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손기은, <힘들 때 먹는 자가 일류>
캬, 제목부터 기가 막힌다. 음식과 술을 전문으로 하는 에디터가 쓴 에세이인데, 역시 먹는 법을 잘 아시는 분이라 그런지 글도 맛깔스럽다.
프롤로그부터 이미 너무 웃기다.
삶은 달걀을 머리에 내리치듯 어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지난 11년간 GQ에서 음식과 술을 다루는 피처 에디터로 일하면서, 일종의 주접글 같은 잡지 기사와 이미지를 만들어 왔구나 하는. 나의 최애는 '음식과 술'이었고 나는 그 커다란 팬덤의 옆구리 어딘가 즈음에서 열심히 꽹과리를 치는 주접 전문 팬이었구나.
"그저께 먹은 술까지도 말끔히 해장되는 맛" "입술이 너덜너덜해지도록 매운 양념" "별 양념이 없는데도 혀가 알아서 요동을 친다" "농부 같은 근면함과 대장장이 같은 노동 강도가 더해져 완성된 한 병의 위스키" "따뜻한 떡을 자르면 보타이나 포켓치프로 만들어도 될 무늬가 떡하니 보인다" "올백 시험지를 든 것처럼 기분이 뿌듯한 맛" ... 읽어 주는, 좋아해 주는, 기억해 주는 독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 가면서 매년 주접은 더 정성스러워졌다.
저자는 두 지인과 같이 술집을 오픈했는데, 동업자들과는 나이도, 고향도, 학교, 성격, 별자리, 팔자, 주량, 라이스프타일이 모두 다르단다. 오죽하면 오픈한 지 1년 반이나 됐는데 아직도 존댓말을 하고 싸울 정도로 친하지도 않다고 말할까.
그래도 딱 하나 공통점이 있다면 셋 다 먹고 마시는 일에 순수한 마음을 계산 없이 쏟는다는 것.
'와, 이 사람들 찐이네.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해선.'
싼 거 비싼 거 할 것 없이 두루 먹고 마셔 온 경험치, 그 경험을 토대로 올라선 먹성의 경지, 일의 우선순위를 따질 때 '먹는 일'도 늘 묵직하게 한 자리 차지한다는 사실이 서로 닮았달까. 각자 몸 담고 있는 커리어에서는 세심하고 진중하지만 먹는 일에서만큼은 오늘만 사는, 아니 인생이 한 3시간만 남은 사람처럼 기분파로 변한다.
우리 집에 다 같이 모여 라꾸쁘 자금 관련 비상대책회의를 할 때도 "비빔국수나 한번 말아 볼까요" 하면 나는 이미 삶은 국수의 물기를 탈탈 털고 있다. 오픈 전 라꾸쁘에 앉아 기획 회의를 할 때도 "이것도 까요" "다 마시죠, 뭐" "꺼내, 꺼내! 까, 까!"라는 말을 탁구공 스매싱하듯 빠르게 주고받는다.
언젠가 라꾸쁘 리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여기는 직원들이 일하면서 술을 한 잔씩 하는데 그게 찐간지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다가 취기와 음악에 흥이 오르면 잔을 들고 바 한 켠에서 소심하게 어깨를 턴다.
빠듯한 자영업 사정에 매달 통장 잔고를 짤랑거리지만, 회식만큼은 흐드러지게 한다. 주로 호텔 뷔페에서 문워크를 밟거나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어깨춤을 춘다. 담당 세무사가 "이게 회식비라고요? 회식이요??"라고 물을 정도다. '먹어 본' 경험이 커리어가 되고 그 커리어로 번 돈을 다시 먹는 일에 투자하는 삶을 반복한 세 명이다 보니 이 부분에선 맘과 입이 착착 맞는다.
이렇게 먹는 것에 진심이다 보니 다이어트는 언제나 해야 하는 것이 되어 버렸을 테다.
야식의 욕망을 잠재우기 위해(안 그래도 집에 먹을 것이 많아서) 선택한 방법은 스스로에게 가학적인 말을 하는 것이라고.
"살 빠졌을 때 예뻤잖아, 너" 혹은 "자기 요즘 얼굴 벌크업 해?" 같은 말을 굳이 곱씹는 것. 어느 날 SNS에 올린 기름진 햄버거와 맨하탄 칵테일 사진에 정말 점잖고 한없이 상식적인 지인이 달았던 "어허, 살쪄요"라는 댓글 같은 것도.
엄마의 전매특허 '세상 절망적인 말투'도 아주 도움이 된다.
"너, 주변에 봐라. 애 둘씩 낳고도 너보다 날씬한 애들이 얼마나 많노. 지난번에 살 빠졌을 때 다리도 예쁘고 얼굴도 예쁘고 얼마나 새침하게 예뻤다고. 아예 포기해 버리면 금세 더 찐다. 모르나? 큰일이다, 큰일이야."
이 방법까지 쓰면 식욕이 그나마 좀 사그라진다. 멘탈은 마구 너덜너덜해지겠지만 식욕은 약간 잠재울 수 있다.
재밌는 문단 하나만 더. '혼밥이란 무엇인가'라는 꼭지에서는 혼밥을 "집이 아닌 곳에서, 그리고 누군가의 시선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테이블에 둘씩 넷씩 모여 앉은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우뚝하게 홀로 앉아 오직 차려진 밥만을 앞에 둔 식사"라고 내린다.
어설프게나마 혼밥을 나름대로 정의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지금부터 아주 더럽고 게걸스럽고 사회적 체면이 염려되는 폼 안 나는 이야기를 털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없는, 그야말로 혼자만의 혼밥은 절대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나의 은밀한 사생활이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둬 왔던 욕망을 폭발시킨다.
하정우가 김을 세로로 우악스럽게 먹는 장면을 두고 대중들은 아직도 웃음기를 거두지 못하지만, 나는 그 장면이 거울 속 나를 보는 것 같아 볼 때마다 얼굴이 화르륵 달아오른다. 전기밥솥의 밥통을 끼고 앉은 내 모습이 마치 그와 같달까.
이렇게 맛있는 주제에 대한 맛깔스런 글이 이어지니 어찌 재미있게 읽지 않을 수 있으랴!
맛있는 것을 먹는 (끼니) 사이에 읽으면 좋을 글이다. 굿!
반응형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마쓰오 다이코, <옷장은 터질 것 같은데 입을 옷이 없어!> (0) | 2021.02.22 |
---|---|
[책 감상/책 추천] 한승혜,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0) | 2021.02.15 |
[책 감상/책 추천] 김규진,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0) | 2021.01.25 |
[책 감상/책 추천] 매들린 밀러, <키르케> (0) | 2021.01.18 |
[책 감상/책 추천] 이유미, <자기만의 (책)방> (0) | 2021.01.08 |
[책 감상/책 추천] 김예지, <다행히도 죽지 않았습니다> (0) | 2020.12.23 |
[책 감상/책 추천] 고이즈미 요시히로, <부처와 돼지> (0) | 2020.12.14 |
[책 감상/책 추천] 임민경, <우리는 자살을 모른다> (0) | 2020.12.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