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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박은지,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by Jaime Chung 2019.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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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박은지,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10월 말쯤에 내가 가는 도서관에 들어온 책인데, 인기가 많아서 예약을 하고도 한참 지나서야 받아 볼 수 있었다.

책 제목은 "(나는)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만... (이런 점이 불편해)"이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머리도 짧고, 남자들을 싫어하고(그리고 남자들에게도 미움받고), 목소리 크고, 늘 불만에 차 있는 여자들이라는 세간의 인식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인식도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밝히기에 부담이 되기도 하거니와, 일단 나 자신을 '무슨무슨 주의자'라고 부르려면 내가 그것에 대해 잘 알아야 하고 내가 그것을 대표할 수 있다는 어떤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도 느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성 평등의 필요성을 체감하면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닌데"라며 조심스레 접근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페미니스트라고 하기 전에 일단 자신은 메갈이나 워마드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야 하고, 타인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페미니즘적인 주장을 할 수 있다는 분위기도 여기에 한몫한다.

그렇지만 많은 여성들이 '김치녀'나 '메갈' 등이 되지 않기 애쓰는데, 남성들은 '한남'이 되기 위해 눈치 보며 말조심을 하지는 않는 듯하니 이보다 더 불공평할 수가 있는가.

책의 맨 첫 번째 꼭지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페미니스트는 아닌데"라는 말이 나를 조금 더 안전하게 지켜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페미니즘이 무엇을 망치려는 과격한 사상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우리는 여전히 제자리를 맴돌며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전반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무척 많은데, 페미니즘이 필요한 우리 사회에서 저자가 여성으로 느끼는 불편함(저자가 결혼한 여성이므로 남편, 시댁과 관련한 내용도 많다)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공감성 분노가 차 올라서 자세히 하나하나 다 옮겨 적다가는 내 혈압이 올라 사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간단하게 내가 제일 공감하고 공분했던 꼭지 몇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첫 번째. "페미니즘은 왜 여자들 얘기만 해?"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여성적인'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인데 왜 여자들 얘기만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한숨)

물론 가부장제가 여성만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과도한 짐과 부담을 지워서 남성들도 힘들어하는 점은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이 사회가 (흔히 쓰이는 표현대로) 남성들 위주로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그것의 균형을 맞추려면 여성들의 권익을 쟁취하고 보호하려는 노력이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

저자는 내가 위에서 인용한(왜 페미니즘은 여자들 얘기만 하느냐는) 질문을 한 남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넌 회사에서 사장님에게 불만 사항 말할 때, 사장님의 어려움을 먼저 헤아려드리고 말해?"

책 중간중간에 남편과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은 어떻게 설명했고 어떻게 이런저런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달라고 요구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독자도 보고서 따라 하기 딱 좋은 예시 같다.

저자가 한 말만 외워서 주위에 써 먹어도 아주 효과 있을 듯.

 

남편에게 설명을 해 주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 책에서 제일 공감한 이야기 두 번째로 넘어가겠다.

저자가 결혼을 하자 시댁에서는 '남편 밥 좀 잘 챙겨라'라든가 '남편 치과에 가라고 해라' 등등의 말을 저자(=며느리)에게 하기 시작했다. 이에 저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남편이 알아서 해야죠, 제가 시킨다고 하나요."라고 대꾸했단다.

왜 이러는 걸까? 엄마들은 자꾸 '남자는 나이 먹어도 어린애' 따위의 말을 한다. 이 말은 그러니까 집안에서 여자들(엄마, 누나/여동생, 아내 등)이 남자를 잘 챙겨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최종적으로는 혹시 문제가 생기더라도 '여자인 네가 참고 이해해'라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남자는 어린애니까 자꾸 칭찬해 주고 기도 살려 줘야 한다는 말도 많이 한다. 그게 현명한 여자가 되는 요령이라고.

하지만 칭찬할 점을 찾아서 칭찬해 주는 것도 상당한 에너지가 드는 일이다. 게다가 여자는 기가 죽어도 되고, 남자의 기를 살려 주기 위해 자신은 낮춰도 된다는 뜻인가?

여자가 남자 기를 살려 주면, 그런 여자 기는 누가 살려 준다는 말인가?

안 그래도 내가 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을 때, 다른 책도 빌릴 겸 이 책 저 책 살펴보다가 이런 비슷한 말을 어떤 책에서 발견했다.

"우스갯소리로 '내비게이션이 하는 말과 아내 말만 잘 들어도 남자는 문제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정확히 저런 표현은 아니었지만 저런 워딩이었다. 아니, '아내'라는 게 남자들만 가질 수 있는 건데 그럼 아내가 없는 여자들은 누구 말을 들어야 속편히 살 수 있는 건가?

저딴 말을 쓴 사람은 젠더적 감수성이 있긴 한 걸까? 편집자는 그걸 보고도 어떻게 손을 대서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걸까? 그런 생각이 휘몰아쳐 그 말을 보자마자 책을 탁 덮어서 제자리에 꽂아 버렸다.

여자들은 남자의 보모도 아니고, 남자들이 인생을 편히 살 수 있도록 조언을 해 주고 돌봐주는 존재도 아니다. 그러니까 내비게이션 따위와 아내를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앞으로 누가 나한테 이딴 말을 한다면 나도 저자가 보였던 반응과 똑같은 보여 주겠다.

