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웬디 무어, <완벽한 아내 만들기>

by Jaime Chung 2019. 2. 6.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웬디 무어, <완벽한 아내 만들기>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반노예제 운동가, 아동 도서 작가, 급진주의적 사상가인 토머스 데이는 지적이고 아름답되 순종적이고 검소하며 사치나 허영에 물들지 않은 이상적인 여인을 아내로 맞고 싶어 했다.

그러나 두어 번 애인의 변심으로 버림받자, 그는 완벽한 여인을 찾을 수 없다면 자신이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는 장자크 루소가 소설 형식으로 아동 양육법을 서술한 <에밀>에 깊은 감명을 받았기에, 이 책에서 배운 대로만 여성을 '키우고, 가르치면' 완벽한 여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는 고아원에서 예쁘고 건강하고 똑똑한, 앤 킹스턴이라는 12살짜리 소녀를 한 명 골랐다. 그리고 자신의 하녀가 되는 견습 교육을 받게 될 것이라고 거짓으로 가르쳐 주고는 그녀를 데려와 이런저런 '교육'을 시작한다.

그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기에, 다시 한 번 고아원에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11살짜리 소녀를 데려온다. 이 아이의 이름은 도카스 카.

그는 소녀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준다. 12살짜리 조금 큰애는 사브리나. 11살짜리 살짝 어린 애는 루크레티아.

이제 이 두 소녀는 오직 자신의 선생님이자 후원자인 토머스 데이만 바라보며 '완벽한 아내'가 되는 교육을 받고 그가 내리는 모든 지시에 따라야 하는 시험대에 오른다.

과연 이 소녀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위의 간략한 요약을 읽고서 "꽤 흥미진진한 소설이군" 하고 생각했는가? 그렇다면 틀렸다. 이 책은 논픽션이다.

토마스 데이라는 자는 18세기에 실존한 인물로, 정말로 고아 소녀 두 명을 가지고 '완벽한 아내' 만드는 교육과 실험을 시도했다.

듣기만 해도 역겹고 변태스러운 이 '여섬 혐오'의 이야기는 저널리스트 웬디 무어의 철저한 자료 조사에 의해 우리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저자는 토마스 데이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고(어린 시절 어머니의 재혼으로 완벽한 여성상인 어머니를 새아버지에게 빼앗겼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떤 과정을 통해(세련되지 못하고 사교적이지 못한 그는 애인들에게 결별 통보를 받았다) '완벽한 아내'를 만들겠다는 착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정말로 그 계획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겼는지를 보여 준다.

 

아, 그가 두 고아 소녀를 데려와 키우기 시작한 게 그가 고작 20살이던 때라고 내가 말했던가?

20살짜리가 12살이랑 11살 애를 가지고 뭐 하는 짓이냐. 물론 그 당시나 지금이나 남녀의 나이 차이에 대해 관대한(오직 남자가 여자보다 나이가 많을 때에만!)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행동은 당시 기준으로 봐도 수상하고 부적절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일단 미혼 남성이 자신의 친족도 아닌 미혼 여성과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그러했다. 당시 미혼 남성은 기혼 여성이 옆에 같이 있지 않는 한, 단독으로 미혼 여성과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은 무척 부적절한 행위로 여겨졌다.

데이도 이런 점을 의식했는지 일단 두 고아 소녀를 데려올 때 자신의 유부남 친구 에지워스의 이름을 빌려 그의 보호하에서 견습 교육을 받게 될 거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결국은 데이의 집에서 두 소녀를 데리고 살았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그는 두 소녀에게 지식을 가르치고, 집안일을 시켰으며,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는 '테스트'도 했다.

그 테스트란 게, 뭔가 사디스트적인 냄새가 폴폴 풍기는 것이다. 양초에 불을 붙이면 촛농이 녹지 않나. 그럼 그는 뜨거운 촛농을 사브리나의 팔에 떨어뜨리며, 그 고통을 피하지 않고 견디라고 가르쳤다. 역겹기 짝이 없는 짓이다.

이자는 또한 소녀를 세워 놓고 실탄이 아닌 그냥 소리만 크게 나는 공포탄을 소녀의 치마 쪽을 향해 쏘기도 했다. 큰 소리가 나도 당황하거나 겁먹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거라나 뭐라나.

