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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임민경,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

by Jaime Chung 2020.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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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임민경,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

 

 

'문학으로 읽는, 죽음을 선택하는 마음'이라는 부제가 말해 주듯, 문학 속 죽음을 선택하는 인물들의 심리를 살펴보는 책이다.

자살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인 '자살학(suicidology)'이라는 게 있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심리학과 문학은 서로 다른 방법을 취해 왔을 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기이한 현쌍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고자 나름의 방식으로 노력해 왔다"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썼다.

심리학은 자살자의 마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것보다는(많은 경우 그것은 심리학이 우선순위로 추구하는 바가 아닙니다), 양적인 측면에서 객관적인 위험 요인과 보호 요인을 찾고, 사람들을 최대한 자살로부터 떼어놓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기울이는 학문입니다. 저로서는 그것을 심리학의 한계라 부르기보다는 심리학이 자신의 영역을 잘 지키고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만, 그래도 자살이라는 현쌍을 모두 이해하고 싶은 사람이 보기에는 미진한 부분이 있을 것이고, 더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어 보고 싶은 순간도 있을 겁니다. 

이럴 때 저는 문학에 기대게 되는데, 문학은 그저 어떤 현상을 보여 줄 뿐 그것의 원인과 원리를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때로는 증언하되, 가끔은 증언조차 거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종종 씸리학을 앞질러 가기도 하고, 심리학이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영역에 먼저 불을 밝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이해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소수의 사례에만 몰두하게 되어 전반적인 흐름을 놓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자살이라는 영역을 탐구함에 있어서는 심리학이든 문학이든, 또 다른 어떤 학문이든 간에 어떤 도구가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죽음을 탐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서로 경쟁자이기보다는 협력자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첫 세 작품(<안나 카레니나>, <인간 실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대한 분석이 제일 흥미로웠다.

일단 <안나 카레니나>에 대한 분석을 읽으면서 제일 많이 공감했다. 안나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자살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슈나이드먼(Edwin S. Schneidman)은 동료 심리학자인 헨리 머레이(Henry A. Murray)의 이론을 인용하여, "자신이 추구하는 심리적인 욕구가 좌절되면 개인에게는 우울감, 불안감,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정서가 발생"하며, 이것들을 통해 심한 고통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심리통"이라고 설명했다.

머레이가 제안한 심리적 욕구는 크게 애정, 야망, 정보. 물질, 권력, 사도마조히즘, 사회적 적합성, 지위의 여덟 개 항목이 있는데, 안나의 경우는 이 중에서 '애정(affection)'과 관련된 욕구가 가장 중요한 욕구였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이 애정 욕구에는 친밀 욕구(need for affiliation)와 양육 의존 욕구(need for succorance)가 포함되는데, 친밀한 욕구는 한 친구나 무리를 고수하고 친밀해지고자 하는 욕구이며, 양육 의존 욕구는 타인에게 사랑과 돌봄을 받고, 자신의 욕구를 타인을 통해 충족하고자 하는 행동 경향을 말한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볼까요. <안나 카레니나>는 안나가 오빠와 올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모스크바로 가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녀는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들을 걱정하며 눈물짓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이는데, 작품 초입에서부터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시하고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돌보고자 하는 안나의 친밀 욕구가 잘 드러나 있다 볼 수 있습니다. 이후 브론스키를 만난 안나는 그와 정열적인 사랑에 빠져드는데, 소설이 후반부에 이를수록 브론스키를 갈망하는 안나의 심정이 더욱 자주 나타나지요. 안나는 기분이 나쁘거나 슬플 때면 브론스키가 어서 와서 자신을 달래 주기를 바라며, 그가 밖에서 보내는 씨간을 최대한 줄이고, 자기와 함께해 주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모습에서 관찰되는 것은 양육 의존 욕구이지요. 비록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안나가 병원을 짓거나 학교를 세우는 일 등에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며 성취에 대한 욕구를 보여 주기도 합니다만, 언제나 그녀가 진정 절박하게 원하고 바랐던 것 일 순위는 타인과 따뜻하고 원만한 관계를 맺는 것, 연인에게 사랑받고 관심과 애정이 넘치는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원하면 원핤수록 브론스키는 안나의 요구가 자신의 자유를 속박한다고 여기게 되고,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늘어갑니다. 브론스키와의 사랑이 식고 있다고 믿으면서 고통스러워하던 바로 그 시기, 안나는 한편으로는 "난 사랑을 원해요. 그런데 그게 없어요. 그러니 모든 게 끝이에요!"라고 호소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사랑이 식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낮에는 일로, 밤에는 모르핀으로" 잠재웁니다. 즉, 브론스키와 자신의 관계가 끝났다는 느낌은 이미 안나에게 모르핀의 도움을 받아 달래야 할 정도로 큰 고통의 원천이 된 것이지요.

