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전은영, 김소라, <페미니스트인 내가 어느 날 직장인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는 진공 상태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스트는 현재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들이다. 그들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먹고살려면 돈이 필요하다. 집안이 원래 잘 살아서 일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면, 그들도 생계를 위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
거기에서 페미니스트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한다. 본인이 학생이나 아르바이트생이라면 큰 문제 없이 부당한 상황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저자가 드는 예시처럼, 교수가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면 손을 들고 그 말을 정정해 달라 요구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에서 사장이 주휴수당을 주지 않으면 법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거라고 설명할 수 있다. 어차피 “학기가 끝나거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 상황과 사람이 리셋“되니까.
하지만 문제가 일어나는 곳이 생계의 터전, 직장이라면? 내 위로 사수가 있고 상사가 있고 그 위에 또 상사가 있다면? 그때는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워진다. 속담에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하지만 상사가 시키는 일이, 또는 직장에서 하는 일이 내 신념과 너무 다르다면? 그때는 정말 생계를 걸고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나?
그러나 사회생활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어렵게 얻은 정규직 명함 앞에서는 겁나는 게 많아졌다. 회사에 발을 내디딘 후에야 이전에 있던 곳이 안전지대였음을 깨달았다. 이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던 안전지내는 끝났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게 유리한 모습을 영리하게 찾아 갖춰야 했다. 그렇게 3년 차 직장인이 된 지금,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던 ‘메갈’은 어디 가고 매일 아침 지하철에서 쿠션 팩트를 두드리고 상사의 시비에도 ‘예쁘게 말하는’ 직장인이 남았다.
그러고 보니 10월에 읽은 한승혜의 <다정한 무관심>에서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 있다. 너무 인상 깊어서 기억하고 있더랬다(물론 아래 인용문을 내가 다 줄줄 외워서 쓴 건 아니고, 밀리의 서재에서 빌려서 찾아 왔다).
흔히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사람들이 많이 품는 의문 중 하나가 왜 그간 당하고만 혹은 참고만 있었냐는 것이다. 몇 년 전 김지은 씨가 상사였던 안희정 전 도지사에 의한 성폭력을 고발하고 나섰을 때 역시 비슷했다. 많은 사람이 지금껏 뭘 하다가 이제 와서 저러냐고, 왜 진작 싫다는 의사 표명을 하지 않았냐고, 결국 모든 것이 김지은 씨 본인의 책임이며 잘못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내 주변의 한 남성은 김지은 씨가 하는 말을 도무지 신뢰할 수가 없다며, 이제 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저 ‘연애 감정의 변심’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아니었다면 당장에 일을 그만뒀을 것이 틀림없다면서.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되물었다. “직장을 어떻게 그리 쉽게 그만두나요?” 그러자 그는 그런 내가 더 놀랍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래도 그만둬야죠!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나와야죠! 성폭력 위기에 처했는데 그까짓 직장이 대수인가요? 나라면 그랬을 거예요! 자기는 자기가 스스로 지켜야죠!”
그러니까 그의 주장은 성폭력 위기가 닥치면 피해자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있는 힘껏 저항을 하기 마련이며 그렇게 해야 마땅한데, 김지은 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므로 ‘진정한’ 피해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남성이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살펴보니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김지은 씨의 이야기가 진실이 아니라는 근거로 그토록 오래, 성폭력이 4회나 반복되도록 참고 있었다는 점을 꼽고 있었다. 당시 이들의 주장을 통해 일종의 깨우침을 얻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아직도 여성을 한 명의 노동자나 직업인으로서 정식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온갖 범죄자를 “한 집안의 ‘가장’이라는 이유로, 책임져야 할 식솔들이 있다는 이유로 선처해주었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것이다. 그렇게 먹고사니즘에 관대한 주제에 여성들에게는 가혹하다는 게 웃기는 아이러니다. 아래 인용문 역시 <다정한 무관심>에서 가져왔다.
(…) 많은 사람이 여성은 굳이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생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마치 먹고사는 일과 무관한 존재인 것처럼 여긴다. 우리 사회는 직장 내 갑질로 고통받는 많은 노동자를 동정하면서도 그 대상자가 김지은 씨의 사례처럼 여성일 경우, 그가 입은 피해가 성폭력일 경우, 그것을 직장 내 위력에 의한 부당한 처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사생활로 인식한다.
그러므로 남성이 거래처 직원이나 상사의 온갖 갑질과 부당한 요구를 감내하고 참는 것은 먹고살기 위한 고귀한 희생이자 인내가 되지만, 그 주체가 여성일 경우 그것은 ‘저도 좋았으면서 여태껏 뭐 하다 이제 와서’라는 식의 비난을 들을 만한 개인의 ‘변심’이자 사적인 ‘원한’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러니 저자들 말대로, “슬프게도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스스로가 급격하게 보수화되는 걸 실감”하더라도, 그게 어찌 그들 탓이겠는가. 여성 혐오 사회가 문제지. 저자들 중 한 명은 기자라서 그래도 자신이 쓰는 기사에 페미니즘적인 색채를 입히려고, 여성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는 기사를 쓰려고 노력했는데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삿거리를 던져 주는 (남성인) 정보원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지도 가늠하기 어렵고, 직장에 잘 꾸미고 다니면 너무 여성스럽다고 비난하고 그렇다고 털털하게, 편하게 다니면 또 여성스럽지 못하고 비난하니 그 사이 어딘가의 균형을 잡는 것도 까다롭다. 애초에 남자들은 이런 고민을 해야 할 필요조차 없는데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구성원이자 근로자로 살아가는 데 큰 어려움이 따른다는 게 너무 불공평하다.
‘명예남성 되기’는 일종의 불량식품 같은 것이다. 여자 사회초년생에게 명예남성이 되는 전략은 매력적이고 유효한 전략으로 보인다. 사회적 남성성을 단순히 흉내만 내면 된다는 측면에서 실천하기도 그리 어렵지 않다. 게다가 마와리[수습기자가 경찰서에 배당되어 해당 지역에서 발견한 사건사고를 보고하는 일 또는 그런 교육을 받는 시기-인용자] 초반에 내가 생각한 것처럼 효과도 꽤 있는 것 같다. 학창 시절 누구나 비슷한 불량식품을 달고 살았던 것처럼, 명예남성 되기는 다 말고도 많은 여자들이 채택하는 전략이기에 죄책감도 크지 않다. 하지만 불량식품 같은 명예남성 되기에는 한계가 없고, 결과적으로 해롭기까지 하다.
저자들이 ‘페미니스트로서 직장에서 살아남고 성공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답을 주지는 않는다. 사실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프리 사이즈’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페미니스트 직장인으로서 어떤 것을 시도해 봤고, 어떤 것을 시도해 볼 것이며, 그 결과가 어떤지 등을 공유하고 같이 전략을 짤 수는 있다. 그것이 의미 있는 행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제는 더 이상 ‘페미니스트’와 ‘직장인’이라는 정체성들 중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일이 더 이상 없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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