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신을 죽인 여자들>

종교와 여성의 재생산권이라는 주제를 다룬 <엘레나는 알고 있다>를 쓴 클라우디아 피녜이로의 다른 소설. 아르헨티나의 어느 마을, 아나라는 소녀의 시체가 토막 나고 불에 탄 모습으로 발견된다. 아나의 아버지 알프레도는 누가, 왜 아나를 죽였는지 30년간 진실을 쫓는다. 아나의 언니 중 한 명인 리아는 이 가톨릭계 가족에서 유일한 무신론자고, 아나가 죽은 이후 사르다 가문의 독실한 믿음을 견디다 못해 집을 떠나 다른 도시에서 서점을 운영하고 살고 있다. 어느 날, 아나의 다른 언니 중 한 명인 카르멘이 자신의 남편 훌리오와 함께 리아의 서점을 찾는데, 그들의 말인즉슨 사라진 아들 마테오가 리아의 서점에 가서 리아에게 말을 걸려 했다며 그를 설득해서 집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한다. 리아는 집을 떠난 이후, 오직 아나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는 노력을 그치지 않은 아버지하고만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고, 수녀가 되려고 했던 정도로 독실한 카르멘 언니와는 가깝지 않다. 조카 마테오는 왜 리아를 만나려고 한 것일까? 아나가 어떻게 죽은 것인지 드디어 진실을 찾아낸 것일까?
<엘레나를 알고 있다>를 아주 흥미진진하고 감명 깊게 읽었기에 이것도 꽤 기대하며 읽었는데, 솔직히 <엘레나를 알고 있다>만 못하다. 책이 재미없거나 별로라는 게 아니라, 내가 기대했던 것과 상당히 달랐다. 원제가 ‘Catedrals’(영어로 하자면 ‘cathedral’, 즉 ‘성당’)인 이 소설을 국내에 들여와 번역하며 <신을 죽인 여자들>이라고 제목을 바꾼 게 그 원인인 듯하다. ‘신을 죽인 여자들’이라는 제목을 들으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금기를 깨버린, 강인하고 멋진 여인들이 등장할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이 소설에 그런 여자들은 없다. 여성 캐릭터는 많지만, 내가 상상한 그런 인물들은 아니었다. 저자가 밝히듯 이 원제는 미국의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 <성당>에서 큰 영감 및 영향을 받았다. 아나가 죽은 곳도 성당이고, 성당이라는 건물이 띄는 강한 종교적 색채, 이것이 이 소설의 핵심이다. 한국어판 제목을 이렇게 지은 이들이 의도한 것은 ‘종교를 거부한 용감한 여성들’인 듯하나, 책을 다 읽고 보면 그래서 무신론자인 리아 말고 ‘신을 죽인 여자’라고 할 만한 인물이 누가 있나 싶다. 어째서 복수형인 거죠?

소설은 그래서 어떻게 아나가 어떻게 죽게 된 것인지, 그 전말을 그냥 보여 주지 않는다. 처음엔 리아로 시작해 그다음에 마테오, 마르셀라(아나의 시체를 가장 먼저 발견한 아나의 친구), 엘메르(아나의 시신을 살핀 부검의), 훌리안, 그리고 카르멘의 순서로 각각의 인물의 입장에서 자신이 보일 수 있는 진실을 조금씩 내보인다. 스포일러 주의 딱지를 붙였으니 속시원하게 밝히자면, 아나는 ‘살해’된 게 아니다. 아나는 병으로 죽은 것이다. 아나는 (후에 언니 카르멘의 남편이 된) 훌리오와 관계를 가졌는데 임신했고, 불법 임신 중절 수술을 받은 후 몬도르 병(가슴, 옆구리, 겨드랑이 부위의 표재성 정맥에 혈전이 생겨 염증을 유발하는 드문 양성 질환)으로 사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나는 그래도 온전한 시신 상태였는데, 이걸 본 마르셀라는 큰 충격을 받아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된다. 아나의 시신을 토막 내 불에 태운 것은 카르멘과 훌리오로, 아나가 임신 중절 수술을 받았었다, 즉 임신했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게 되면 자신들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을 우려한 짓이었다. 얼탱이가 없죠? 아나는 누구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를 가장 화나게 한 건 이런 반전이 아니었다. 훌리안이라는 정욕에 눈이 먼 작자와 남미새 카르멘, 이 환장할 커플이었다. 일단 훌리안을 먼저 줘 패자면, 훌리오는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카르멘과 사랑에 빠진다. 카르멘 역시 수녀가 되려고 했었고, 그래서 훌리오는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 한다. 그러나 피가 끓는 청춘이던 훌리오는 카르멘을 닮고 (카르멘의 말에 의하면) 언니가 가진 것은 뭐든 다 뺏어서 가져야 했다는, 경쟁심이 강한 아나에게 홀린다. 아나에게서 카르멘을 봤다나 어쨌다나. 훌리안은 아나가 먼저 유혹한 것처럼 말하는데, 이보세요, 그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미성년자 여자애가 관심을 보이면 좋게 잘 말해서 달래서 돌려 보내야지 거기에 넘어가면 그게 인간입니까? 그냥 동물이지. 애초에 카르멘을 사랑한다면서 왜 아나랑 섹스하는데? 사랑하는 여자와 섹스하는 여자를 따로 나누는 것 자체가 여성 혐오 아닌가.
