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혼비, <아무튼, 술>
내가 좋아하는 <아무튼> 시리즈(이 시리즈에 대해서 쓴 리뷰들도 참고하시라) 중 술에 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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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혼비가 자신의 술 인생을 회고하며 술에 관한 자신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는데 다 하나같이 웃기고 재미있다.
이 책은 멋진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최종 진실을 내놓기 전에
고트족처럼 적어도 두 번은 문제를 놓고
토론해야 할 것이다. 로렌스 스턴은
이 점 때문에 고트족을 좋아했는데,
고트족은 먼저 술에 취한 상태로 토론하고
이후 술이 깬 상태에서 또 한 번 토론했다."
- ⌜다뉴브⌟, 클라우디오 마그리스
내 진짜 조상을 찾았다.
어떤가, 느낌이 오는가, 이 책이 엄청 유쾌할 것 같다는 느낌이?
아니라면 프롤로그도 한번 살펴보시라.
저자의 어머니는 어느 날부터인가 '주류/비주류, 메이저/마이너' 같은 말을 배워서 하시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저자는 편집자에게 자신의 관심사 중 제일 메이저라고 생각한 것을 언급했다가 마이너 중의 마이너라는 대답을 받았다.
그래서 좌절하며 자신이 주류가 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았고, 그 결과 떠오른 게 이 책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잘한 마트료시카의 준엄한 도열 사이로 이런 나도 주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떠올랐다. 주(酒)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술이라면 내가 20년 동안 그 무엇보다도 가장 꾸준하고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사랑해 온 게 아닌가. 반평생에 걸쳐 가장 많은 돈을 쏟아부은 것도, 가장 많이 몸속으로 쏟아부은 것도 술이었다. 나는 술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술에 대해 쓰자. 술책을 쓰는 술책을 쓰자. 이 술책 앞에서라면 더는 저에게 비주류라고 한숨 공격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여.
본격적인 술 에피소드는 저자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수능 100일 전 '백일주'를 마신 게 음주 인생의 첫 시작이었다는 내용으로 시작한다(진짜 말도 안 되게 웃긴다).
그러고 나서는 소주를 따를 때 나는 소리가 좋아서 늘 한 잔, 한 병을 더 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주사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주사의 경계>라는 꼭지에서 저자는 주사를 이렇게 정의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만취해 돌아오는 길에 내일 해장할 생각으로 라면을 샀고, 후후, 이렇게 취했어도 내일을 준비하다니, 나는 정말 프로 술꾼!이라는 우쭐함과 함꼐 잠들었는데, 다음 날 끓이려고 꺼내 보니 라면 과자인 '뿌셔뿌셔'였다는 걸 깨닫고 황망했다면? 물론 '뿌셔뿌셔'를 끓여 먹는 사람도 있긴 하다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건 미술을 좋아하고 탁월한 재능마저 있는 자식에게 법대를 강요하는 부모 같은 일이다. 뿌시라고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는데 왜 굳이 끓인단 말ㅇ니가. 어쨌거나 중요한 건 이건 주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술 취한 상태로 라면인 줄 알고 '뿌셔뿌셔'를 끓여 친구들에게 안주로 내갔다면 그건 주사가 맞다. 물론 그쯤 되면 걔들도 이미 많이 취해 있어서 뭐가 이상한지 모른 채 맛있게 먹고는 그날 라면을 먹었다고 평생 기억하게 되겠지만(이래서 나도 기억 못 하고 옆에서 본 사람도 기억 못 하는 주사가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주사의 정의를 이렇게나 웃기게 설명할 일인가!
술을 먹으면 터놓고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감정이 격해져서 욕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은 널리 인정받는 진실이다.
저자는 원래 욕을 잘 안/못 하는 사람인데, 친구들이 욕하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였단다.
그래서 어느 날은 술을 마시고 친구를 따라 '씨발'이라고 내뱉어 봤는데, 아나운서가 말해도 그보다는 더 자연스러울 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나 정직한 '씨발'이었단다.
