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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원소윤, <꽤 낙천적인 아이>

by Jaime Chung 2026.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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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원소윤, <꽤 낙천적인 아이>

 

 

무려 서울대 출신, ‘고학력자’ 스탠드업 코미디언 원소윤의 자전적 성장 소설. 내가 본격적인 리뷰를 하기 전에 이 말은 해야겠다. 저 원소윤님 좋아합니다. 재미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소설은… 정말 별로였다.

 

왜 이 소설이 별로일까 생각해 봤는데, 자전적 이야기여서 그런 것 같다. 정확히 말하자면, 삶을 별 가공 없이 쏟아냈기 때문에. 이 책의 모든 내용이 정확하게,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하다는 뜻이 아니다. 삶에서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을 그냥 페이지 위에 쏟아부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조금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삶에는 인과관계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할 수 있는 법칙이나 이유 따위가 없이, 그냥 일어나는 일들이 많다. 그래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이 일들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 이유가 옳은지 아닌지는 무관하다. 그냥 인간이 미치지 않기 위해,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에게 일어난 이유에 그럴듯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길을 지나가다가 친구를 봐서 인사를 했는데 친구는 대꾸도 없이 지나가는 일이 일어났다고 치자. 나는 이를 적대적으로 해석해서 ‘뭐야, 날 봤는데 인사도 안 하고 무시하고 지나가?’라며 그를 미워할 수도 있고,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히 ‘나를 못 봤나 보네.’ 하고 이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 무엇이 옳은 태도인지, 무엇이 사실인지 정확히 따져 보려면, 글쎄,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삶의 모든 일을 이렇게 대할 수는 없게 마련이다. 게다가 나에게 일어난 일이 도대체 왜 일어났는지, 아주 뒤늦게 알 수도 있고, 아니면 평생 모를 수도 있다.

반면에 소설은 그렇게 썼다가는 욕을 먹는다. 소설 속 세계는, 비록 용이나 엘프가 등장하는 판타지라 하더라도, 또는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라 할지라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인과관계, 법칙, 이유 등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난장이들이 금은보화를 캐내려고 밤낮으로 채굴을 해대서 그 산의 깊숙한 곳에서 잠들어 있던 용이 화딱지를 내며 깨어났다, 그래서 그들을 파이어 브레스로 몰아냈다, 뭐 그런 거. 삶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러이러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라는 설명을 제공하는 게 소설이다. 일부러 삶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기 위해 그 점을 극대화한 작품들 말고, 우리가 접하는 거의 대다수의 문학에는 설명이 있다. 콩쥐는 착해서 상을 받고, 팥쥐는 나빠서 벌을 받는다. 햄릿은 아버지, 선왕의 죽음에 복수하려 하나 완벽한 유죄의 증거를 찾고 싶어서 망설인다. 그래서 연인인 오필리아에게 일부러 못되게 구는 장면에서도 독자/관객들은 햄릿이 왜 이러는지,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가 있다.

 

반면에 이 소설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처음에는 소설 속 화자가 자신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치릴로와 소피아라는 세례명으로 친근하게, 또는 조금 버릇없이 부르면서 이야기하는 것을 재미있게 보지만, 점점 뒤로 가면서 그냥 저자에게 일어난 이런저런 일들을 뚜렷한 인과관계 또는 설명 없이 접하다 보면 곧 지루해진다. 예를 들어 화자가 친했던 고등학생 시절 친구와 갑자기 연을 끊는 부분에서는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한 저의가 뭔데?’ 싶다. 이 부분을 보시라.

택시들이 무척 빨리 달렸다. 윤지는 뛰어들 것처럼 도로에 바투 다가갔다. 윤지는 이렇게 가까이 가야만 택시가 선다고 했다. 나는 윤지가 걱정됐지만 그렇다고 윤지를 인도 쪽으로 끌어당기진 않았다. 윤지는 그런 식으로 택시를 잡는 애니까. 윤지를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예감했다. 윤지와 함께 있으면 언젠가 내가 크게 다칠 거라고. 그것이 틀린 예감이었는지, 맞는 예감이었는지 나는 확인하지 않았다.

그 예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도 말 안 해 주면 그 예감은 그럼 뭔데?

 

이렇게 뭔가를 암시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부분이 많아서 읽는 내내 ‘아니 그러니까 이 의미가 뭐냐고요!’ 하고 답답해졌다. ‘체호프의 총(Chekov’s gun)’이라는 문학 및 극작의 원칙, 그러니까 ‘이야기 초반에 등장한 특별한 요소가 극의 후반부에서 반드시 사용되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이 소설은 매번 비껴간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화자가 일하던 곳에서 잘린(정확히는 정규직 전환에 실패하고 계약이 연장되지 않은) 후, 화자는 본가에 내려간다.

기차에 올라탄 뒤, 부모님께 어떤 근황을 들려 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믿음을 주면서도 섣부른 기대감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고민을 하다 설핏 잠들었고 대전역에 다다라 소스라치게 놀라며 깼다. 검정 커튼을 두르기라도 한 듯 창밖은 컴컴했다. 아파트 정문에 도착해 올려다보니 13층 우리 집은 까무룩 잠들어 있었다. 그 무신경함에 도리어 안도감이 들어 콧노래를 부르며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살금살금 집에 들어서는데 아빠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안방에서 나왔다. “저녁은?” 말이 길어질 듯해 “네에.” 간추려 답한 후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안방에서 나왔다는데, 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무슨 눈병의 전조? 아니면 이 전에 무슨 속상한 일이 있어서 아빠가 화를 냈다는 것을 암시하는 건가? 알 수가 없다. 왜 그가 한쪽 눈을 찡그렸는지 이유를 알 만한 힌트는 후에 전혀 주어지지 않으니까. 그냥 그때 화자의 아빠가 한쪽 눈을 찡그렸을 뿐이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평생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냥 삶에 일어난 일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나열될 뿐이라 독자로서 나는 혼란스러워질 뿐이었다. 원래 하려던 말이 있는데 말을 하다 마는 거야,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아무 말이나 하는 거야? 자전적인 소설을 많이 봐 왔지만, 이렇게까지 정말 가공(=소설처럼 인과관계, 사건의 흐름을 손보는 작업)을 하나도 안 하고 그냥 쓴 것 같은 작품은 또 처음 본다. 예컨대, 박완서 선생의 작품 중에도 자전적인 이야기는 많지만, 그것은 ‘소설’처럼 문제없이 잘 읽히지 않나. 그냥 단순히 삶에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나열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는 ‘이야기’로 잘 가공을 해서 그렇다. 근데 이건…

 

게다가 소설 중간중간에 있는 ‘오픈마이크’ 섹션은 뭘 위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자란 화자가 이런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을 했습니다? 그렇게 이해할 수는 있는데 딱히 재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스탠드업 코미디를 글로 옮겨 놔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거라고요? 그게 문제가 아니고… 아, 정말 모르겠다. 이 책은 정말 기대에 비해 별로여서 더 이상 ‘왜 재미가 없는지’ 따져 보고 싶지도 않다. 살다 보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이 있게 마련이지 않나. 나는 이 책도 그런 일들 중 하나로 여기련다. 다 따지고 들면 힘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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