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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구오, <선녀는 참지 않았다>

by Jaime Chung 2019.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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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구오, <선녀는 참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말티즈는 참지 않긔'풍의 이 책 제목을 보고 흥미를 느껴서 책을 꺼내들었는데, '고정관념·차별·혐오 없이 다시 쓴 페미니즘 전래동화'라고 해서 바로 빌렸다.

'구오(俱悟)'는 '함께 깨닫다'라는 이름 아래 2015년부터 함께 읽고, 쓰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 토론 모임이다.

이 저자들은 여러 책을 접하면서 여성적 시작이 담긴 콘텐츠가 부족하다고 느꼈고, 그래서 한국의 전래 동화를 페미니즘 시각에서 다시 써 보는 시도를 했다.

이 책에 담긴 전래 동화는, <서동과 선화 공주>, <선녀와 나무꾼>, <처용> 등,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접해 봤을 이야기들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누구나 자라면서 한 번 이상은 들어 봤을 이런 전래 동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 시대나 지배 세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현상은 피지배 세력이 자기 위치와 구조의 부당함을 깨닫고 이전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흑인이 노예 노동을 거부하고 여성이 희생과 자기 비하에서 벗어난다면, 우리가 더 이상 서구 사회에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는다면, 세상은 보다 살 만한 곳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동화는 미래 세대인 어린이를 훈육, 세뇌하는 가장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동화에 대한 개입, 재해석이 중요한 사회적 과제인 이유다. 동화도 다른 담론처럼 치열한 정치적 경합의 장이다.

또한, 한국의 전래 동화의 특징이라면, '불쌍한' 남성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서양의 동화에는 '백마 탄 왕자'처럼 (비록 실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쨌든 겉보기에는) 용감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자원이 있는 남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반면 한국 여성은 남성을 구하고, 보호하고, 위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이 없는 가부장제 사회'다. 즉 남성이 성 역할을 못함으로써 여성은 이중 노동을 하고, 그러면서도 남성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식민지 남성성 사회'이다. 남성이 남성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사회에서 여성은 고통스럽다. 

내가 그간 이해하기 어려워했던 것도 이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요구되는 역할(가족을 먹여 살리기)을 남성이 하지 못하니까 남성 본인도 기가 죽었는데 여성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하는 것 이외에도 남성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한다는 것.

여자가 대신 노동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줄 알아야지, 자기가 못나서 못하는 일을 남이 대신 해 주는데 고작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그렇게 히스테리를 부리는지(나는 방금 여성들에게만 사용되던 '히스테리'라는 단어를 남성에게 사용함으로써 남성이 여성의 특성이라고 주장하기 좋아하는 '별것 아닌 것에 예민함'을 남성에게 적용시켰다!).

 

예컨대 <선녀와 나무꾼>을 보라. 각 출판사나 화자에 따라 표현은 다를지언정, 나무꾼 캐릭터에 대한 설정은 똑같다.

(성격이 좋은지 어떤지는 둘째치고) 너무 가난해서 아직까지 장가를 못 갔다는 것. 여기에 '노모를 홀로 모시는'이라는 설정도 추가되면 "그럼 그렇지, 어쩐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 정도로 형편이 안 좋은 남자는 초자연적인 존재(사슴)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장가 가는 게 불가능하다.

그런데 도대체 왜 사슴은 애꿏은, 죄 없는 선녀를 희생시켜서 나무꾼에게 은혜를 갚으려 한 걸까? 말하는 사슴쯤 되니까 인간, 아니지, 그냥 인간도 아니고 무려 선녀도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무척 우스워 보였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기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으로, 선녀를 나무꾼이 저지르는 범죄의 희생자로 만드는 일을 할 수가 있었을까.

나는 사슴이 이 전래 동화 내에서 착한 존재로 포지셔닝 되는 게 무척 못마땅하다.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선녀를 협박 및 감금하고 성폭행하라고 일러 주기까지 하는 자식이 도대체 어떻게 '착한' 존재일 수가 있다는 걸까?

 

길게 생각해 봐야 빡치기만 하니까, 분노를 진정시킬 겸 이 저자들이 다시 쓴 <선녀와 나무꾼>을 한번 살펴보자.

여기에서는 날개 옷을 잃어버린 선녀를 비롯한 다른 선녀들이 "나무 위에서 쏟아져" 내려와 "나무꾼을 에워싸고 나무 줄기로 나무꾼의 몸을 결박"한다. 

이때 선녀들은, (날개옷을 잃어버린 선녀뿐 아니라 모두) 벌거벗은 상태다. 옷이 없는 선녀를 위한 유대에서 모두 옷을 입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 없이도 너무나 위풍당당하게" 나무꾼에게 자신의 잘못을 알 것을, 그리고 옷이 어디 있는지 말할 것을 명한다.

쳐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나무꾼은, 알량한 자존심을 세우며 날개 옷이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선녀는 자비롭게도 나무를 더 많이 베는 쪽이 이기는 힘겨루기 내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나무꾼은 날개 옷도 없는 선녀가 커다란 도끼로 나무를 패는 건 무리일 거라 생각하고 이를 승낙했으나, 선녀는 지치는 기색도 없이 씩씩하게 나무를 잘만 팬다.

