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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영미, <인생운동을 찾았다!>

by Jaime Chung 2019.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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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영미, <인생운동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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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듯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려진 책표지를 보면 대략 감이 오겠지만, 이건 생존을 위해 운동이 될 '춤'을 시작한 한 중년 여인의 에세이이다.

저자는 이영미라는 연극평론가로, '몸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유인즉슨, 원체 타고난 몸이 약한 데다가, 체력 이상으로 과로하는 경향 때문에 30대 후반부터 보약을 달고 살 정도로 몸이 삐그덕거리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체력을 기르기 위해 이런저런 운동을 다 고려해 봤지만, '1분만 더!' 하며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운동은 맞지 않고, 옷 챙겨 입고 운동하고 다녀와 땀 씻고 조금 쉬면 두어 시간이 후딱 간다. 이래서야 글을 쓰는 일의 맥락이 끊겨 버린다.

게다가 그렇게 격한 운동은 하루에 1회 이상 하는 건 무리. 위무력증인 저자는 식사 후 몸을 좀 움직여 줘야 하는데, 그렇다면 집에서 수시로 짧게 할 수 있는 운동이 없을까 고민하다 떠오른 것이 춤이었다.

'주1회 학원에서 배우고, 집에서 틈틈이, 식후 시간마다, 한두 시간마다 일어나 스텝을 밟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해서 저자는 "쿨하게 업무를 처리하듯" 동네 댄스스포츠 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의 머리에 순수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일상적이며 실용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을 하고 싶다고 썼는데, 실제로 정말 그렇게 책을 썼다.

앞에서 간략히 설명했듯 저자가 어쩌다가 춤을 추기로 한 건지, 동네 댄스스포츠 학원에서 어떤 춤부터 배우고 어떻게 진도를 나갔는지, 댄스스포츠를 배운 다음에는 무엇을 배웠는지 등을 시간적인 순서로 진행하며 풀어놓는데, 군데군데 아주 실용적이고 유용한 정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서 댄스스포츠의 종류(서유럽 백인의 춤, 미국·중남미 춤을 바탕으로 영국에서 10종목으로 정리했다), 댄스화는 어디에서 사면 좋은가(서울역 옆 염천교 수제화 거리에 가면 4~5만 원에 맞출 수 있다), 초보자가 시작하기에 적절한 춤(자이브, 왜냐하면 라틴댄스가 모던댄스보다 쉽고 라틴댄스 중에서도 자이브가 얼추 따라가기는 제일 수월하기 때문이다) 등등.

저자가 이야기를 잘 풀어내서, 춤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러니까 남이 춤을 추는 건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춤을 배우거나 출 생각이 전혀 없는 내가 보기에도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제일 흥미로운 건, 역시 저자가 춤을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평론가 출신이어서 그런가, 춤을 배우면서도 자신이 가진 지식을 이용해 이런저런 분석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정말 나에게는 새로운 시선이었다.

예컨대, 발레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분석한다.

매사가 그렇지만 보는 것과 하는 것은 정말 다르다. 발레가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사실 그 춤은 서구 근대 공연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정면무대에 인간의 몸을 끼워 맞춘 춤이다. 관객이 둥그렇게 둘러앉아 구경하는 게 아니라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고, 출연자는 한 방향만을 의식하면서 춤을 춘다. 그러니 그쪽 방향에서 볼 때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도록 인간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비틀어 놓은 동작이 많다. 한 동작에서도 가슴, 허벅지, 발등, 머리 등 각 부위가 각각 어느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는데, 이 기준은 자연스러움이 아니라 정면에서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발레 연습실에 다리를 들어 걸쳐 놓는 바(bar)와 정면을 의식하도록 하는 거울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발레는 그저 우아하다, 그리고 발을 그렇게 혹사시켜서 추니 힘들겠다고만 생각했지, 이런 쪽으로는 분석해 본 적이 없어서 이 부분이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이야, 역시 배우신 분은 춤을 그냥 취미로만 배워도 이 정도 깊이의 분석을 할 수 있는 거군요! 너무 멋졌다.

 

저자가 춤을 배우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니 이건 삶도 그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구절들이 특히 그렇다.

