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김정연, <이세린 가이드>
<이세린 가이드>는 내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추천 글도 썼던 (보기) <혼자를 기르는 법>의 김정연 작가님의 두 번째 만화이다. 이 만화는 어디에서 웹툰으로 연재되지 않고 곧바로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이북이 따로 없다. 나는 한국에서 책을 어렵게 공수해 (의성단북 우체국 국장님 매번 감사합니다!) 읽었다. 오랜만에 종이책을 읽는데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 책이라 너무너무 설레고,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 블로그 포스트를 써서 올려야 하는 기한이 있으므로 느릿느릿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시간적 여유만 있었다면 조금 더 느긋하게 읽었을 텐데.
어쨌거나, 주인공 이세린은 우리가 음식점에서 흔히 보는 그 음식 모형을 제작하는 사람이다. 이 만화는 이세린의 일인극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세린 이외에 부모님, 친구, 선배, 후배 등 다른 인물들이 등장하기는 하는데 동시에 실제로 ‘만나’ 대화하는 경우는 극의 20% 정도이고, 나머지는 이세린의 독백 및 회상에서 그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음식 모형 제작이라는 일이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라 그렇기 때문일까. 이세린이 끊임없이 혼잣말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기억을 되살리는데 그게 전혀 지루하지 않다. 김정연 작가의 재능일 것이다. 나는 이분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배운다.
<혼자를 기르는 법>이 다소 우울하고 여성이 혼자 살기 힘든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잘 반영해서 보기 힘들다고 느끼는 분들도 <이세린 가이드>는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밝고 하하호호 하는 내용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이세린이 와플과 번데기 모형을 만들면서 큰오빠가 아들을 낳았을 때 할머니가 그 갓난아기의 손과 발, 그리고 ‘고추’ 조형물을 만들게 했다는 일화나 배추김치 모형을 만들면서는 집안의 모든 여자들이 동원돼 김장을 해야 하는 불공평한 관습, 차례상 모형을 만들면서는 엄마가 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 일할 사람이 없어지자 차례가 없어졌다는 사실까지, 여성 혐오적인 이 사회의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 이시다가 겪어야 했던 두려운 일과 비슷한 일도 한 번 일어나고. 나는 김정연 만화가 그런 점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가감없이 보여 주는 면이 참 좋다.
그래도 역시 김정연 만화의 최고 매력이라고 한다면 ‘와, 이런 표현을 어떻게 쓰지?’ 싶은 대사나 내레이션이 아닐까. <이세린 가이드>에서는 이런 표현들이 내 마음에 와서 박혔다.
어차피 가족이란 고를 수가 없는 것이니, 피차 서로에게 조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마치 놀이공원 내의 음식점들이 맛집일 필요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빛 바랜 간판, 빛 바랜 광고… 빛 바랜 자판기, 빛 바랜 현수막… 회색으로 바랜 도시. 가끔씩 궁금하다. 해는 그렇게 모든 색을 다 가져가서는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 그러다가도… 해가 피워낸 형형색색의 꽃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위에 두 오빠를 둔 나는 줄곧 고명딸이란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그럴 때마다 두 오빠는 메인이고 난 장식을 맡아 태어난 기분이라 싫었어.’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누군간 레코드를 녹음하고, 누군간 글을 게시하고, 누군간 기록을 재고, 누군간 출마를 하고… 또 누군간 자식을 낳기로 결심하고. 어떤 형태로든 각자의 방식으로 크레딧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게 틀림없다고.
게다가 나는 김정연 작가의 만화를 보다 보면 작가님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게 된다.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도 수족관 관리나 열대어 기르는 법, 햄스터 같은 다소 흔한 동물부터 도마뱀처럼 흔치 않은 동물 기르는 법이 등장인물들의 취미를 통해 표현되는데, <이세린 가이드>에서는 음식 모형 제작이라는 다소 마이너하고 유니크한 직업을 어찌나 철저하게 연구하셨는지 혹시 이 음식 모형 제작이 작가님의 본업 또는 취미가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다. 어떻게 매번 매 장(章)에 소개되는 음식 모형을 만드는 방법을 그렇게 꼼꼼하게 다 설명하고 알려 주시는지. 그리고 ‘1880년, 파리의 센강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변사체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탓에… 그녀의 데스 마스크를 장식으로 벽에 거는 것이 유행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곧 심폐소생술 실습용 모형의 원형이 되어 ‘애니’라는 이름으로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위의 잡학 상식을 만화에서 배우게 되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정말 너무 감탄스럽다. 역시 창작자는 지식과 생각이 많아야 자신의 작품에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더 말해 무엇하리.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김정연 작가님의 <이세린 가이드>를 정말 진심으로 추천한다. <혼자를 기르는 법>만큼 두껍지도 않고 음식 (비록 모형이긴 하지만)을 보는 것도 즐거우니 마음만 먹으면 하룻밤 만에 끝내는 것도 가능하다. 김정연 작가님의 만화에 푹 빠지는 기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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