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애덤 마스-존스, <뒷자리에 태워줘>

147쪽밖에 안 되는 짧은 중편소설. 하지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읽으시라. 왜냐하면 두 남주인공의 취향이 상당히 대단하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스카스가드와 해리 멜링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우리나라 개봉명만!)의 원작 소설이다(참고로 영화 원제인 ‘pillion’은 오토바이의 뒷좌석을 뜻한다).
1970년대, 영국 박스힐 지역이 배경이다. 18세 소년 콜린은 가죽으로 된 바이커 슈트를 입은 바이커 레이를 만나면서, 자신도 몰랐던 성향에 눈 뜨게 되는데… 이 두 남주인공의 취향이 어떻게 대단하냐면, 영화에서 알렉산더 스카스가드가 맡은 레이 쪽이 ‘돔(dom)’이고, 해리 멜링이 맡은 콜린 쪽이 ‘섭(sub)’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BDSM 용어를 모르겠다는 분들을 위해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레이가 공이고 콜린이 수라는 뜻이다. 참 쉽죠?
이 길지 않은 소설에서 두 남자 주인공들은 내내 이 공-수 포지션을 계속 유지한다. 레이는 키도 크고, 몸매도 끝내 주고, 얼굴도 무척 잘생겼는데 통통한 편인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는) 콜린은 잘생긴 레이를 만나자마자 긴장해서 그 앞에 넘어지고 만다. 그리고 거기에서 바로 레이는 콜린을 잡아먹는다… 물론 성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직접적인 행위가 벌어졌는지는 책에서 확인하시길. 첫 만남 부분을 조금만 보여 드리겠다.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루이스 레더스’의 화려한 카탈로그 삽화 같았고, 나는 아마 ‘버튼 씨네 신사복 매장’의 후줄근한 쇼윈도 상품 같아 보였을 거다. 온갖 배경과 조명을 써 봐도 손님들의 마음에 도무지 들지 못하는 그런 상품. 내 나팔바지는 소심했다. 그래, 나팔바지도 소심할 수 있다. 내가 입은 갈색 가죽 재킷은 옷깃이 지나치게 둥글었다. 지퍼도 금속이 아닌 플라스틱이었고, 바이크 재킷처럼 섹시한 각도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정가운데로 쭉 내려가는 스타일이었다. 레이는 190센티미터였고 나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170센티미터였다. 내가 더 컸더라도 인상을 구긴 채 나를 내려다보는 낯선 사람을 올려다보기엔 어차피 불리했을 거다.
어쨌든, 레이가 언제나 이야기했듯 내가 보고 있던 건 찌푸린 얼굴이 아니라 다른 부위였다. 그래도 막상 그가 이렇게 말했을 때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알겠다. 원하는 게 이거냐?” 목소리가 달라졌다. 어딘가 좀 다르게 위협적인 어조였다. 뭔가를 약속하듯 위협적인 어조. 화가 잔뜩 나 있으면서 동시에 어느덧 나른해진 목소리. 내가 그의 얼굴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도 몰랐다. 아름답고 강인하고 조각 같은 얼굴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냥 얼굴을 보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콜린이 바라보던 부위가 어디냐고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바로 그 부위입니다…
어쨌거나 그렇게 첫 경험을 하게 된 콜린은 레이에게 알아서 기고, 그의 말에 전적으로 다 따른다. 이 소설의 원제는 <Box Hill: A Story of Low Self-Esteem>인데, 콜린이 바로 그 ‘자존감 낮은’ 그런 남자다. 콜린은 레이네 집에 아예 살러 가서도 엄청 고분고분하게 군다. 이는 물론 콜린의 성향이 순하고 말 잘 듣는 성향인 것도 있지만, 레이가 워낙에 사람을 휘어잡는 카리스마남인 것도 있다. 진짜 어떻게 딱 이런 사람 둘이 만났는지… 소설이니까 그런 거겠지만, 레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콜린을 지배하고, 지배는 군말없이 지배당하는 게 아주 천생연분이다. 이 부분을 한번 보시라.
우리가 맞닥뜨린 이래로 그는 내게 거의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좀 허탈한 느낌이긴 했지만 그래도 미소는 미소였다. 그는 고개를 한 번 가로젓더니 말했다.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떤 질문은 답을 기대하고 건넨 게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 질문이 그렇게 되도록 놔둘 순 없었다.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입 밖으로 내뱉은 게 맞는지 확신이 안 들어서 한 번 더 말했다. 혹시나 머릿속으로만 말한 건지도 모르니까. 왜냐하면 이 순간은 내게 기회였고 그가 꼭 들어야 했으므로. “원하시는 건 뭐든지 할게요.”
