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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박진희, <누구의 삶도 틀리지 않았다>

by Jaime Chung 2019.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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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진희, <누구의 삶도 틀리지 않았다>

 

 

이 책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그저 제목만 보고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출 예약 신청을 해 두었고, 마침내 받아 보았을 때는 약간 놀랐다. 

일상 힐링 수필일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더 정신적으로, 일상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위해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은 책이었다.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 책은 이 나름대로 좋았으니까.

 

저자는 여러 해 전에 순례자의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를 걸었다. 프랑스 국경에서 스페인 땅 끝까지 이어지는, 약 800km의 길이다.

보통 한 달이면 완주한다는 그 거리를, 저자는 천천히 자신만의 페이스로 걸어 47일에 끝냈다. 그리고 순례길에서 만난 남자와 연애 후, 제주로 내려가 살게 되었다.

저자의 직장은 서울, (그 당시) 남자 친구는 부산이었는데, 결혼을 하면 둘 중 하나는 일터를 옮겨야 했다. 

남자 친구는 색다른 제안을 했다.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한다면, 제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남자 친구의 부모님이 먼저 제주로 이주해 계시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제주로 갔다. "서울에서 받던 두세 달 치 월급이 내 연봉이 되었"지만, 씀씀이도 줄었고 스트레스도 줄었으며, 대신 자연을 만끽할 기회가 늘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총 아홉 명의 인터뷰이를 소개한다. 나는 그들이 일에 대해 경직되지 않은 태도를 가졌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든다.

예컨대, 인터뷰의 첫 번째 주자는 제주에서 일용직 날일을 하며 사는 '헬프브라더', 김태호 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몸을 쓰는 일은 뒤끝이 없다고 해야 할까요. 그때만 충실하게 일하면 집에 가서 잔업을 하거나 고민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렇다. 정신과 마음이 괴로운 일을 하느니, 차라리 몸이 힘든 일을 하는 게 오히려 마음이 편할 수 있다. 

김태호 씨는 게스트하우스 청소, 귤밭에서 귤 나르기, 선과, 건물 시공, 펜션의 화단 관리 등 몸 쓰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한다.

그는 한 달에 보름만 일하기,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일하기, 최선을 다해 일하기, 이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쉬는 날엔 서핑과 스노클링, 수영, 캠핑 등을 누린다.

"정작 나는 이렇게 사는 게 너무나 좋고 행복한데……. 다들 걱정하시죠. 특히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다고, 결혼하지 않는다고, 가족들이 많이 걱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심플하게 살고 싶어요, 앞으로도. 일할 때 열심히 일하고, 놀 때 즐겁게 놀면 그게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가 아무리 걱정한다고 한들, 내일 일을 예측할 수 있을까? 미래를 알 수 있을까?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인데, 누구의 삶은 맞고 누구의 삶은 틀렸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책 제목은 아마 위 인용문에서 유래한 듯하다.

 

제주에서 '무명서점'이라는 작은 서점을 운영하고 있는 정원경 씨의 이야기도 난 좋았다.

그녀는 제주로 이주했을 때, 고산리에 있는 한 국밥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단다. "하루에 네 시간만 일하면 되고, 주말에 쉴 수 있고, 급여 외에도 숙식까지 제공되었다. 그녀는 이보다 더 좋은 일터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전 8시쯤 출근해 허리 한 번 펼 시간 없이 바쁘게 일하다가 12시에 일이 끝나면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근처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한 후, 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책을 읽다가 곯아떨어지는 게 하루 일과였단다.

아, 정말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왜 네 시간 노동이 이상적으로 얘기되는지 알겠더라고요."라니, 위의 이야기를 듣기만 해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운동선수 출신으로 성취감을 느끼며 살다가 몸이 낸 사고로 우울해하던 와중, 제주에서 자연을 마음껏 누리며 행복하게 산다는 '룸메이드', 박은경 씨 이야기도 조금 살펴보자.

그녀는 갑상선저하증과 부정맥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 후, 제주 올레길을 찾았다. 그리고 그 길을 걸으며 눈물을 쏟았다.

길 위에서 쏟았던 눈물의 이유는 '고마웠기 때문'이었다. 살면서 그녀의 인생엔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다. 때론 상처 받기도 했지만, 지나고 돌아보니 대부분 그녀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수많은 이에게 의지하며 살고 있었다. 그걸 올레길에서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제주로 와서는 한 게스트하우스의 청소와 침구 정리 등의 일을 하게 되었다.

몸을 쓰는 일은 삶과 휴식과는 완벽하게 분리된다. 일터에 들어가면 오로지 일에 몰입해야 하고, 일터를 빠져나오면 더는 일을 가지고 나오지 않아도 된다. 스트레스와 함께 퇴근하지 않으니 일을 끝낸 모든 시간은 언제나 자유롭고 상쾌하다.

