기저귀나 차고 드러누워 있으니…….

 

하나만 더. 사람들은 저자의 필명 ‘들개이빨’을 ‘들깨이빨’, ‘늑대치아’(심지어 한 글자도 안 맞는다) 등 다양하게 틀리는데, 저자는 심지어 수상자 이름이 ‘들깨이빨’로 잘못 쓰인 상장도 받은 적 있다고.

아뿔싸…… 궁서체로 깨가! 주최 측에 정정을 요구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들개이빨이나 들깨이빨이나 대충 다 저라고들 생각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버지는 네가 필명을 바보같이 지어서 이 사달이 났다며, 강풀처럼 문자와 발음이 완벽히 같은 두 글자 이름을 지었어야 했다고 호통을 치시더군요. 납득합니다. 세상에는 남의 이름에 관심 없고 낯선 고유명사를 외우는 데 에너지를 쓰기 싫어하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간과한 제 탓이죠.

 

저자의 습관적인 자학을 보면 정이 떨어지고 실망하지 않겠냐고?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마지막으로 꼭 당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근에 포털사이트에서 ‘들개이빨’을 검색했다가 저의 전작 산문집에 대한 혹평을 봤습니다. 제 만화를 재밌게 보고 글에도 관심이 생겨서 찾아 읽었는데 실망했다, 괜히 봤다, 역시 작가에 대해 많이 알아봤자 좋을 게 없다는 평이었죠. 고마운 독자님, 죄송하지만 아직 실망하시기엔 이릅니다. 전작에 담긴 자학은 준비운동이었고요. 이번이 진짭니다. 저에 대한 정을 완전히 떼시려면 이 책을 읽으셔야 해요. 부디 제 마음이 전해지기를, 그리고 작가에 대한 실망에 바닥이란 없음을 깨달았다는 최신 혹평이 올라온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골방에 갇힌 채 혼자 글을 쥐어짜는 시간이 쌓일수록, 좋은 글은 결코 혼자 쓸 수 없다는 확신이 강해집니다. 책이 만들어지는 동안 저를 견뎌준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자기 비하, 징징거림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가 아닐까? 남이 우는소리 하는 게 뭐가 웃기냐 하겠지만 그런 말을 한다면 이 책을 안 읽어 본 게 틀림없다. 자신감? 그런 거 없이도 이 업계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저자의 말을 한번 들어 보시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