친구는 '욕 코치'를 해 주기 시작했는데, 저자가 너무나 바른 삶을 살아 왔는지, 도저히 도와줘도 그 욕설을 제대로 욕답게 할 수가 없었단다.
결국 친구는 "야, 그 정도면 됐어. 사실 욕이란 게 연습한다고 늘겠냐, 술 마신다고 늘겠냐. 그냥 사는 게 씨발스러우면 돼. 그러면 저절로 잘돼."라며 포기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오래 머무른 날(자신을 성추행한 상사와 싸우다가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서에 갔단다), 막막한 기분에 자신의 집으로도 가지 못하고 친구 집으로 걸어가던 새벽, 갑자기 '씨발'이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듣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건 바로 내 친구들의 욕이다. 제대로다. 약간 흥분한 마음으로 연달아 뱉어 보는데 깜짝 놀랄 만큼 완벽한 욕들이 내 입에서 계속 나왔다. 잠깐이라도 멈추면 이 감각을 잃을세라 걸어가면서 계속 입을 움직였다. 씨발, 씨발, 씨이발!
그렇게 한참 욕을 하다 보니 속이 시원해지면서도 슬퍼졌다. 욕을 완성한 것은 기쁘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겪어야 했던 일이 너무나 끔찍했으므로.
한번 입에 붙은 욕은 이후에도 흔들림이 없었다. 작업비까지 떼어먹으려고 하는 성추행범 상사와 싸우면서 욕할 일이 어찌나 많았는지 씨발로 가글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P와 Y와 M도 나의 눈부신 성장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제 좀 느는가 싶었더니 점점 같이 욕할 일이 줄어갔다. 일찌감치 캐나다에 자리 잡은 P를 필두로, 나도 외국에 나갔고, Y도 말레이시아로 떠났기 때문이다. M은 연년생 육아에 치여 자기가 지금 어디 살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라고 했다.
그래도 2년이 지난 후 이 넷은 다시 모여 술을 마셨다고 한다. 더 이상 '씨발'도 쓰지 않고.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고 할까.
이 외에도 진짜 웃긴 얘기가 많은데 그중 압권은 저자가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놀다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벌어진 일이다.
미리 알면 재미가 없을 테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지만 이건 꼭 읽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웃다가 눈물이 날 수도 있다. <술 마시고 힘을 낸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꼭지에 있다.
마지막으로 한 꼭지만 더 좋았던 점을 언급한다면, 와인을 소재로 취향의 확장과 축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좋았다.
취향이 넓어진다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대개 그만큼 소비액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이 점에 대해 언급하는 글은 별로 못 봤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취향의 확장과 함께 넓어지는 세계. 멋진 말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그게 와인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충만한 기쁨과 소중한 기억들을 안겨 줄 테고, 그건 분명 멋진 세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멋짐을 마음 편히 누릴 수 있는 사람에 나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았다. 불편한 진실이지만, 대개의 취향은 돈을 먹고 자란다. 그 때문에 어떤 취향의 세계가 막 넓어지려는 순간 그 초입에 잠시 멈춰 서서 넓어질 평수를 계산하고 예산을 미리 짜 보지 않고서는 성큼 걸어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확장 공사 다 해놨는데 잔금 치를 돈이 없으면 그때 가서는 어떡해? 그 돈으로 다른 좋은 걸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술을 입에도 안 대는 사람인데 대학생 때부터 술 잘 마시는 친구들이 곁에 있어서 술 잘 마시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어쩌면 그들이 해 주는 술 얘기를 좋아하는 것일지도.
어쨌거나 이 책은, 내 친구들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 음주를 자제하고 있는 요즘에 딱 좋은 책이다. 친구들의 간에 부담 없이 내가 술 얘기를 들을 수 있으니까!
이제 술은 마시지 말고 이 책에 양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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