그걸 나누는 정신머리도 어이가 없는데, 자신이 ‘사랑’한다는 여자의 동생과 관계를 맺은 훌리안은 아나가 임신하자 자신은 아기를 키울 수 없다며 은근하게 임신 중절 수술을 권한다. 이게 제일 짜친다. 그냥 ‘너도 나도 이 애를 키울 수 없으니 포기하자’가 아니고, ‘이건 전적으로 너의 선택에 달린 문제야. 네가 선택해. 하지만 나는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어’ 이런 식인 거다. 어떻게든 임신 중절조차, 그 책임과 수습을 전부 여자에게 다 몰아버리는 쩨쩨한 태도가 정말 어찌나 뻔뻔한지, 그가 내 앞에 있었다면 훌리오에게 싸대기를 날렸을 것이다.
카르멘이 말한 대로 나는 아나에게 임신중지를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것은 그녀가 내린 결정이었다. 만약 아나가 뱃속의 아이를 낳겠다고 결정했다면, 카르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꾸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겠지만 나는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계획한 대로 했다. 그래서 아이를 지우는 것이 모두 — 거기에는 그녀의 부모도 포함되지만, 이는 무엇보다 그녀 자신을 위하는 일이었다 — 에게 가장 좋은 일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마침내 그녀가 “난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요”라고 했을 때도 나는 침묵했다.
하지만 아나와 아기의 죽음에 대한 책임 — 이것이 가장 큰 책임이다 — 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때 나에게 얼마나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은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실제로 여성들은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싸워오지 않았던가? 임신중지는 자기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내가 무슨 책임을 져야 하는 거지? 그들은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 일단 결정을 내린 이상, 여자들은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나는 결정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느님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신 것뿐이다.
여성들이 성적 재생산권에 있어 자유를 주장한 것은 사실이고, 또 그 권리는 마땅히 여성의 것이다. 어떤 여성이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 피임 또는 임신 중절을 할 자유는 그에게 있다. 문제는 이를 교묘하게 자기 편할 대로 써먹으려 하는 남자들이다. 여성이 아이를 임신했다면, 그것을 키우든 지우든 온전히 여성이 선택할 바이므로, 자기는 아무 책임도 안 지고 그냥 빠져나가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놈들을 ‘싸튀충’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쾌락은 즐기되 책임은 전혀 안 지고 싶다? 에라이 도둑놈아!
그리고 훌리안이란 놈은 얼마나 뻔뻔한지, 자기 잘못은 신학생으로 순결 서약을 어긴 것과 아나와 섹스할 때 피임하지 않은 것,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한다. 뭔 개소리인지. 미성년자인 아나와 섹스한 것도 잘못인데, 무엇보다 아나가 ‘알아서’ 불법 임신 중절 수술을 받도록 나 몰라라 한 것도 잘못이고, 아나가 사망한 후 (그가 임신했었다는 사실을 혹시라도 누가 알게 될까 봐) 시신을 잘라서 불에 태운 것은 심각한 범죄다. 게다가 자기 장인인 알프레도가 손녀딸 아나가 누구에게 살해당한 것인지 진실을 찾으려고 그렇게 30년간 고생한 것과 그 일 때문에 이 사르다 가족이 전부 무너져내린 것에도 책임이 있지 않나. 이런 정신의 소유자가 성직자가 됐으면 횡령이든 신자 성추행이든 분명히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다. 믹서기에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라고.
