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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윤수경, <문지방을 넘어서>

by Jaime Chung 2019.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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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윤수경, <문지방을 넘어서>

 

 

'생각 많고 고독한 내향인이 문지방을 넘어 만난 평안과 즐거움'이라는, 책 겉표지에 쓰인 책 소개가 딱이다.

1장 '나는 내향인?'은 내향인인 저자의 내향적인 성격 이야기, 2장은 그런 저자가 '문지방을 넘어서'(이게 2장 제목이다) 밖으로 나가 우리 주변의 흔한 서점, 극장, 야구장 등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하고 느낀 이야기이다. 

마지막 3장은 제일 짧은데 저자가 '계속 이대로 나답게' 살기를 다짐하는 내용이다.

 

나도 저자처럼 내향인이라,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의 '깊고 은밀한' 대화를 좋아한다. 야한 얘기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서로를 신뢰하는 사람끼리만 나눌 수 있고, 서로의 말을 서로 이해하는, 만족스러운 대화 말이다.

깊고 은밀한 대화가 가능한 상대는 서로가 하는 말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 주어와 서술어를 생략해도 알아채는 센스가 늘어가면, '어, 거시기, 그' 등 지시 대명사만 말해도 그 안에 들어 있는 온갖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 "어" 하면 "아" 하는 핑퐁 같은 대화는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라서 도끼 썩는 줄 모른다.

이런 대화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질 수는 없다. 둘 사이이기 떄문에, 그만큼 자신을 편하게 드러낼 수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서로가 가진 상대에 대한 이런 이해가 나는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 대화가 끝나고 나면 운우지정을 나눈 어젯밤 못지않게 서로가 애틋해진다.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을 뿌듯하다. "즐거운 하루였어"는 이럴 때 하는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깊고 은밀한 대화는 아무 때나 할 수 없다. 내 상황이나 상대의 상황이 복잡할 때가 많으니까. 

그래서 저자는 글을 읽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대화는 꼭 사람과의 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사람을 못 만난다면 다른 대상을 찾으면 된다. (...) 

내게도 그런 대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대화 상대는 글이다. 나는 책, 영화(자막이라는 글을 장면과 같이 읽어야 하니 영화에도 글이 있다고 우겨 본다), 기타 등등에 나오는 글과 깊고 은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다. 나는 점점 말보다는 글이 편안하다. 글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면서 나를 기다려 준다. 내가 자기를 늦게 찾았다고 뭐라 하지 않으며 빨리 읽으라고 보채지 않는다. 읽기를 멈추었다가 다시 읽기까지 아무리 오랜 시간에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읽고 나서 내 생각을 다듬을 때까지 함흥차사라도 상관없다. 읽은 후 내 생각이 글과 다를지라도 삐치지 않는다. 나는 이런데, 너는 이렇구나, 그저 그뿐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글은 내 생각보다 깊을 때가 많아 내가 쳐놓은 좁은 울타리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 준다. 글을 읽으며 내가 가진 편견을 발견하게 될 때는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주위 눈치를 보지 않고 편견에서 벗어날 기회를 준다. 당연히 글은 나보다 아는 것도 많아서 몰랐던 것도 알게 해 주니 참으로 배울 것이 많은 상대다.

무엇보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온전히 글과 나 둘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어떤 대화보다도 몰입할 수 있다. 글과의 대화에서는 대화 후에 서로 그대로일 수도, 좋아질 수도, 나빠질 수도 있는 관계라는 이름의 오묘한 신경전이 없다. 글 자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대화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해가 없으며 미리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말을 에둘러 할 필요가 없다. 글은 깊고 은밀한 대화 상대로 안성맞춤이다.

정말 공감되는 말이다. 

 

2장에서 저자가 문지방을 넘어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내가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은 이거였다.

책이라는 물건은 가진다고 해서 온전히 소유했다고 볼 수도 없다. 읽어 내는 수고를 들여야 그 물건을 가진 의미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고 뒤에는 이전의 자신과는 조금 다른 자신이 될 수 있다. 어떤 한 권의 책이 나를 미지의 세계로 데려다줄지 모를 일이다. 사람에게 이만큼 매력적인 물건이 있을까. 무언가를 꿈꾸는 사람에게 이만큼 안성맞춤인 물건이 있을까.

내가 원래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해서, 심지어 남이 어딜 갔다 온 기록(기행문 같은 것) 읽는 것에도 별 관심이 없는데, 유일하게 이 인용 부분은 좋았다.

아니면 도서관에 관한 꼭지에서 이 부분도 공감됐다.

도서관이 좋은 할머니가 되게 해 줄 거라는 가장 큰 이유는 배움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배움의 기쁨만 한 것이 있을까. 특히 목적 없는 배움이 주는 즐거움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다. 좋은 대학 가라며 공부하랄 때는 그렇게 하기 싫은 게 공부더니, 딱히 써 먹을 데도 없는 것들을 배울 때는 왜 그리 재밌는지. 도서관에는 사방천지가 책이니 배움의 우물을 만난 셈이다. 두레박을 내려 물을 긷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여러 강의, 강좌가 열리는 도서관을 가게 된다면 다양한 배움의 문은 더 많이 열려 있을 것이다. 세상은 달라지는데 나만 혼자 옛날 것만 옳다고 고집부리거나, 요즘 것들은 다 틀려먹었다며 젊은이들의 생각을 헛바람이라고 여기는 꼰대 할머니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계속 배워야 한다. 젊은이들의 속도를 따라잡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그들 앞에 버티고 서서 길을 막는 할머니가 되고 싶진 않으니 나는 돗관을 자주 찾는 할머니가 되련다. 

나도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을 한다. 나라고 영원히 젊을 수 있는 건 아니니, 지금부터 내가 모르는 트렌드가 있어도 무시하거나 틀린 것,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배우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90년생이 온다>(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바 있다)를 읽고 나서부터 그런 생각이 들더라. 나도 몇십 년 후에는 기성 세대가 되어서 신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때가 오겠구나, 하고.

2019/10/11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책 감상/책 추천]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책 감상/책 추천]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이 책은 워낙 출간 당시부터 세간의 관심을 많이 끌고 반응도 좋았어서, 내가 따로 소개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니 그냥 바로 내 감상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eatsleepandread.xyz

 

엄청 대단한 이야기가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배꼽을 붙잡게 많드는 유머로 넘쳐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내향인의 기록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내향인이라면 이해하고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문지방을 넘어서기 전에, 뜨끈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읽으면 시간이 잘 갈 것 같은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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