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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진영,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by Jaime Chung 201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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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진영, <슬기로운 B급 며느리 생활>

 

 

화제였다는 독립 영화 <B급 며느리>의 주인공인 김진영 씨의 책이다. 나는 이 영화를 안 봐서(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그런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다) 모르겠지만, 영화를 모르고 책을 읽어도 전혀 상관없다.

저자인 김진영 씨는 고시 공부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중에 덜컥 임신을 해서 영화감독 지망생이던 선호빈 씨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여기에서부터 그녀의 B급 며느리 생활이 시작됐다.

 

진영 씨의 아버님은 무척 독특하신 분이어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똑바로 주장할 수 있게 가르치셨고, 그래서 자기 의견을 말하지 못하고 우는 건 아주 극혐하셨다고 한다.

이런 교육을 받고 자란 진영 씨는 아주 적극적으로 ("싫어", "아니"를 비롯한) 자기 표현을 할 수 있었는데, 반면에 호빈 씨네 가족은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가풍이 있었다.

예컨대 호빈 씨의 아버님이 당신 아들에게 실망하셨다고 한다면 "묫자리를 잘못 썼나..."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게 전부였다.

이 선 씨 가문에서는 직설적인 말 대신, 적당히 돌려서 말하고 또 그걸 이해하고 행동하는 게 미덕이었다.

연애할 때까지만 해도 진영 씨는 호빈 씨의 다정함에, 호빈 씨는 진영 씨의 당당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지만, 결혼 후에는 바로 그러한 장점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선 씨 가족들이 볼 때 진영 씨는 어른들 앞에서 싫다는 말을 거리낌없이 하는, 너무나 직설적인 존재였고, 진영 씨가 보기에 선 씨 가족들은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빙빙 돌린' 말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갈등이 생겨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시부모님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경우가 아니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진영 씨는 또한 호빈 씨의 동생, 호원 씨와도 결혼 전부터 친해서 그를 그냥 '호원이'라고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결혼 후에 시부모님은 며느리인 진영 씨에게 남편의 동생을 '도련님'이라고 부르기를 종용했다.

하지만 진영 씨는 그냥 이름으로 불러 왔던 남편의 동생에게 '도련님'이라고, 1900년대 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호칭을 쓰라는 요구가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 결정적으로 현실 세계에서도 나는 호원이보다 나이가 많다. '도련님'이 생소한 단어이고 과거에 신분제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내가 결혼을 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님'자를 붙여 부를 이유도, 갑자기 존대를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이와 같은 근거를 들어가며, 나는 어른들의 따가운 질책에도 불구하고 호원이를 계속 '호원이'라고 불렀다. 

(...) 게다가 결혼을 통해서 만나는 배우자의 가족에게 존중을 담아 존대를 해야 한다면, 나의 남편 호빈이 내 동생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문제나 존대를 하지 않는 문제를 아무도 걸고 넘어가지 않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우리 친정 식구들을 무시해서? 남편의 집이 아내보다 잘나서? 아니면 이것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남녀차별인 건가?!

인용문 가장 마지막에 제시하는 항목이 맞는 것 같다.

 

내가 최근에 리뷰를 쓴 책,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걸 그랬습니다>에서도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심리학 박사인 저자는 그것이 시어머니-며느리라는 위계질서에서 나온다고 분석했다.

2019/10/25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김영훈,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걸 그랬습니다>

 

[책 감상/책 추천] 김영훈,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걸 그랬습니다>

[책 감상/책 추천] 김영훈, <차라리 이기적으로 살걸 그랬습니다> 제목부터 기가 막히다. 부제도 끝내준다. "진심, 긍정, 노력이 내 삶을 방해한다." 자기 개발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듯한 이 책은, 자기 개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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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지금 이 책의 저자이자 진짜 며느리인 진영 씨의 표현에 우리는 조금 더 귀 기울여 보자.

나는 며느리가 겪는 진짜 노동은 육체적인 것보다 '감정노동'에 가까운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내키지 않아도 해야 하고, 기꺼움을 가장해야 하고, 끊임없이 불편한 상태를 유지해야만 하는 감정노동 말이다. 

결국 풀지 못한 감정이 쌓이고 쌓여 폭발 직전, 시부모님이 이렇게 물으셨단다. "대체 네가 원하는 게 뭐냐?"고.

