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매들린 밀러, <키르케>
<오디세이아>를 키르케의 시점으로 다시 쓴 소설. 키르케 이야기는 다들 잘 알 테니 굳이 적지 않겠다.
나는 기존에 잘 알려진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해서 다시 이야기하는(retelling) 걸 좋아하는데, 특히 진 리스(Jean Rhys)의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마가렛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페넬로피아드(Penelopiad)>.
나는 <페넬로피아드>를 이것보다 훨씬 먼저 읽어서 그런지, 이 두 작가가 텔레마코스(오뒷세우스와 페넬로페 사이의 아들)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게 흥미로웠다.
애트우드의 텔레마코스는 아버지가 없다고 자신이 왕 행세를 하려 하며 어머니를 무시하는 개자식인데 밀러의 텔레마코스는 굉장히 예의가 바르고, 생각이 깊으며, 인간적이어서 놀랐다.
키르케가 어릴 때 아버지, 어머니, 다른 형제자매들에게 무시당하는 게 참 짠하다.
그는 자기 목에서 내 팔을 떼어냈다. "그렇게 난리 부릴 것 없어. 이렇게 될 줄 누나도 알았잖아. 내 것 하나 없이 땅속에서 평생을 썩을 수는 없어."
나는 어쩌라고? 묻고 싶었다. 나는 그냥 썩으라고?
하지만 그는 삼촌에게 말을 거느라 이미 몸을 돌렸고, 신혼부부가 침전에 들자마자 아버지의 전차에 올라탔다. 금빛의 소용돌이를 반짝이며 그렇게 사라졌다.
가족들에게 비웃음당하고 놀림당하던 키르케가 처음으로 만난 인간이 글라우코스인데, 그가 그녀를 얼마나 경외했는지, 키르케는 글라우코스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렇게 잘 대해 준 건 글라우코스가 처음이었을 테니까.
나도 모르게 신의 위엄을 풍기며 얼마나 뻣뻣하게 굴었던가. 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뻣뻣했다. 내 옷소매가 그의 옷소매를 스치고 지나가자 벌벌 떨었다. 내가 말을 걸 때마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내가 아는 몸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앞에서, 그때까지 만난 그 모든 위대한 신들 앞에서 내가 수천 번 반복해 온 몸짓이었다. 공포의 연쇄 관계.
나는 하마터면 다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그가 목에 뻣뻣하게 힘을 주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놓인 모닥불 위에서 물고기가 연기를 피웠다. 나는 그에게 내 삶에 대해 얘기한 게 거의 없었다. 할 얘기가 뭐가 있겠는가. 반복되던 학대, 내 뒤에서 되풀이되던 비웃음밖에 없었으니. 그 당시에는 어머니가 유난히 기분이 언짢았다. 아버지가 그즈음부터 어머니보다 체커를 더 좋아헀기에 그 분풀이를 나한테 하고 있었다. 나만 보면 으르렁거렸다. 키르케는 돌머리야. 키르케는 맨땅보다 더 천지분간을 못해. 머리칼이 개털처럼 엉겨붙었네. 그 갈라진 목소리로 한 번만 더 말을 하면 내가 아주 그냥. 자식들 중에 왜 하필 쟤가 남은 거야? 쟤는 아무도 데려가지 않을 텐데. 아버지는 들었다 한들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체커 말을 이리저리 옮기기만 했다. 예전에는 두 뺨 위로 눈물을 흘리며 내 방으로 슬금슬금 들어가곤 했지만 글라우코스를 만난 뒤로는 그 모든 게 침이 없는 벌의 공격과도 같았다.
하지만 글라우코스는 개새끼... 크흡.
키르케의 조카 뻘 되는 메데이아가 잠시 등장하는데, 정말 잠깐이라 아쉽긴 하다. 메데이아의 이야기도 아주 흥미진진하고 몰입할 만한데.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이거다.
그녀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뭔가가 있었다. 머리까지 뻗치는 열성이랄까 열의가 있었다. 워낙 신들의 여왕처럼 걸었기에 아름다우리라 짐작하고는 있었지만 나의 어머니나 여동생과는 다르게 묘한 아름다움이었다. 이목구비 하나하나는 별 볼 일 없었다. 코는 너무 날카로웠고 턱은 너무 튼튼했다. 그럼에도 한데 어우러진 모습은 불꽃의 심장과 같았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두 눈이 내 살갗을 벗기기라도 할 듯이 나를 잡고 놓지 않았다. (...)
"하지만 그 아이는 자신을 희생한 게 아니지 않으냐. 네가 죽인 거지."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묘약을 먹었어요. 다른 대부분의 남자들보다 편안하게 갔습니다."
"네 피붙이였다."
그녀의 눈이 밤하늘의 유성처럼 환하게 이글거렸다. "세상에 더 귀하고 덜 귀한 목숨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 아이를 죽일 필요는 없었지. 네가 양모피와 함께 돌아갔으면 됐을 테니. 아버지에게로 말이다."
그녀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 표정이란. 그야말로 유성과 비슷했다. 지상으로 방향을 틀면 벌판을 잿더미로 만들었을 만큼.
그리고 키르케가 오디세우스에게 얻은 텔레고노스를 키우면서 느끼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란! 그 표현이 정말 너무 절절해서 '나는 저런 감정 절대 평생 모르겠지' 하는 짠한 기분이 느껴졌다.
가자, 나는 이 아이를 구슬렸다. 우리 재밌는 거 하자. 마법을 보여 줄게. 이 산딸기를 다른 걸로 바꿔 줄까? 하지만 아이는 산딸기를 내팽개치고 다시 바다를 보러 달려갔다. 매일 밤 아이가 잠이 들면 나는 그의 침대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일은 좀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가끔 그 말대로 될 때도 있었다. 가끔 둘이서 웃으며 바닷가로 달려가 아이를 무릎에 앉혀 놓고 파도를 구경할 때도 있었다. 아이는 계속 발길질하며 내 팔을 쉴새없이 잡아 뜯었다. 그래도 뺨은 내 가슴에 얹혀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올랐다가 꺼지는 아이의 가슴을 느낄 수 있었다. 인내가 넘쳐흘렀다. 계속 소리를 질러라, 나는 생각했다. 그래도 견딜 수 있어.
의지였다, 매 순간이 의지였다. 따지고 보면 주문과도 같았지만 이건 나에게 거는 주문이었다. 아이는 넘쳐흐르는 거대한 강물이었고, 나는 아이의 급류를 안전하게 유도할 물길을 매 순간 준비해 놓고 있어야 했다.
나는 또다시 이 섬에 다른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위로를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아이를 같이 예뻐하고 싶어서였다. 나는 이렇게 얘기하리라. 이것 좀 봐, 믿기지가 않지? 우리가 바위와 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왔어. 나는 실망스러운 엄마였지만 아이는 이 세상의 달콤한 기적으로 자랐어.
나는 아이의 단호함이 좋았다. 옳은 일과 그른 일이 분명하게 갈리고, 실수와 결과, 무찔러야 하는 괴물로 이루어진 아이의 단순한 세상이 좋았다. 나는 이런 세상을 알지 못했지만 아이가 허락만 한다면 그 안에서 계속 머물고 싶었다.
아... 진짜 너무나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라 아름답고 슬프다. 키르케ㅜㅜ
고전의 재해석을 좋아한다면 한번 읽어 보시라. 기본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어야 '새로운 시각'이 눈에 더 잘 들어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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