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다솔, 갈로아, <숙녀들의 수첩>
수학동아에 연재된 이 교육 만화의 부제는 '수학이 여자의 것이었을 때'이다.
무슨 말이냐고? 놀랍게도 18세기 영국에서는 수학이 여성적인 학문, 여성들에게 어울리는 학문으로 여겨졌다.
수학동아의 이다솔 기자는 마감 기간, 자신의 기사가 교정되기를 기다리며 론다 쉬빈저의 <두뇌는 평등하다>를 읽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바로 이 문장을 본 것이다.
"18세기 초기에 가장 놀라웠던 면은 여성들의 수학 공부가 적극 권장되었다는 사실이다."
21세기는 남성들이 이과적 지성이 발달했고 여성은 문학을 잘한다는 '고정관념'이 널리 퍼져 있는 우리에게는 참 낯선 개념이다.
칼럼에서 이다솔 기자도 말하지만, 이 고정관념 때문에 기자 본인을 포함해 얼마나 많은 여성들의 삶의 진로가 바뀌었을까?
18세기 여성에게 수학이 얼마나 권장됐고 여성이 수학을 얼마나 즐겼는지는 <숙녀들의 수첩 혹은 여성들의 책력(Ladies' Diary: or, Women's Almanack>(이하 <숙녀들의 수첩>)에서 잘 드러납니다. 영국의 첫 여성지였던 이 잡지는 발행된 지 불과 6년 만에 돌연 수학 잡지로 변하게 됩니다.
당시에는 '책력(중요한 기념일, 일출, 일몰 시각, 달의 모양, 별의 위치 등의 정보를 제공하던 달력)'이 흔하던 시기인데, 당시 제일 잘나가던 인쇄사 '스테이셔너스(The Company of Stationers)'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잡지를 만들기로 한다.
처음에는 여성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한 연애, 결혼, 아름다움에 대한 에세이, 요리법, 의학 지식 등을 싣다가 창간 6년 후 성격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편집장 티퍼(Tipper)가 잡지 마지막에 끼워 넣은 수수께끼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자신이 답을 찾았다며 편지를 보내고, 심지어 내년 호에 실어 달라며 자신이 만든 새로운 문제도 제안했다.
그래서 티퍼는 "요리법 같은 내용을 소개하는 건 다음 기회로 미루고 앞으로는 수수께끼와 수학 퍼즐만 싣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후 <숙녀들의 수첩>은 대부분 독자가 보내는 수수께끼와 수학 문제들을 싣게 된다.
만화는 이런 시대적 배경으로 하여, 이탈리아 최초 여성 교수이자 수학자인 마리아 아녜시(Maria Agnesi)를 등장시킨다.
자신의 책을 영어로 번역하기 위해 영국에 왔다는 설정인데, 마침 <숙녀들의 수첩>에서 조수로 일하는, 수학을 사랑하는 소녀 엘리를 만나게 되고, 엘리는 그녀를 통해 수학을 배워 간다는 게 줄거리이다(왜 '통해서'냐면 직접적으로 수학을 가르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많은 여성 학자들('최초의 프로그래머'인 에이다 러브레이스라든지 조선 최초의 여성 과학자 김점동이라든지)도 많이 알게 됐고, 어떻게 수학이 여성적인 학문에서 남성 전문가들의 것이 되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생각해 볼수록 참 안타깝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여성들의 사회와 남성의 압박 하에 자신의 재능도 다 펼치지 못하고 살다가 갔을까.
요즘도 아이만 낳으면 '경단녀'가 되어 그간 열심히 쌓아올린 커리어가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참... 이런 게 재능의 낭비지.
이제는 남성들을 직장에서 좀 집으로 데려오고, 여성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제도를 재정비해야 한다.
참 좋은 책인데 아무래도 만화가 나와서 그런지 책 전체가 PDF로 되어 있다.
그래서 만화 1회분이 나온 후 중요한 여성 인물 소개가 한쪽 나오고, 이다솔 기자의 칼럼(시대상과 만화에서 다뤄진 인물 등에 대한 더욱 자세한 설명)이 나오는 구조인데도 글에 하이라이트를 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형광펜을 쳐서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은데.
그렇다 해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게 바로 우리가 거의 진리처럼 받아들이는 '고정관념'이란 게 사실 얼마나 자의적이고 변하기 쉬우며 취약한지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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