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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by Jaime Chung 2023.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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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신카이 마코토, <언어의 정원>

 

 

⚠️ 아래 서평은 신카이 마코토의 <언어의 정원> (동명의 애니메이션 영화와 소설 둘 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어의 정원>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이 만든 동명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감독 본인이 직접 소설화한 버전이다. 타카오와 유키노의 이야기를 두 주인공들 외에 타카오의 형 쇼우타, 타카오의 어머니, 유키노의 남자 친구 등 다양한 인물의 시점에서 볼 수 있어서 영화 버전보다 조금 더 상황 이해에 도움이 된다. 워낙에 인기가 많았던 작품인 데다가 영화의 소설화된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기존 작품을 이미 알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제일 많이 접할 테니, 이 서평에서는 독자 여러분이 이미 줄거리는 다 알고 계시다고 상정하겠다.

솔직히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상황은 잘 이해 못하고 눈부신 작화에 집중해서 봤다. 그래서 유키노가 화장품 케이스를 떨어뜨린 후 우는 장면에서 ‘아, 화장품이 가루가 되어서 화가 나 우나 보다’ 생각했다… 😅

바로 이 장면.

근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장면에 해당하는 본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알람이 울고 있다.
눈을 뜨기 전부터 유키노는 오늘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움의 손길은 그렇게 쉽게 닿지 않는다.
격렬한 두통을 무시하며 세면대에서 세수를 했다. 정성을 다해 뚜껑을 덮듯 얼굴에 화장수를 뿌리고 유액을 발랐다.
보트 같은 소파에 앉아 파운데이션 케이스를 꺼내들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케이스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케이스가 작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가 한 번 튕겨 올랐다. 자동적으로 몸을 숙이고 주워 열었다. 파운데이션은 산산이 깨져 있었다. 유키노는 부서진 파운데이션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아, 깨졌다. 조금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눈에 들어온 빛이 뇌에 닿기까지 평소보다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코끝이 찡해지면서 눈물이 차올랐다. 유키노는 화들짝 놀라 눈물을 닦으려고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눌렀다. 전혀 슬프지 않은데 나는 왜 우는 걸까. 이상했다.

내일은 날씨가 어떨까―.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오른발을 흔들어 펌프스를 던졌다. 펌프스는 정자의 타일 바닥 위를 뒹굴더니 툭 하고 작은 생물이 숨을 거두듯 타일 끝에서 쓰러졌다. 내일은 흐릴 모양인가보다. 흐음―하며 유키노는 캔 맥주 하나를 땄다. 한 번에 꿀꺽꿀꺽 하고 3분의 1 정도나 마셨다. 마시면서 오늘도 몇천 마리나 되는 매미가 울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생각해보니 알코올 반입이 금지돼 있는 이 유료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는 건 꽤나 오랜만이었다. 그 소년을 만난 이후로는 보통 테이크아웃 커피를 가져와 마셨다. 아무러면 어때. 어차피 사람에게는 조금씩 이상한 면이 있는 법이다.
8월의 빛이 넘실거리는 아침나절의 정원을 유키노는 혼자 바라보았다.
자줏빛 찬란한 빛의 정원―.
퍼뜩 떠오른 말. 그리고 뒷부분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다―누카타 여왕은 그렇게 말했다. 지극히 당연하겠지만 나는 무리야. 저 빛의 정원 끝에 무엇이 있는지, 무엇이 있었는지, 무엇이 있어야만 했는지, 내게는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스물일곱의 나는 열다섯의 나보다 조금도 나아진 게 없구나.
햇살이 점점 더 눈부시게 쏟아지고 그림자가 더욱 짙어져가는 정원을 보며 유키노는 누군가로부터 점수가 매겨지는 기분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비 오는 날에 정원에서 만난 타카오를 좋아하게 된 유키노가 ‘오늘은 비도 내리지 않는구나(=오늘은 타카오를 만날 수 없구나)’ 알아차리고 몸에 기운이 없어 파운데이션도 떨어뜨리고 타카오를 향한 그리움으로 슬퍼하는 거였다. 물론 유키노가 남학생을 건드렸다는 말도 안 되는 모함에 당해 미각을 상실할 정도로 큰 심적 충격을 받아 슬픈 것도 있지만. 어쨌거나, 유키노를 곤경에 빠뜨린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사건을 접하게 되니까 확실히 인물의 감정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소설을 읽고 나서 영화를 다시 봤더니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보여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생각하고 흘려 보냈던 맥락, 예컨대 타카오의 형 쇼우타가 여자 친구랑 집 구내서 나가 살겠다고 하는 부분도 다 이해가 됐다. 유키노가 하는 “어차피 사람에게는 조금씩 이상한 면이 있으니까.”라는 말도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 수 있고(=유키노가 좋아하고 존경하던 히나코 선생님이 하신 말씀). 영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다는 분들께 아주 안성맞춤이다.