물론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뛰지 않고 그저 걷는 것처럼 움직이는 경우도 없지 않다. 뛰는 게 쉽지 않은 70대 노인이 이렇게 걷기 동작으로 춘다면 그건 아마도 육체적인 이유에서일 것이다. 하지만 체력적으로는 이 정도 뛰는 게 가능한 50~60대인데도 이렇게 추는 사람이 적지 않다. 동작을 크게 하는 것이 민망해서다. 아니, 이렇게 크게 움직여 본 경험이 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동작이 작아지는 것이다. 자기 딴에는 크게 움직였다고 생각하지만 그저 평소보다 조금 더 크게 움직였을 뿐, 춤으로 보자면 턱도 없다. 그러니 민망함을 떨치고 더 과감하게, 더 크게 움직여야 한다.
선생님은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자이브의 몇몇 동작을 조금 섬세하고 정확하게 하도록 다듬어 주고 있다. 내가 "왜 처음부터 이렇게 정확하게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라고 투덜댔더니 선생님의 대답은 이랬다. "처음부터 그렇게 가르치면 어렵다고 다 도망가요. 일단 늪에 빠뜨려 놓고 어느 정도 움직일 만큼 되면 그때 다시 건져서 다듬어야지." 물론 댄스스포츠를 전문으로 할 연습생인 경우에는 다르단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라도 정확한 형태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고, 죽겠다' 소리가 나올 정도로 반복한다. 하지만 나 같은 일반인들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게 선생님 생각이었다. 파트너 붙잡고 음악에 맞춰 즐겁게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저자는 춤을 추기 시작하니 전반적인 건강이 좋아졌다고 한다. 어깨가 부드러워져 고질병이었던 오십견 증세도 사라지고, 무릎도 아주 튼튼해졌단다.

무릎을 많이 써서 무릎이 안 좋아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춤을 추고 나면 무릎이 좀 욱신거려도 자고 일어나면 다 나을 정로, 큰 무리는 없었다고. 

 

그리고 왈츠가 자이브나 룸바처럼 남녀가 손을 맞잡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춤보다 더 야하다는 것 알고 계셨는지?

어려운 점은 또 있다. 몸의 밀착이다. 그냥 손을 맞잡는 정도가 아니라 횡격막 부근의 윗배 부분부터 허벅지 부위까지 파트너와 밀착시킨 상태를 유지한다. 와, 이렇게 스킨십이 심한 춤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단 말야? 그냥 눈으로 보기에는 골반과 엉덩이를 흔들어 대는 라틴댄스가 훨씬 야해 보인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왈츠의 선은 얼마나 우아한가. 그런데 실제 해 보면 내숭도 이런 내숭이 없다.

와, 세상에... 넘모 야하다! 난 왈츠라고 하면 그냥 파트너와 가까이 붙어서 손 잡고 천천히 빙글 도는 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윗배부터 허벅지까지 찰싹 붙이고 추는 춤이었단 말인가! 

(사실 이렇게 신체 접촉이 많기 때문인지, 커플댄스에서 남자의 손은 여자의 어깻죽지뼈 미틍로는 내려가지 않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허리를 향해 더듬대는 손은 성추행으로 간주된다.)

 

앞~중반까지 계속 나오는 댄스스포츠 외에 탭댄스, 플라멩코, 벨리댄스, 훌라 춤도 책 중후반에 언급되니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번 훑어보시라.

초심자들이 이런저런 실용적인 정보(위에서 말했듯 댄스화는 어디서 살지, 춤을 출 때는 뭘 입으면 좋은지 같은)를 습득하는 데도 이 책이 도움이 될 거고, 아니면 아예 이 책을 읽고 '나는 이 춤을 배워 보고 싶어!'라고 마음을 정할 수도 있겠다.

책 마무리에 저자는 "운동으로서 내 나이의 몸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것, 춤 자체로 재미있는 춤, 춤으로 생각할 거리가 있는 춤"이라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춤을 골라서 배웠으며, 살사댄스나 에어로빅, 줌바댄스, 발레 스트레칭 등 운동 효과가 제1의 목표로 설정돼 있는 춤은 자신의 관심 밖이라고 말한다. 젊은이들이 많이 즐기는 방송댄스나 재즈댄스, 젊은 몸을 요구하는 발레도 마찬가지.

하지만 어떤 춤이든 무슨 상관이랴. 자신이 즐길 수만 있다면야.

60대인 저자가 '춤바람'이 날 수 있다면 나도 춤을 출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어떤 춤이 되었든 춤을 추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당장 막춤이라도 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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