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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규진,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by Jaime Chung 2021.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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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규진,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이 책의 저자는 공중파 TV 뉴스에서 인터뷰까지 한 적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알려진 레즈비언이 아닐까 한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줄곧 여성 파트너와 결혼하는 걸 꿈꿔 왔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그렇게 했다! 일단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 허가증을 받았고, 그리고 국내에서는 결혼식을 먼저 올린 후 동사무소에 혼인 신고까지 하러 갔다(결국엔 반려되었지만).

이렇게 조금도 미안해하거나 수줍어하는 기색 없이, 올곧게 자신의 길을 걸어온 그녀가 대한민국에서 유부녀 레즈비언으로 사는 건 어떤 것인지를 맛깔나는 에세이를 통해 보여 준다.

 

내가 이 책을 마음에 들어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너무나 유쾌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커밍아웃 경험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톱(top) 5를 꼽는 레즈비언이라니!

한번은 같은 동아리의 언니에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고 밝혔는데, 그 언니는 활짝 웃으며 "맞혔다!"라고 했단다. 그녀가 레즈비언임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던 거다.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니, '규진이가 예쁜 여자들 무리 사이로 적극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을 보고 알았단다. 눈치가 빠르시군!

 

또 다른 인상적인 커밍 아웃 일화 중 하나.

결혼식 직후, 옆 부서에 새로운 매니저가 입사했다. 함께 업무를 할 일이 많은 부서라 친목 차원에서 다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식당 줄이 너무 긴 게 아닌가. 마침 여유로운 날이라 대기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결혼에 대한 주제가 나와서 자랑할 겸 핸드폰을 꺼내 결혼식 사진을 보여 줬다. 반지 교환을 위해 좌측에는 내가, 우측에는 언니가 드레스를 입고 서로를 향해 촉촉한 눈빛을 보내는 사진이었다. 흥미롭게 사진을 보던 매니저는 오른쪽에 계신 여자분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을 수 있다. 하나, 이 직원은 합동 결혼식을 하는 마이너한 종교를 믿고 있으며 이 사진은 그 의식의 일부분이다. 둘,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우정 사진인데 내가 외국에서 일을 오래 해서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셋, 이 직원은 레즈비언이고 한국에서 동성 결혼식을 올렸다. 내가 생각해 봐도 셋 다 가능성이 희박하다. 굳이 따지자면 첫 번째가 가장 그럴싸했다.

정답을 공개하니 매니저는 "헐 대박!"이라는 말로 놀람의 정도를 표현헀다. 그 뒤에는 한국에서도 동성 결혼식을 하는 줄 몰랐다, 사진 혹시 더 봐도 되냐고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 대화를 이어나갔다. 책에 실을 겸 이 사건에 대해 한번 물어보았는데, 내가 레즈비언인 줄 전혀 눈치를 못 챘다고 한다. 막 신혼여행을 하고 온 참이라 거의 무지개 깃발을 흔들고 다닐 시기였는데! 앞으로는 새로 입사하는 직원이 놀라지 않도록 주 1회 무지개색 옷을 입고 출근하리라 결심한다.

 

나는 또한 이분의 마인드셋이라고 할까, 여성관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게 너무 좋다.

'연하는 직진'이라고 말하고 또 실제로도 홀딱 반한 아내분(물론 아래 에피소드 당시에는 그냥 썸 타는 정도)께도 정말 직진으로 들이대셨다고. 아래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을까 고민하셨던 시기의 일화다.

우려와 달리, 나는 언니에게 빠른 호감을 느꼈다. 모범생 같은 외모에 차분한 말투로 이상한 소리를 해대는 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언니의 명예를 위해 비유적으로 설명하자면, 나영석 예능이 아닌 SNL이나 라디오 스타 계열의 유머 감각을 지닌 사람이었다. 정제된 사캐즘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커리어가 뛰어난 점도 멋졌다. 안 그래도 재미있고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담당하는 업무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급기야 우주 미인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부장님, 제가 이런 분께 무슨 추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문제라면, 언니에 비해 내가 너무나도 미약한 존재인 점이었다. 소득도 적어, 학벌도 부족해, 외모가 대단히 훌륭하지도 않아, 심지어 인성도 더 못된 것 같았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만, 부족한 건 부족한 거였다. 내 얘기를 찬찬히 듣던 부장님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무슨 소리예요, 규진, 많은 가치를 전달할 수 있죠. 언니 말 잘 듣기, 귀여움을 갈고닦기, 긍정적으로 말하기, 약속에 늦지 않기?"

존경하는 현명한 부장님의 고견을 해석해 보자면 즉 괜히 열등감을 표출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내 매력과 올바른 태도로 승부하라는 얘기 같았다. 하긴, 언니가 소득이 높은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면 내 데이트 신청을 거절했겠지. 나의 높은 자존감과 거부할 수 없는 귀여움에 빠졌나 보다. 그래, 연하는 직진이지!

"언니, 두 번 봐서 좋으니까 세 번 봐도 또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나랑 만나요. 다른 사람들을 만나 봐도 내가 제일 괜찮을걸요?"

자기 최면을 너무 열심히 했나? 준비했던 것보다 더 박력 있게 고백을 해 버렸다. 다행히도 언니는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우리는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다.

아, 정말 너무 귀엽다. 이런 박력 넘치는 연하라니!! 역시 귀여운 사람이 미녀를 얻다 보다.

 

이분은 또한 아내분(당시 여자 친구)께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무려 '기획서'까지 제작하신 분이다. 책에 그 기획서가 공개되는데, 자신이 생각하는 결혼이 무엇인지 공유하며 시작해 '결혼에 준하는 실현 가능한 행위' 세 가지, 동성 결혼이 가능한 국가가 표시된 세계 지도, 가장 간단한 절차의 뉴욕시 혼인 신고 과정, 본인의 미래 기대 수입 및 커리어 플랜 등등을 망라한다.

이런 기획서를 쓰는 것도 너무나 큰 노력이고 준비라 감동할 만한데, 저자는 마지막에는 이런 말까지 덧붙인다.

+ 혹시 이 책을 읽고 기획서로 프러포즈 했다가 나를 원망하는 사람이 생길까 봐 노파심에 한 가지 덧붙여 본다. 결혼이 조인트 벤처 설립은 아니고 양측은 살아 숨 쉬는 사람이니까 기획서만 제시하는 건 조금 삭막할 수 있다. 내 결혼 기획 발표는 감성에 호소하는 편지와 디올, 티파니, 시그니엘의 도움을 받았음을 밝혀 둔다.

이러니 아내분이 프러포즈를 승낙하지 않을 수가 있나! 기획서에 '정서적 준비' 항목으로 본인의 귀여움도 있는데 진짜 귀여우시다 ㅋㅋㅋ

 

이 책을 읽다 보면 어쩜 이렇게 사람이 밝고 유쾌하고 건강할 수 있는지 감탄하게 된다. 

본인이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레즈비언이라면 이 책에서 동성 결혼식에 드는 비용(저자의 경우에 국한되긴 하지만)까지 공개돼 있으니 이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성애자들의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만, 동성 커플의 그것에는 그런 리소스가 많지 않으니까.

행복한 동성 커플이라는 롤 모델을 보고 싶으신 분들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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