그렇지만 이 소설의 최고 매력이자 장점이라 한다면 역시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미친듯이 섬세한 작화로 그린 풍경에서 느껴질 법한 ‘분위기’를 정말 잘 살렸다는 것이다. 정말 분위기가 너무 멋지다. 이런 분위기는 날씨를 묘사하는 표현에서 생기는 것 같다. 예컨대 이런 부분.

기온은 1도쯤 떨어졌고 주변은 물과 신록의 냄새로 가득했으며 비가 내리는데도 여러 종류의 들새들이 기분 좋게 지저귀고 있었다. 메타세쿼이아와 상수리나무로 이루어진 잡목림을 빠져나가자 연못이 넓게 자리한 일본정원이 펼쳐졌다. 무수히 떨어지는 빗줄기와 무수히 만들어지는 파문. 그 소리가 신비로운 속삭임으로 변해 수면 위로 피어올랐다.

6월 말로 접어들자 일본정원의 등나무 시렁에 꽃이 피었다. 예년보다 한 달이나 늦게. 무언가를 애타게 기다리다 핀 것처럼 계절에서 벗어난 개화였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보랏빛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꽃잎에 잠시 머물렀다가 부지런히 떨어지는 동글동글하면서도 요염한 물방울이 어찌나 귀여운지, 등나무 꽃에 마음이 있어서 환희를 참지 못하고 물방울을 터뜨리는 것만 같았다.

옥상은 확실히 기분을 상쾌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풀이 없는 수영장 같다고나 할까.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서 시야가 탁 트였다. 그래, 장마 기간에 쾌청한 날 저녁 무렵은 확실히 이런 색이었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서쪽 하늘은 빛에 투영되어 얇게 썰어놓은 연어처럼 투명한 오렌지빛이었고 태양에서 멀어질수록 하늘은 포도색을 띄었다. 마침내 일몰이 막을 내리자 느릿느릿 아무도 모르게 포도색에서 짙은 감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이런 묘사만 읽어도 확실히 배경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지고, 나 역시 그런 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날씨나 풍경 묘사는 가히 최고다.

 

반면에 이 소설의 단점이라 한다면, 여성 인물 묘사가 유치하다는 것. 정확히 말하자면, 행동이나 감정 묘사는 정상적이고 납득이 가는데 외모 묘사만 나오면 그렇게 유치해질 수가 없다. 소설 초반에 유키노가 등장할 때 이 묘사를 보시라.

에히메(愛媛)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유키노는 주위의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소녀였고 그 미모는 그녀를 불행에 빠뜨렸다.

유키노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예뻤다. 산과 바다와 논밭과 저수지와 귤 과수원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에서 그녀는 어디에 있든 대번에 눈에 띄었다. 유키노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놀라서 그녀를 돌아보았고 그럴 때마다 그녀는 상처를 받았다. 내 얼굴이 그렇게 요상한가 싶어서 어린 소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인구 감소 현상이 현격히 드러나던 초등학교 안에서 유키노의 고뇌는 더더욱 깊어졌다. 급우들과 나란히 서면 두상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작았고 팔다리는 부러질 것처럼 가늘고 길고 하얬으며 얼굴은 정성들여 빚은 듯 정교했다. 누구보다도 큰 쌍꺼풀 진 눈은 까맣고 신비롭게 젖어 있었고 짙고 긴 속눈썹은 연필 하나쯤은 거뜬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탄력이 있었다. 소심하게 머뭇거리는 모습에는 어린아이 같지 않은 야릇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그로 인해 유키노는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잿빛 바다에 홀로 떠 있는 새하얀 돛단배처럼 누구의 눈에도 황홀하게 비치는 빛이―그녀 자신은 손톱만큼도 원한 적이 없는데도 늘 뿜어 나왔다.