진영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 며느리는 손님이에요. 제 남련이 저희 집에 가면 그렇듯이 저는 아드님보다 멀고 어려운 존재입니다. 어머님 댁에서 설거지 같은 건 제가 호의로 해 드릴 수는 있지만 저한테 하라 마라 하실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출발점이 틀렸다. 며느리와 시부모는 남이다. 나는 '쿨하다'는 표현을 싫어하지만 가족관계에 대한 강박에서 우리 모두 좀 '쿨'해질 필요가 있다. 가족이란 모름지기 천륜이라는 연결고리 아래 희생과 인내, 애틋함과 눈물은 기본이며 싫다는 말 따위는 맘속에 꽁꽁 쟁여둬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앙금을 풀지 못해 속만 끓이다 마지못한 마음으로 맞이하는 명절이 당연하다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났으면 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단지 남편 혹은 손자라는 매개체로 연결된 새로운 관계이지 혈연도 감정적 유대도 없는 타인에 불과하다. 서로 존재하지 않는 '가족관계'를 가정하고 억지로 붙여 놓자니 정작 진짜 가족들에게는 요구한 적도 없는 '성의'가 강요된다. 그게 있으면 '참며느리'고, 그게 없으면 '거짓며느리'라는 웃픈 상황이 우리나라 고부 관계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며느리는 '손님'이라고 말한 것은, 거한 대우나 대접을 받고 왕처럼 시댁에 군림하겠다는 뜻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어느 손님이 남의 집에 가서 그렇게 행동하겠나? 손님이 방문했을 때 주인이 '남의 집'이라는 장소에 와서 낯설고 조심스러워하는 손님을 배려하여 편안히 지내게 해 주려는 것처럼 며느리에게도 그저 손님 대하듯 배려하고 조심스러워야 함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남편은 뭘 하고 있었느냐고? 좋은 질문이다.

진영 씨는 결혼 전부터 호빈 씨의 진보적인 사상이 마음에 들었단다. 그런데 웬걸, 결혼하고 보니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두 여자의 갈등을 그저 여자들 사이의 기 싸움 정도로 치부하며 자기와는 관계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진영 씨는 그와 싸울 때마다 '입진보'라고 욕했다고. 고부 갈등 문제로 남편과 싸운 이야기만도 한 장이 따로 할애돼 있는데, 이걸 다 설명할 수는 없으니 대략 이렇게만 말씀드리겠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끊임없이 계속된 진영 씨의 주장과 하소연, 싸움 등으로 교육이 되어서 조금씩 자신의 어머니와 진영 씨 사이에 중재자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그 중간에, '싸우면 애를 놔두고 집을 나가는' 남편에 대한 분노와 그에 대한 진영 씨의 날카로운 일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남편의 할 일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남편은 아내의 입에서 직접 어른들에 대한 거부와 부정과 분노가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해 줘야 한다. 자식과 오래 알아 온 부몬미은 자기 자식의 허물에 더 너그럽다. 남편의 중재는 그렇게 간단한 이치에서 필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다음주에 식구들끼리 외식할래?"라고 어머니가 묻는다면, "뫄뫄(자기 아내이자 어머니에게는 며느리 이름)에게 물어볼게"라고 대답하지 말고, "아, 그날은 내가 일이 있어서..."라는 식으로 적당히 먼저 거절을 하라는 거다.

아내에게 물어보겠다고 하면 아내(며느리) 입장에서는 싫다고, 안 가겠다고 거절하기 어려우니까 울며 겨자 먹기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발 책임을 아내(며느리)에게 전가하지 말고, 자기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자기가 해결하자. 그게 남편의 도리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분명히 "와, 한국 남자는 이래서 안 된다니까"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그렇게만 읽는다면, 독자에게는 남는 게 별로 없지 않을까. 차라리 그 대신에 진영 씨가 어떤 말로, 어떤 전략으로 남편과 시댁을 공략했는지, 자신도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대처할지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어쨌든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맞부딪혀서 바꾸어 나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책의 마지막 장("마치며")을 읽으면, 그간 묘사한 모든 갈등과 힘들었던 경험에도 불구하고 진영 씨에게 시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배려, 사랑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시어머니가 책에 자신의 이야기는 쓰지 말라고 했는데, B급 며느리인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어머니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었으나, 적어도 "누가 '악당'인지를 굳이 평가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부탁하는 부분이 그렇다.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며느리와 시댁, 남편의 행동도, 사실은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경험하는 '가족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모'난 사람들이다. 관계를 맺는 것은 서로의 '모'난 것을 보듬어 주는 과정이다. 우리 가족은 열병을 앓듯이 짧고 강렬하게 그 시간을 보낸 것뿐이다. 부디 우리를 따뜻한 마음으로 포용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도 고부 갈등 등으로 눈물 짓고 있을 며느리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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