아, 세상에.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읽을 때만 해도 불륜이 뭐가 좋다고 이혼도 제대로 안 하면서 저렇게 살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나, 뭐 이런 여자가 다 있나, 했는데 몇 년 후에 나도 그 정도로 강렬한 애정 욕구를 느끼게 될 줄이야!

역시 세상 살면서 남 욕을 할 게 아니다. 자기가 나중에 고대로 똑같이 하게 된다니까(물론 나는 불륜은 안 했지만!).

여튼, 이제야 안나의 심정을 내가 이해하겠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에 관한 챕터에는 저자의 아주 재밌는 경험이 실려 있다. 한 문단밖에 안 되는데 의미심장해서 여기에 옮겨 본다.

이 책의 원고를 준비하던 중 마침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 낭독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낭독회가 끝난 뒤 질문 시간에 "사실, 읽으면서 주인공이 정말 답답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번역가 선생님께서는 "만약 책의 주인공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면, 지금 인생을 정말 잘 살고 계신 것"이라고 답하셨고, 이에 모두 함께 크게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다자이 오사무의 글이 고통스럽거나 혼란스러운 처지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와닿는 글이라는 뜻이겠지요.

<인간 실격>의 주인공인 요조가 죽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는 건 '좌절된 소속감'과 '짐이 된다는 느낌' 때문인데, 조이너의 자살 이론에 따르면 '습득된 자살 실행 능력(acquired capability for suicide)'가 이를 실현하는 요인이라고 한다.

즉, 아주 간단히 말해서 한 개인이 첫 시도에 자살을 시도해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고, 여러 번의 실제 시도와 자해, 어린 시절 경험한 학대, 자신이나 타인의 부상에 거듭햇서 노출되는 일 등을 통해 '자살 실행 능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실비아 플라스도 두 번째 자살 시도를 통해 자살에 성공했다는 점을 생각하면(이 점도 <댈러웨이 부인>을 분석하는 챕터에서 거론된다) 이 이론은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마지막으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관한 챕터에서 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부분.

말년의 괴테가 자신의 작품을 두고 한 말도 재미있는데요, 동료 작가 요한 에커만과의 대화에서 그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출간된 뒤 그 소설을 거의 읽어 보지 않았다고 고백하면서 "나는 그것을 보기만 해도 무서워져. 그것을 낳게 한 병적인 상태를 다시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야"라고 말헀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괴테가 자신의 책에 마음의 격랑을 일으키는 괴물을 가둬 두어서 책을 열면 다시 그 괴물이 뛰쳐나올까 봐 두려워하기라도 했던 것 같다는 인상을 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또다시 과거의 상태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겠지만, 저는 그가 베르테르를 창조하고, 그 안에 그 시기에 경험했던 모든 것을 털어 넣음으로써 한때 그를 괴롭게 했던 것들로부터 풀려났다는 것에 더욱 무게를 두고 싶습니다. 그리고 책 속에 자신을 괴롭히던 것들(그것이 죽음 충동이든, 다른 어떤 광기나 고통이든 간에)을 풀어놓은 뒤,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되어 삶의 다음 장으로 옮겨 간 작가들이 괴테 말고도 많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오스트리아의 작가 에리히 프리트가 말했듯 많은 경우 문학은 "삶을 혐오하여 쓴 것도 사실은 삶을 위해 쓴 것"이며, "죽음을 찬양하여 쓴 것도 사실은 죽음을 이기기 위하여 쓴 것" 같습니다. 그 자신 역시 베르테르 못지않게 자살에 가까이 갔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소설을 썼으며, 그 소설을 씀으로썻 위기를 넘기고 오래도록 살아갔다는 이야기는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람에게 위안이 되어 주는 것 같습니다.

 

나는 중증 우울증을 겪거나 자살을 시도한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었다.

현재 본인이, 또는 주위 소중한 사람이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힘들어한다면, 그래서 그런 이의 심리를 이해하고 싶다면 한번 읽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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