지금도 나는 두 가지 사건, 즉 신학생으로서 순결 서약을 어긴 것과 아나와 섹스할 때 피임 기구를 사용하지 않은 것이 순전히 내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외의 다른 것은 내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은 내 행동의 결과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람이 저지른 행동의 결과였다. 그중 일부는 자신이 아무런 잘못이나 죄를 저지르지 않은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주장했다.
부창부수라고, 사실 누가 먼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이 부부는 아주 똑같다. 카르멘은 이런 훌리오를 방조했으니까. 아주 구구절절하게 자기 남편을 변호하는 부분이 참 가관이다. 카르멘은 자기 입장을 충분히 밝히고 해명하면 마테오(아래 인용문에서 말하는 ‘그 아이’)도 이해할 것이며, 훌리안 혼자서는 못할 일이었으니(아나와 관련된 모든 일을 말하는 듯) 자기가 ‘해결’해야 했고, 아나가 훌리안이 피임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섹스한 것 이외는 잘못이 없다고 주장한다. 얼씨구. 훌리안이란 놈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고작 그깟 남자 하나 때문에 인간성을 포기하는 거지? 남미새들은 진짜 인간적으로 여자라고 부르지도 말아야 한다. 내가 이런 치들과 같은 ‘여자’ 팀에서 뛰어야 하는 게 맞나?
나는 알고 있다. 언젠가 마음을 열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그 아이도 분명 나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내 입장을 충분히 밝히고 해명하면 그 아이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 또한 연기처럼 사라지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 부둥켜안고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울 것이다. 마침내 모든 것을 이해한 그는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가엾은 엄마. 그동안 엄마가 겪어야 했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가엾은 엄마.” 왜냐하면 이 사건에서 범죄를 저지르거나 죄를 짓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마무리 짓기 위해 진흙탕과 오물에 손을 담가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게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내가 해야만 했던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도 즐겁지도 않았다. 훌리안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애당초 훌리안이 해결하기에는 무리였다. 마테오가 그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그러니까 그 사건에서 내가 한 역할을 이해하고 그토록 잔인무도하고 처참한 일이 일어난 이유를 용납한다고 해도, 자기 아버지가 저지른 짓을 용서하기는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를 용서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용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훌리안은 신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나와 짧은 기간 동안 맺은 관계—그것을 관계라고 부를 수 있다면—를 그 즉시 내게 고백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후회하면서 고백했고, 마누엘 신부님이 지시한 보속을 행한 다음 용서 받았다. 아나와 섹스를 한 것 말고 훌리안이 저지른 또 다른 범죄나 죄가 있을까? 그 둘이 피임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섹스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난을 받아야 할까? 30년이 흐른 지금이야 다들 그렇다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 누가 콘돔을 사용했겠는가? 마테오도 이제 어엿한 성인 남자가 되었다. 만약 그에게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냉정하게, 또한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아버지에 대한 마땅한 애정을 가지고 아버지를 분석할 기회를 준다면, 성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훌리안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런 아버지를 옹호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원래 아들의 눈에 아버지는 무성애자로 보이는 법이니까. 더구나 훌리안처럼 영적이고 신앙심이 강해서 세속적인 문제에 거의 관심이 없고 사소한 일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아버지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 그래서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기분이 갑갑해졌다. 미성년자 여자애를 임신시켜 놓고 정작 임신 중절에 있어서는 책임을 전부 그 여자애한테 전가한 놈이나, 그런 놈이랑 짝짜꿍이 잘 맞는 남미새나… 배경이 아르헨티나라서 그렇지 한국에서도 일어날 법한 일이라서 그저 더욱더 속이 답답했다. 일단 여성의 인권을 끌어올리려면 이 남미새들부터 어떻게 해야 한다. 여성의 권리 향상에 도움을 못 줄 거면 방해도 하지 마라. 하… 제목이 약간 사기인데 읽으면 빠져들고 몰입해서 (작가 말고 등장인물들에게) 욕하게 되는 그런 소설이다. 혹시 저혈압이신 분들 계시면 치료제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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