이게 둘이 처음 만나서 서로 이름을 교환하고 난 후의 대화다. 이후에 소설이 진행되면서, 둘의 관계가 진행되면서 좀 더 하드한 플레이들이 나오는데 아니 세상에… 내가 이 소설을 리디 BL 섹션이 아니라 교보문고 일반 섹션에서 구입했다고요? 나는 심지어 BL은 관심이 없어서 읽지도 않는데…
아래 이 인용문은 콜린의 낮은 자존감이 너무 잘 보여서 좀 웃기고 귀여울 정도다(참고로 햄프턴은 레이가 사는 곳이다). 레이가 마음에 들어서 콜린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는데 ‘레이 마음에 안 들면 나는 다시 집으로 보내질 거야 🥲’고 생각한 게 너무 짠한데 콜린답다. 게다가 자기는 그 멋진 남자네 집에 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떻게든 마음에 들고 싶어서 잘하지도 못하는 요리를 하려고 한 게 너무 귀여워서 ㅋㅋㅋ 나라도 그냥 데리고 살았을 듯. 콜린은 진짜 타고난 섭…
당연히 처음에는 햄프턴이 임시 거처라는 생각이 끔찍할 정도로 강하게 들었다. 승인을 얻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준에 못 미치면 상자에 담겨서는 왔던 데로 돌려보내질 거라고 여겼다. 레이는 그런 인상을 받을 만한 말을 단 한 번도 한 적 없었음에도. 나 혼자서 생각한 거다. 나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몸뚱이라는 사실 외에도 이 집에서 내 자리가 어디일지 알아내고 싶었다. 삶의 전부인 한 남자를 위해선 뭘 하면 좋을까? 청소를 하려고 했는데 그는 그만두라고, 전부 그대로 두라고 했다. 다음으로는 내 역할이 요리다 싶었고, 레이가 별다른 말이 없었기에 전념하게 되었다. 나는 평범한 음식과 화려한 요리 사이에서 늘 갈팡질팡하며 식사 준비에 애를 먹었다. 어떤 날은 피시 핑거, 그다음 날엔 처참한 코코뱅을 만드는 식이었다. 레이는 매일같이 뭐든 아무 말 없이 먹었다. 어떤 평가도 건네지 않고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나는 그의 표정에서 너무 많은 것을 읽어 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놓기까지 한 세월이 걸렸다.
어떤 두 사람이든 최소한 공통점 하나는 있게 마련이다. 시간이 지나서야 레이와 불쌍한 우리 아빠의 공통점이 바로 이거라는 걸 깨달았다. 아빠도 뭘 먹든 진심으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앞에 놓인 걸 먹었다. 그 두 사람 사이에 비슷한 점이 혹시 또 하나 있을까, 지금까지도 찾지 못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147쪽밖에 안 되는 짧은 소설인데, 이 안에 레이와의 첫 만남, 레이와의 알콩달콩한 생활, 그리고 레이와의 헤어짐(정확히 어떻게 헤어지는지는 스포일러가 될 것이므로 말하지 않겠다), 그 이후의 삶까지 모든 게 다 담겨 있다. 레이와의 좋았던 시절뿐 아니라 콜린의 부모님은 어떤지, 노년에 콜린이 무슨 직업을 가지게 되고 어떻게 살았는지까지 다. 게이 BDSM만 있는 뽕빨물(저렴한 단어 선택 대단히 죄송합니다…)은 아니라는 뜻이다. 엄청난 취향의 소유자들을 소설로나마 접해서 짜릿했다. 소설이 막장 드라마 같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걸 볼 때의 도파민은 충분히 얻을 수 있었달까. 호기심이 동한다면 시도해 보시라.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책 감상/책 추천] 원소윤, <꽤 낙천적인 아이> (0) | 2026.10.05 |
|---|---|
| [월말 결산] 2026년 9월에 읽은 책들 (0) | 2026.09.30 |
| [책 감상/책 추천] 단요, <트윈> (0) | 2026.09.21 |
| [책 감상/책 추천] Caro Claire Burke, <Yesteryear> (0) | 2026.09.18 |
| [책 감상/책 추천] 복길, <펑펑> (1) | 2026.09.14 |
| [책 감상/책 추천] 케빈 윌슨, <내가 만든 문장 쓰지 마세요> (1) | 2026.09.09 |
| [책 감상/책 추천] 베라 브로스골, <못생긴 제인 그리고 인어> (0) | 2026.09.02 |
| [월말 결산] 2026년 8월에 읽은 책들 (0) | 2026.08.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