유키노란 인물이 극 중 최고 미녀라는 설정은 알겠는데요, 뭔가 묘사하는 방식에서 작가의 욕망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특히 ‘두상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작았고 팔다리는…’ 운운하는 이 부분이 너무 웃기다. 너무 과하게 데포르메 했다는 느낌? 그냥 ‘얼굴도 작고 팔다리도 가늘고 예쁘고~’ 정도가 아니라 마치 경주마처럼 콧김을 뿜어내며 욕망을 발산하는 것 같달까. 진짜 단연코 미녀를 묘사하는 방법이 이것뿐입니까? 이래서야 “키는 190정도 되어 보이고 몸은 되게 말랐다… 40킬로밖에 안 돼 보였다… 얼굴은 진짜 안이 다 비칠 정도인 투명한 색에..입술은 쥐 잡아먹은 사람처럼… 진짜 빨갰다.”(출처는 여기; 교정﹒교열은 인용자) 운운하는 ‘존나세’와 다른 게 뭔가.

 

하지만 그보다 더 가관인 건 이런 부분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유키노의 미모는 세상에 다소나마 스며들었다. 볼록한 가슴을 감싼 모카색 블레이저와 옅은 다갈색 리본, 날씬한 허벅지가 설핏 드러나는 길이의 타탄체크 플리츠스커트. 그런 예쁜 교복을 입은 유키노는 여전히 도드라지는 미소녀였고 TV 속에서 활약하는 아이돌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냥 그런 역할을 담당하는 정도로 그녀의 미모는 안정을 찾을 곳을 발견한 것이다.

하얀 서머스웨터를 부드럽게 들어 올린 봉긋한 가슴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두 번째 건 유키노가 아니라 나츠미라는 인물을 묘사하는 부분이긴 하다.)

볼록한 가슴이니 날씬한 허벅지 등은 도대체 왜 묘사하는 거예요? 소위 ‘팬서비스’라고 하는 ‘판치라(팬티를 보여 주는 장면)’를 글로는 못 보여 주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대신 하는 건지? 제발 여성 등장인물 외양 묘사 좀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해 주세요. 텀블러에서 본 이 짤이 생각났다.

남성 작가가 쓴 여성 등장인물: “카산드라는 블라인드 사이를 통해 비추는 햇빛, 그녀의 맨 가슴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일어났다. 그녀는 기지개를 켰고, 태양을 맞이하며 팔을 올릴 때 가슴이 딸려 올라갔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셔츠를 입었는데 얇은 천 때문에 유두가 두드러지게 보였다. 그녀는 슴가슴가하게 가슴을 출렁이며 계단으로 향했고, 찌찌해서 내려갔다.

 

무슨 느낌인지 아실런지? 남성 작가들이 여성 등장인물을 묘사할 때 이야기 흐름에 딱히 중요하지도 않고, 여성 작가라면 굳이 언급하지도 않을 몸매 이야기를 과하게 하는 걸 꼬집는 거다. 이런 남성들은 여성을 생각할 때 가슴을 떼어 놓고 (글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생각할 수 없나 보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 이야기에 상관도 없는데 가슴이나 허벅지 등 몸매 이야기를 하는 건 너무 우습지 않나. 남성 작가가 여성 등장인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투명하게 너무 잘 보인다. 내가 작가라면 각 인물을 묘사할 때 제일 먼저 그 인물의 성격, 감정, 또는 동기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잘 드러낼까 고민할 것 같은데. 등장인물의 몸매를 절대 언급하지 말라는 게 아니고 필요 이상으로 성적 대상화를 하지 말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

결론적으로, <언어의 정원>을 소설로 접하니 사건과 각 인물들의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날씨과 풍경 묘사는 단연코 일품이다. 반면에 여성 등장인물의 외양 묘사가 유치한 건 작가가 신경 써서 다음 소설부터는 개선하면 좋겠다. 나는 딱히 이 성인 여성-미성년자 소년 커플에 딱히 태클을 걸 마음은 없지만 이 점만큼은 불쾌했다고 언급하고 싶다. 나처럼 <언어의 정원>의 작화에 감탄하느라 내용을 살짝 놓치신 분이 있다면 소설 버전을 읽어 보셔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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