"퇴근 이후의 삶은 온전히 나의 것이에요. 완벽하게 행복한 시간만 남아 있어요. 그건 저를 정말 기쁘게 해요. 나만의 공간에서 나를 위한 일만을 하며 쉴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해요. 다들 출근한 월요일에 강아지를 끌고 마을을 한 바퀴 산책해요. 그때 들리는 새소리, 바람소리……. 절로 '아 행복하다'라는 말이 나와요. 자연 속에 있으니 돈이 드는 일들과는 조금 멀어지는 기분이죠. 바람, 햇빛, 꽃, 이런 것들과 함께 있으면 나를 내려놓게 되잖아요. 욕심도 없어지고, 가진 것에 만족할 수 있게 되고……."

와, 정말 멋지다. 근데 진짜 멋진 말이 또 있다. 역시 은경 씨의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제주에 살면서 가장 크게 누리는 행복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추억의 크기가 점점 작아지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우도에 살 때 육지 친구들이 며칠 놀러온 적이 있었어요. 물론 저도 기억하고, 또 아주 좋은 시간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일을 추억하거든요. 그때 했던 말까지 고스란히 기억하는 거예요. 저는 좋았던 것만 순간이라는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지, 구체적인 대화들은 생각나지 않아요. 사실 제주에는 그런 일들이 많아요.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뿐인 추억이 저에겐 일상이 되는 거죠. 4년이 지난 지금도 친구들이 곱씹는 추억이 저에게는 매일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추억이란 아름답고 좋은 거지만, 그것에만 묶여 있으면 현재를 온전히 즐길 수가 없게 된다. 아무리 행복하고 즐거웠어도 과거는 과거이고, 다시 돌아올 수 없다.

정말 건강한 삶은, 물론 행복한 추억도 많이 있지만, 그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며 과하게 추억하지 않고 현재를 행복하게 사는 인생이 아닐까 한다.

나도 올해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나도 호주에 있을 때 좋았는데…' 그러다 보니까 한국에 있는 시간이 불행하게 느껴졌고, 아무리 행복해도 호주에 있을 때만도 못할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했다.

그런데 어떤 좋은 분이 내게 이렇게 말해 주셨다. "제이미님은 그때보다 더 백 배, 천 배 행복해지실 거니까, 이제는 그 추억을 좀 놓아 주세요. 그때가 인생에서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으로 제이미님은 그보다 더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나도 그런 생각을 내려놓기로 했고, 그런 지금은 참 행복하다. 가끔 그때를 떠올리곤 하지만, 예전처럼 주책 없이 노스탤지어에 사로잡혀 울지는 않는다.

그냥 '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그리고 끝. 왜냐하면 인생을 길고 행복해야 할 시간은 앞으로도 많으니까.

 

당근잼을 만드는 세 여자, '냠냠제주'의 소다미, 킴키, 토끼 씨 이야기는 협업과 연대의 힘을 보여 주어서 읽는 나도 무척 흐뭇했다.

제주에서도 "따박따박 월급을 받으며" 자신답게 산다는 전로사 씨도 참 놀라웠다.

제주로 이주하신 많은 분들이 대개 안정은 다소 희생하며 대신 다른 많은 것들을 얻고 사시는데, 로사 씨는 거기에서도 안정적으로 월급 받는 직장을 구하셨다니 정말 이거야말로 일거양득, 일석이조가 아닐까 한다.

나처럼 자유롭고 싶긴 한데 너무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은, '적당한 자유'를 찾으시는 분들은 로사 씨의 이야기가 특히 솔깃하게 느껴지실 거다.

이 책의 마지막 인터뷰이는 저자의 남편, 문경록 씨인데 이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 책을 가장 잘 마무리하지 않나 싶다.

"'제주에서 적당히 벌며 아주 잘 살자'라는 나의 제안을 네가 흔쾌히 받아 주어 이곳에 우리가 살고 있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우리의 결과는 같았을 거야. 서울에서 각자의 일을 하며 살고 있어도, 우린 또 그곳에서 장점을 발견하며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지 않았을까? 사실 제주가 우리가 행복해지는 데 있어야 할 필수 장치는 아닌 것 같아. 우리 마음이 가장 중요하지."

그렇다. 여유를 누리기 위해 꼭 제주에 가야만 하는 건 아니고, 현재 제주에 살지 않는다 해서 불행한 건 절대 아니니까 말이다.

중요한 건 어디에 살든,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책에 담긴 제주 이주인들의 이야기는 '이런 삶도 있답니다' 하고 보여 주는 역할에 불과하다. 제주가 아니어도 자신이 중요시하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다면 어디서든 행복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신 여러분도 각자 계신 곳에서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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