데이는 두 소녀들에게 성(性)적인 접근은 절대 하지 않았다고 맹세했고, 저자도 그가 그런 맹세를 저버렸다고 볼 근거는 없다고 했지만, 그 억눌린 성적 욕구를 이런 식으로 푼 거 같아서 더욱 불쾌하게 느껴졌다. 변태 새끼.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충격받은 것 하나. 내가 도덕이나 윤리 교과서에서 배우기로 장자크 루소는 아이(인간)의 본성에 대해 기존(아이는 텅 빈 석판과 같으며 교육받는 대로, 키우는 대로 이를 흡수하고 받아들여 자란다는 주장)과는 다른 개념(아이는 원래 순수하고 깨끗한 존재인데 어른들과 접하고 교육을 받으며 본래의 순수성을 잃는다는 주장)을 제시한 인물이다.

새로운 아이 양육법을 제시해서 무척 획기적이었고, 그의 저작 <에밀>은 교육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식으로만 서술돼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루소의 모습은, 역시나 여성 혐오적인 구식 남자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 <에밀>에 묘사된 아동 양육법이라는 것도, 애를 강인하게 자라게 한답시고 추위나 더위에 방치하고, 애가 먼저 글을 읽고 싶어 하기 전까지는 글 읽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 것 등이었다.

이런 <에밀>에 깊은 감명을 받은, 데이의 친구 에지워스는 이 방법에 따라 자신의 아들을 키우는데, 그 결과 권위를 존중할 줄 모르고 고집이 센 아이로 자랐을 뿐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과도한 애국심과 외국인(이 경우에는 특히 프랑스) 혐오만 그대로 배워서 '모든 건 다 영국이 최고이고 프랑스는 다 형편없다' 이런 말을 늘어놔 루소 본인도 크게 실망했다.

게다가 루소의 양육법은 남녀차별적이기도 해서, 여자아이들은 똑같이 혹독한 조건을 이겨내면서도 자신이 관심을 보이는 사물을 찾게 되면 끊임없이 방해를 받았다. 예를 들어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놀 때 유모가 가서 그거 갖고 놀지 말라고 하는 식으로. 

이유는? 여성은 남성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므로, 자신의 의지를 버리고 타인의 명령에 따르는 법을 일찍부터 배우는 것이다.

애초에 <에밀>에서 주인공 남자애 에밀은 웬만큼 크고 나서 자신의 짝이 될 여자애 '소피'를 찾아내 자기 뜻대로 교육한다.

이렇게 정교한 여성 혐오의 텍스트를 내가 대단한 사상가의 작품이라 배웠다고? 역사는 승리한 자가 쓴다지만 교과서는 모든 아이들에게 가르칠 거니까 공평하고 정말로 교육적인 것만 담아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다시 한 번 공교육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루소가 이렇게 역겨운 여성 혐오주의자라고 왜 말 안 해 줬어?

아, 그렇지, 왜냐하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최소 80%는 남자고 여전히 이 시대는 여성 혐오가 판을 치니까, 그 정도 여성 혐오는 교과서에 실리지 못할 정도의 흠결이라고도 생각을 안 한 거지.

교과서를 그대로 믿은 내가 바보지. 이래서 페미니즘이 더욱더 노력해서 교과서에도,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책의 내용도 바꾸어야 하는 거다. 공평하게 여남(女男)의 업적을 같이 실자고!

 

고대 희랍 신화 속,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을 조각상으로 만든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거의 매 시대에 새로운 서사로 재구성돼 왔다.

그렇지만 왜 그건 언제나 남성이 자신이 원하는 여성을 만든다는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실제로는 여성이 남성에게 생명을 주니까 여성이 남성을 만드는 게 맞지 않나?

적어도 남성이 자신의 뜻대로 여성을 '만드는' 경우라도, 그 여성, 그 불쌍한 갈라테이아(피그말리온이 만든 조각상의 이름)가 피그말리온과 '사랑'에 빠져서 그와 결혼했다거나 그와 영원히 행복했다는 엔딩은 정말 집어치우자.

당신이라면 자신을 제멋대로 주무르려는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까? 그런 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꿈을 꿀 수나 있겠는가?

갈라테이아 이야기를 하려면 적어도 갈라테이아의 관점에서, 갈라테이아가 자신은 폭정의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되찾는 이야기로 만들자.

그것이 이 시대뿐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여인들이 살아 온 이야기에 가까울 테니까 말이다.

