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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전성진, <몸을 두고 왔나 봐>

by Jaime Chung 2026.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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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전성진, <몸을 두고 왔나 봐>

 

 

내가 재미있게 잘 읽은 <베를린에는 육개장이 없어서>의 작가 전성진의 에세이. 그는 2023년 5월, 베를린의 볼더링 스튜디오에서 추락해 왼쪽 팔꿈치 인대 두 개나 파열되고, 왼쪽 발목이 삼중 골절됐다. “태어나서 느낀 적 없는” 통증을 느끼는 와중에도 그는 농담을 떠올렸다. “나중에 말하면 웃길 이야기와 우스운 장면을.” 이것은 다친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하면서 그 안에서 웃음을 찾고 자신의 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고스란히 담은 에세이다.

 

웃긴 얘기는 웃긴 얘기인데 슬프고 웃기다. 일단 저자의 가족 이야기가 그러하다.

내가 찾은 ‘웃긴 이야기’를 몇 개 말해주겠다.

첫 번째 이야기. 엄마는 자꾸 같이 죽자고 하면서 식칼을 예쁜 쟁반에 담아 가져온다. 어차피 죽을 생각이면 다 필요 없는 일인데 엄마는 항상 쟁반에 식칼을 정갈하게 담아 내 앞에 내오곤 했다. 나와 같은 세대라면 한 번은 들어봤을 ‘같이 죽자’ 레퍼토리지만 엄마는 유독 엣지가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 내가 텔레비전을 오래 보면 엄마는 서서히 화가 난다. 엄마에게 텔레비전의 다른 이름은 ‘바보 상자’다. 한번 나기 시작된 화는 반드시 폭발했는데 그러면 엄마는 텔레비전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코드 선을 가위로 잘랐다. 며칠이 지나 화가 풀리면 엄마는 절연 테이프로 끊어진 전선을 꼼꼼하게 수리했다(엄마는 손재주가 좋다). 당신이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2주에 한 번은 코드 선을 자르고야 말았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선이 더 이상 선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짧아져 멀티탭을 화면 옆에 두고 써야 했다. (…)

네 번째 이야기. 중학교 때 일이다. 소문난 덜렁이었던 나는 학교에서 우산을 잃어버렸다. 집에 도착하자 엄마는 귀신같이 우산의 행방을 물었다. 무서워서 학교에 두고 왔다고 하니 엄마는 지금 학교에 가서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거짓말을 인정하기 무서워 대책도 없이 비 오는 거리로 나섰다. 아무리 고민해도 같은 우산을 구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빈손으로 집에 돌아갔다. 두꺼운 나무 빗자루를 든 엄마는 거짓말의 무게만큼 맞으라고 했다. 117대가 그 무게였다(왜 하필 117대냐 하면 100대를 맞기로 했는데 17대를 맞고 쓰러져서 엄마가 다시 100대를 셌다). 며칠 동안 교실 의자에 제대로 앉을 수가 없어 모서리에 허벅지를 걸치고 앉았다. 똑바로 앉으라는 선생님에게 엉덩이의 멍 자국을 보여드리니 아무 말도 안 하셨다. 117대 사건 이후 나는 나 자신도 속일 정도로 능숙하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 이런 종류의 무섭고 슬프고 안타까운 이야기다. 어릴 적부터 저자는 괴로운 순간이면 몸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유체 이탈’ 경험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몸을 외면하고 무시하고 억압하고, 오직 몸이 ‘기능’할 것만 요구하며 살아오던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심한 부상을 당하고 나서야 자신의 몸을 돌아보게 된다.

문득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소동이 몸의 분노에서 시작된 게 아닐까? 무시하고, 남겨두고, 외면했던 몸이 날리는 통쾌한 복수. 무슨 수를 써도 몸을 떼고 도망칠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경고. 항상 나를 따르기만 했던 몸이 더는 나를 참지 못했구나. 이제 더는 봐줄 수 없다고 생각했구나. 무릎을 탁 칠 만한 발견에 몸이 떨렸다.

몸을 외면한 역사가 줄줄이 떠올랐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폭식을 반복한 일, 쉬고 싶다는 사인을 엄살이라고 생각한 일, 사소한 신체 증상을 무시해 병을 키운 일, 힘들어도 몸으로 때우면 된다고 생각한 일, 번아웃이 왔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업무를 늘린 일…….

역시, 몸의 분노였구나. 이제 어쩌지? 몸이 막아주지 않는다면 험한 세상을 어떻게 버티면서 살지? 무엇보다 이대로 몸을 잃는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끝도 없는 질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되자 통증은 거세졌다. 통증은 공포로 변해 날 잡아먹었다.

 

또 웃긴 점은 독일의 의료 체계이다. 일단 저자는 독일의 의료 보험에 가입돼 있어서 여러 번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수술비는 한 푼도 내지 않았다. 한국이었다면 못해도 500만 원은 깨졌을 거라고. 이것만 보면 독일의 의료 보험이 상당히 높은 수준이구나 싶지만(물론 독일의 의료 보험비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다), 정말 그럴까. 의사를 만나려면 일단 예약을 해야 하고, 그 예약도 쉽지 않다. 의사나 수술의 질도 의심스럽다. 한번은 저자가 팔꿈치 수술을 앞두고 MRI 촬영을 했는데 다음 날 의사가 병실로 찾아오더니 ‘깁스 때문에 촬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MRI는 비싼 검사니까 추가 촬영 없이 바로 수술에 들어가자’고 했단다. 그럴 거면 그 비싼 MRI는 왜 찍었는데요? 세 번째 수술은 첫 번째 수술에서 발목뼈에 박은 나사 중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었는데, 의사 말로는 시술에 가까운 수술이라 저자는 가능하다면 부분 마취를 요구했다. 의사도 좋은 선택이라며 반겼다. 그러나 수술 날 의사는 저자가 ‘잠깐만요, 저 오늘 전신 마취 안 하는데요?’ 하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냥 전신 마취를 할 뻔했다. 무엇보다 가장 심한 건 다친 부위의 방향을 ‘아츠트브리프(직역하면 ‘의사의 편지’. 진단,수술 경과, 약물 처방, 수술 후 관리 방법 등 중요한 정보가 모두 들어 있는 의사 소견서)’에 반대로 적었다는 것이다. 왼쪽을 다쳤는데 오른쪽 팔꿈치를 들여다보면 뭐하냐고요. 그런데 왼쪽-오른쪽 헷갈리는 의사는 내가 호주에서도 많이 봐서 사실 놀랍지 않음. 이런 건 전 세계 공통인가…

 

저자는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하더라도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기로 결심하며 글을 끝맺는다.

이쯤이면 완치일까? 고난이 닥치면 또 나를 두고 올 게 뻔한데, 치료됐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대답하겠다. 두고 오면 금방 가서 데려오면 되니까, 발견하면 되니까. 대신 나에게 좀더 시선을 두는 태도는 두고 온 몸을 늦지 않게 알아차리기 위한, 평생에 걸친 재활이 될 것이다.

영화 〈시계 태엽 오렌지〉의 대사가 떠오른다.

“나는 완전히 치료됐다. I was cured, all right.”

완치를 기념하는 마지막 농담이다.

몸은 평생 데리고 사는 것이니까 말이다. 다칠 때까지 몸을 방치하지 말고 지금 당장, 여태까지 나를 잘 보좌해 준 내 몸에 고마워하고 돌보아 줍시다.

 

참고로 팟캐스트 ‘영혼의 노숙자’ 265화에서 저자가 부상당한 에피소드를 대방출한다. 엄청 웃긴 화라고 하니까 관심 있는 분들은 한번 들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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