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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동근, <화석을 캐는 아가씨>

by Jaime Chung 2023.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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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동근, <화석을 캐는 아가씨>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위인전은 잘못됐다. 여성 위인이라고는 신사임당, 나이팅게일, 유관순, 헬렌 켈러 정도가 전부이던 남성 위인들 위주의 위인전 말고 나는 이런 책을 읽어야 했다.

이 책은 고생물학자 메리 애닝의 삶을 다룬, 짧고 가벼운 동화 형태의 전기(傳記)이다. 메리는 어룡(魚龍)을 포함해 많은 화석을 발견했고, 후에 찰스 다윈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정도로 고생물학의 선구자이다. 메리는 어릴 적부터 생계를 위해 화석을 발견해 팔았는데, 온전한 어룡 두개골을 파 냈을 때 고작 12살에 불과했다. 1823년에는 여태까지 발견된 것 중 제일 온전한 형태의 플레시오사우루스 화석을 발견했다. 메리는 화석 전문점을 운영했고, 화석을 연구하는 학자나 화석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을 근처 해변으로 안내해 주기도 했다. 책에서 소개하는 메리의 업적을 잠시 살펴보자.

암석의 한 형태라고 생각된 어느 돌이 사실은 과거의 생명체가 남긴 배설물이 돌처럼 변한 분화석임을 밝히고, 지금의 오징어와 비슷한 벨럼나이트의 화석에서 물과 혼합하여 잉크를 만들어내기도 했으며, 자신의 화석 사업을 더욱 번창하고자 거실에서 운영하던 화석 창고를 집 앞에 건물로 넘어가서 메리 애닝의 화석 가게를 차렸어요. 화석 발굴도 꾸준히 했고, 그중에는 박쥐나 새보다도 먼저 하늘을 날았던 척추동물, 익룡의 화석을 찾기도 했어요. 메리는 30살이 되기도 전에, 많은 업적을 이루어냈지요.

하지만 메리는 여성이기 때문에 영국지질학회에 참여하지 못했고, 암에 걸려 1847년 3월 9일, 47세에 사망하고 만다. 다행히 사망 후에 그녀의 업적이 인정되긴 하지만.

메리와 친분을 쌓았던 학자들은 영국지질학회에 정식으로 공문을 보냈고, 공문에 따라서 학회는 애도의 뜻으로 메리가 다니던 교회에 스테인드글라스 유리를 보냈어요. 또한 그녀가 살아생전에 참여하지 못한, 영국지질학회 최초 여성 회원으로 등록되었어요. 놀랍게도 영국지질학회가 본격적으로 여성 회원을 받은 것은 1904년부터였어요. 화석을 향한 메리의 공로는 그녀가세상을 떠난 후에야 천천히 인정받기 시작했어요. 그래도 너무 늦고 말았어요. 메리는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고 말았죠.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 현재, 화석을 다루는 책과 장소에서 메리는 빠짐없이 등장하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있고, 2010년, 영국왕립학회는 인류 과학사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준 인물 중 한 명으로 메리를 선정했어요. 역궁의 기사직과 여러 훈장을 받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이자 동물학자인 데이비드 애튼버러 경은 메리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생물학자’라고 말했지요. 메리가 발견한 화석들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과거 생물을 공부하는 데 있어 메리가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려 주고 있어요. (…)

만약 여러분이 이때까지 그녀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면, 그건 여러분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위대한 고생물학자를 널리 알리지 않은, 남성 위주의 학계와 여성을 혐오하는 사회 탓이다. 문장을 조금 더 다듬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80쪽가량의 이 책은 내가 여태껏 살면서 접했던 그 어떤 교과서보다 더 자세하게 메리 애닝의 삶과 업적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이런 책을 어린이들, 특히 여자 어린이들에게 읽혀야 하는 게 아닌가.

케이트 윈슬렛과 시얼샤 로넌 주연의 영화 <Ammonite(암모나이트)>(2020)도 메리 애닝의 삶을 다루긴 했는데, 그녀에게 동성 애인이 있었다는 불확실한 추측에 기반해 메리 애닝의 업적보다는 러브 스토리에 더 치중했다. 따라서 정작 위대한 고생물학자인 그녀의 면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것 같아 그저 아쉬울 뿐이다(이 영화에 대해서는 내가 예전에 후기를 쓴 적이 있다. 아래 링크 참고).

2021.02.08 - [영화를 보고 나서] - [영화 감상/영화 추천] Ammonite(암모나이트, 2020) - 애매하고 부정확한 전기 영화

 

[영화 감상/영화 추천] Ammonite(암모나이트, 2020) - 애매하고 부정확한 전기 영화

[영화 감상/영화 추천] Ammonite(암모나이트, 2020) - 애매하고 부정확한 전기 영화 감독: 프랜시스 리(Francis Lee) 메리 애닝(Mary Anning, 케이트 윈슬렛 분)은 이크티오사우루스(Ichthyosaurus)의 화석을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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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애닝이 레즈비언이었거나 말거나 그게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이렇게나 위대한 학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우선인 것 아닌가. 의무 교육 과정을 졸업한 지 너무 오래되어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메리 애닝처럼 빛나는 여성 위인이 더 많이 알려지고 더 많이 존경받았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영화 후기에도 언급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의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도 같이 추천한다. 이제는 더 이상 여성들의 활약을 감추지 말고, 더 많이 알고, 배우고, 밝히려고 노력해야 할 때다.

2020.11.20 - [책을 읽고 나서] - [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

[책 감상/책 추천] 매기 앤드루스, 재니스 로마스, 책 제목이 내용을 너무 잘 요약해 줘서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러니 개중에 내가 제일 인상 깊었던 물건만 몇 가지 소개하겠다. 07 | 위생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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