 

스포일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토마스 데이의 실험은 실패한다. 이거야 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는 정도의 지능이 아닌 이상 다들 예상할 수 있는 전개 아닌가. 설마 이게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신 분? 없죠?

이게 성공한다면 그건 스톡홀름 증후군(납치 피해자가 납치범을 옹호하거나 납치범의 주장에 동조하는 증세나 현상)이겠지.

하지만 옛 조상님들 말씀 중 '자기 인생 자기가 꼰다'라는 말은 정말 진실이다. 왜냐하면 사브리나와 루크레티아는 그의 마수에서 빠져나왔지만, 사지 멀쩡한 어떤 여자(에스터라는 이름이다)가 눈이 삐었는지 이자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했거든.

이 여인은 심지어 집에 돈도 많고, 배운 만큼 배우고, 꽤 예뻤는데도 뭐가 부족했는지 데이에게 거의 매달리면서 연애를 하고(그가 우유부단하게 행동한 4년을 참고 기다렸다) 그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와 싸우고 나서도 (돌아갈 집이 없어서 그랬는지) 매번 자기가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고 그에게 돌아갔다.

정말, 인생을 왜 그렇게 살지? 읽다가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 이런 여성 혐오자에게 왜 목을 맸는지 전혀 이해가 안 됐다.

 

이 데이라는 자는 빈자를 돕고, 동물을 사랑하며, 아메리카의 독립도 지지하고, 노예제 반대 운동도 했으며, 나중에는 아이들을 위한 소설도 썼단다.

아휴, 그래, 다 좋은데, 그럴 거면 일단 자기 주변의 여인들을 한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며 존중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건 왜 안 했을까?

나는 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게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동물의 권익을 대변한다며 정작 인간에게는 형편없이 대하거나 자신만의 이익만 챙기는 자들을 보면 위선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히틀러(독일 최초의 동물 보호법을 제정한 게 히틀러다).

노예제 반대 운동도 하고 아메리카 독립 지지며 이런저런 지적인 활동을 많이 했다 한들, 정작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무시하고 깔본 여성 혐오자라면 확실히 위선자라고 볼 수 있지 않나.

이런 자도 '공은 공이고 사는 사니까'라며 그의 공과를 인정해 줘야 하나? 이건 마치 성범죄자인 가수에게 '그래도 노래는 잘 부르니까 앨범은 안 사 줄 수가 없네' 하는 거랑 마찬가지라고 본다.

예술이고 어떤 사회적 운동이고 간에 그게 그걸 행하는 개인과 떨어져서 저 혼자 존재할 수 있나? 그 행위와 개인을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나?

절대 그럴 수 없다. 주체가 있어야 행위도 행해지는 건데, 그걸 떼어놓고 생각한다는 거 자체가 말이 안 되지.

그래서 나는 이렇게 동물이든 불우이웃이든 노예든 간에 누굴 돕는다고 하면서 정작 다른 중요한 존재는 내팽개친 자는 좋게 볼 수가 없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의 원인이 바로 그거였다. 그가 말년에 아이들을 위한 소설을 써서 그게 꽤 인기를 끌었다는데, 그러면 그가 저지른 짓에 대한 속죄가 되는 건가? (오해 마시라. 그는 심지어 그 소설을 속죄의 의미로 쓴 것도 아니었다. 내가 예를 든 것뿐이다)

사람들은 대개 '남을 단순하게 나쁜 사람,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지만, 내가 보기엔 데이처럼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성은 '아, 괜찮은 남자가 없어'라고 생각하면 사랑/연애/결혼 등을 포기하는 경향이 강한데, 왜 남성은 '아, 괜찮은 여자가 없어'라고 생각하면서도 사랑/연애/결혼 등을 포기하지 않는 걸까?

남성은 어릴 적부터 '네가 원하는 게 뭐든 얻을 수 있다, 받을 자격이 있다'고 둥기둥기 어르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게 있어도 남을 위해 양보해라 또는 현실과 타협하라는 소리를 많이 듣는데 말이다.

남성의 성욕은 여성의 성욕과 달리 그렇게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도 여기에 한몫을 했겠지 싶다. 그러니까 '완벽한 여자가 없으면 만들면 된다' 같은 생각이나 하게 되는 거 아니냐고.

 

책 부제처럼 이 책은 '피그말리온 신화부터 계몽주의 교육에 이르는 여성 혐오의 연대기'이다. 여남을 불문하고 모든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