한번은 남편과 사소한 일로 다투고 화해한 뒤에 무언가 앙금이 남아 "왜 그렇게 유치하게 굴어?"라며 그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랬더니 시무룩한 그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남자는 원래 어린애랬어…."

기가 막혔다. 그래? 근데 그걸 네 멋대로 행동하는 무기로 쓰라고 나온 말은 아닐 텐데…? 사라지려는 어이를 재빨리 잡아챈 내가 맞대응했다.

"나도 어린애야! 아 몰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내가 어린애 할 테니까 네가 어른 해, 달래 주고 해결해 줘!"

어린아이 시절이 지난 지 오래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떼쓰는 것과 함께 다리를 동동 구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편은 황당하게 웃으며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세 번째, "나는 그 농담이 웃기지 않다"라는 제목의 꼭지도 나는 무척 공감됐다. TV를 보면 유부남들에게 "결혼생활 어때? 좋아?"라고 묻고 그 남자가 기계적으로 "하하하 아주 좋습니다. 행복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상황이 종종 연출된다.

이른바 유부남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와이프가 보고 있다' 카테고리의 농담 말이다.

저자도 이것이 나만큼이나 '재미없다'고 생각했단다. 

이 웃기지 않은 농담은 특정 소수의 집단이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통용되고 있다. 마치 10대 청소년들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쓰는 언어를 만들고 생각하는 방식을 공유하듯이 '대한민국 유부남'이라는 타이틀을 갖춘 이들은 갑자기 '창살 없는 감옥'에라도 들어간 것 같은 스스로의 처지를 희화화하기 시작한다.

TV에서 유부남들이 흔히 공유하는 그 웃음 코드가 나는 언제나 불편했다. 결혼을 앞둔 예비 신랑에게 "지금이라도 자-알 생각해 봐"라고 조언하거나 유부남에게 "에이, 행복하다고요? 수척해지신 것 같은데?" 하고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거나. 그 농담이 웃기다는 사회적인 합의 자체가 잘못된 거라고 홀로 곱씹으며, 나는 채널을 돌렸다.

아니, 누가 자기들 목에 칼을 들이밀고 결혼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도 아니고, 자기 의지로 아내(될 여성분)에게 청혼해 결혼을 해 놓고서, 왜 이딴 수준 낮고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자기가 좋아서 한 결혼이라고 해서 절대로 불평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내가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티를 내면 아내가 나를 괴롭힐 것이다', 또는 '결혼 생활은 불행한 것이다'라는 전제를 단 것 같은 말을 하지 말라는 거다.

그들은 스스로의 결혼생활을 '잔소리하는 아내와 불쌍하게 돈만 버는 남편'으로 정형화함으로써 어쩌면 그들이 밟고 싶지 않았던 외로운 가장의 전철을 밟게 되지는 않을까. 그런 두려움이 그들에게는 없는 것일까, 아니면 그런 삶을 이미 받아들인 것일까.

외국 남자들은 와이프에 대하여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는 논지의 발언을 잘도 하던데, 한국 사회에서 어느 유부남이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아마 '저 인간은 뭐야?' 하는 시선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결혼생활이 얼마나 별로인지를 웃음거리로 삼는 데 일조하는 것보다는 '그래, 너희 잘났다. 잘 먹고 잘살아라'를 당하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유부남들의 고충을 몰라서 하는 소리일까?

그러고 보니 기억난다. 몇 년 전에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가상 결혼 프로그램에서 가수 알렉스 씨가 상대 여성에게 다정하고 배려심 많은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더니 같은 남성들이 '그런 놈들 때문에 우리가 못나 보인다'며 알렉스 씨에게 불만을 터뜨렸더랬다.

자기가 못하는 걸, 남이 잘하는 걸 보니 자기도 그런 것을 요구받을까 두려운 거고, 또 그렇게 되면 여성들의 눈이 높아져서 자기는 봐주지도 않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런 식으로 표현됐던 거라고 생각한다(웃긴 건, '아, 그럼 나도 저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지, 자신이 변하기보다는 그걸 잘하는 알렉스 씨 같은 사람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식으로 게으르게 대응했다는 점이다).

왜 그 유부남들은 실제로 있지도 않은 '아내의 구속'을 우스갯소리 삼아 자기뿐 아니라 아내를 희화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 그런 농담을 던지는 남자들은 아내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손톱만큼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긴 한 걸까? 내 남편이 연예인이 아닌 게 다행이었다. 나는 연예인들이 TV에 나와서 그런 농담을 할 때면 '저걸 TV로 지켜보는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가 항상 궁금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정말 핵공감 포인트다. 책에 붐업 또는 공감 버튼이라도 있다면 오조오억 번쯤 눌러 주고 싶을 정도다. 그러니까 그런 시답잖은 농담은 좀 그만하라고!!

 

놀라운 건 딱 이만큼 썼는데 저게 책으로 치면 세 꼭지에 해당하는 내용에 불과하단 것이다. 이 외에도 공감(공분)할 만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아주 많이 준비돼 있으니 걱정 마시라. 

여성들보단 남성들에게 더욱더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왜냐하면 남성들이 이런 걸 더 배워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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