그리고 나무꾼은 결국 기력을 다 써서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고, 이를 풀숲에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사슴이 선녀의 날개 옷을 물고 튀어나와 잘못을 빈다.

사슴은 사실 나무꾼이 자기가 시킨 대로 잘하나 보고 있었는데, 선녀들이 얼마나 센지를 보고 자기도 찾아내서 벌을 줄까 봐 겁이 났고, 나무꾼이 숨겨 놓은 날개 옷을 찾아다가 선녀에게 바치며 목숨을 구걸한 것이다.

선녀는 그 날개 옷을 입고, 다른 선녀들과 나무꾼과 사슴에게 내릴 벌을 정한다.

마침내 선녀들은 둘을 끌고 마을 중심에 있는 시장 한복판으로 가서,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죄를 낱낱이 알렸다.

"목욕하던 선녀들의 알몸을 몰래 엿본 죄, 선녀의 날개 옷을 훔친 죄, 선녀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삼으려 한 죄를 지은 나무꾼에게는 천 일간 투명 옷을 입을 것을 명한다."

그래서 나무꾼은 앞으로 천 일 동안 벌거벗은 것과 다름없는 투명 옷을 입고 마을을 돌아다녀야 하는 처지가 됐다.

나무꾼에 이어 사슴에게도 벌이 내려졌다. "파렴치한 계략을 꾸며내 나무꾼과 작당한 사슴에게는 천 일간 입이 묶인 채로 생활할 것을 명한다."

사슴은 오로지 쓰디쓴 풀을 먹을 때만 입을 열 수 있었고, 말을 하려거나 그 풀이 아닌 다른 먹이를 먹으려 하면 입이 딱 달라붙어서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크으, 사이다! 이 책에 담긴 모든 이야기를 소개할 순 없지만, 나는 <서동과 선화 공주> 이야기도 좋았으므로, 이것도 간략히 소개해 볼까 한다.

이 버전에서 선화 공주는 지혜롭고 덕이 있는 두 언니들의 지지에 힘입어, 궁궐에서 쫓겨나지 않고, 오히려 그런 헛된 소문을 퍼뜨린 서동을 잡아들인다.

그리고 "마마께서 너무 아름다우셔서 흠모하는 마음이 그저 실수를 했을 뿐" 웅앵웅 하는 서동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사내여, 그럼 이 모든 일이 내 탓이겠구나. 그래, 네 말대로라면 네놈은 아름답지 못한 자이니 마땅히 멸시받아도 되겠구나. 네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을 모욕하고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누가 허락이라도 했단 말이냐? 네 부족한 식견을 불쌍히 여기려 했건만 그 부족함을 부끄러이 여길 줄 모르니 내 너를 결단코 가엽게 여기지 않겠다. 그 죄를 가볍게 여기지도 않을 게야. 제 몸 하나 제자하지 못하고 날뛰는 것은 금수보다도 못한 것 아니겠느냐? 내 너를 사람으로 보아 그에 마땅한 처사를 내려주기 어렵구나. 당장 너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넓은 아량으로 네 어리석고 이기적이고 추한 생각을 두고두고 뉘우치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마."

이후 온 백성이 서동의 만행을 기억하게 되었고, 서동은 이마에 지울 수 없는 글자를 불에 달군 인두로 새긴 후 백제로 쫓겨났어. 이 일이 있고 난 뒤 진평왕은 세 공주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지. 또 진평왕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공주들은 어질고 지혜로운 성품과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신라를 평탄하게 이끌었단다.

서동이 제 죗값을 치룬 것부터 세 공주가 여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까지 완벽한 끝맺음이다.

 

다시 쓴 <반쪽이>도 난 참 좋았는데, 이게 내가 앞에서도 지적했던 '여성을 물건으로 보는 시선'에 제대로 대처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원전 <반쪽이>는, 장애인이라는 소수자를 내러티브의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까지는 참 좋은데, 왜 그 와중에도 여자(호랑이 가죽과 교환되는, 마을 대감의 딸)는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것일까?

막말로, 장애인이어도 남자기만 하면 여자는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남편으로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건가?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남자와 혼인할 자유도 없나? 그깟 호랑이 가죽이 뭐라고 자기 딸을 그것과 바꾸어 먹는지, 이 아버지란 작자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스포일러는 하지 않겠지만, 이 새로운 <반쪽이>에서 여주인공은 반쪽이에게 납치당하기를 거부하고 계략을 짜서 화를 모면한다. 이런 지혜로운 여성 롤 모델은 정말 두고두고 봐 줘야 한다.

 

이 외에도, 독자가 자신의 무의식적 성적 고정관념을 다시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이야기(특히 <콩쥐팥쥐전>)가 총 열 편 실려 있다.

아주 어린이가 읽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지만(일단 글자가 크지 않으니까), 한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이 정도는 충분히 읽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앞으로 자라나는 세대가 이런 고정관념, 차별, 혐오 없는 새로운 전래 동화를 읽고 더 넓은 사고를 가지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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