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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

by Jaime Chung 2019. 1.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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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재키 플레밍, <여자라는 문제>

 

만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더인 재키 플레밍이 직접 쓰고 그린, 짧은 책(약 130쪽)이다.

부제는 '교양 있는 남자들의 우아한 여성 혐오의 역사'이다.

이 책은 마치 오싹한 동화책처럼 읽힌다. 책의 화자는 그간 남성들이 얼마나 여성을 혐오해 왔는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표현해 왔는지를 들려주는데 그걸 '~라고 하더군.' 또는 '~했다지.'라는 식으로,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이 무심한 말투로 이야기한다.

인류의 절반인 여성이 얼마나 무시를 당하고 억압받아 왔는지를 그렇게 차분하고 '객관적'인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화자는 평범한 남성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그렇게 별거 아니라는 듯이 캐주얼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닌데 말이다.

여성 혐오의 역사를 어떻게 부끄러워하지 않고, 의분을 느끼며 이야기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니면 최소한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피식 웃기라도 해야지.

그 화자가 이야기하는 내용에는 지금 보면 너무나 황당한 생각들이 많은데 말이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밤눈이 어두웠기 때문에 밤에는 외출이 허락되지 않았다네. 또한 낯선 장소에 데려가기에는 지나치게 감정적이어서 대체로 다들 집에 들어앉아 울고만 있었다더군. 가끔은 신경질을 부리면서 울기까지 했어."(12쪽)

"감히 가정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려 했던 여성들을 가리켜 '타락한 여자Fallen Women'라고 했다지. 총 6,772명의 타락한 여자가 있었네. 타락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남자들처럼 옆 가르마를 타는 것, 감히 자신의 생각을 갖는 것, 그 생각을 숨기지 않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 출산을 한 다음 처녀로 남아 있지 않는 것 등이 있었다더군. 오직 여성들만이 타락할 수 있었지."(22-23쪽)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는가? 이 화자는 어떻게 이렇게 명백하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정말 진지하게 말할 수가 있을까? 그만큼 여성 혐오에 푹 젖은 남자겠지.

물론 우리는 화자나 화자가 말하는 것들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근거 없는 여성 혐오에 근거한 소리인지를 충분히 알아볼 수 있고, 이는 상당 부분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덕분일 것이다(그녀들이 싸우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저런 멍청한 소리를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걸 읽다 보니 지금이야 새로운 사상에 우리가 아주 익숙해져서 과거의 낡은 생각(성차별주의)이 얼마나 허튼소리인지 잘 알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생과 사의 문제처럼 아주 중차대한 문제였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세기쯤 지나고 나면 우리 후손들은 "여성에게 진짜로 임신 선택권이 있는지 없는지를 두고 토론했다고요?" 하고 지금(=과거) 우리의 행적을 보고 놀랄지도 모른다. 그건 마치 내일도 해가 뜰 것이냐 아니냐를 두고 입씨름하는 것과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 책의 원제는 "The Trouble With Women"이다. '여자와 관련한 문제'라는 뜻인데 이 책의 내용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이렇게 기나긴 여성 혐오의 역사를 무심한 말투로 줄줄 늘어놓는, 그게 전혀 잘못된 짓이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듯한 화자 같은 남성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여자로 태어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우리나라 번역본은 "여자라는 문제"라는 제목인데, 이건 그런 화자가 할 법한 말로 들려서 이것도 나름대로 책과 어울린다.

 

매 쪽 그림이 공간의 50%를 차지하고,  글은 대개 2문장 정도이며 길어도 총 6줄을 넘지 않는다. 정말 동화책 같은 구성이다.

본문에는 역사책에서 보지 못했던 뛰어난 여성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뒤에 있는 옮긴이 주에도 충분히 설명을 해 줘서 좋았다.

전체적인 길이도 짧아서 한 30분이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그러고 나서 한 30시간 정도는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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