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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샤넬 밀러, <디어 마이 네임>

by Jaime Chung 2023. 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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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샤넬 밀러, <디어 마이 네임>

 

 

2015년 1월 17일, 브록 터너는 스탠퍼드대에서 열린 파티에서 술에 취해 필름이 끊긴 샤넬 밀러를 성폭행한다. 다음 날, 샤넬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병원에서 깨어난다. 브록 터너는 경찰에 체포되고 법정에 회부되지만 고작 6개월 형을 선고받는다. 다행히 샤넬이 온 힘을 다해 써내려 간 피해자 진술서가 ‘버즈피드’에 게시되고 이는 큰 파문을 일으킨다. 만취해 정신을 잃은 여성을 성폭행한 대가가 고작 6개월이라는 결과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고, 이를 구형한 담당 판사는 파면당했다. 샤넬과 그녀를 비롯한 성폭행 피해자들에 공감하며 응원하며 그들과 함께 하겠다는 연대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디어 마이 네임>은 성폭행 이후 ‘에밀리 도’라는 가명으로 살아 오던 샤넬 밀러가 (미국 사법 체계에서 여성 성폭행 피해자는 신원 보호를 위해 ‘에밀리 도’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자신이 겪은 일을 솔직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담아낸 회고록이다. 책 뒤에는 샤넬이 쓴 피해자 진술서도 전문 번역되어 있다.

샤넬의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이 사회가 가해자에게 얼마나 관대한지, 어떻게 남성의 성(性)적 일탈 행위는 별것 아닌 것처럼 여기면서 피해자에게는 완전무결함을 요구하고, 여성은 비록 피해자여도 수치심을 강요하는지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성폭행범 브록 터너 본인은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뉘우치지 않았다. 형을 선고하는 재판에서 그는 ‘열 문장 길이의 뭉뚱그린 사과’를 읽으며 ‘학생들에게 알코올의 위험에 대해 교육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캠퍼스 내 음주 문화와 성폭력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게 분명했다. 게다가 그의 가족도 ‘20년 하고 얼마 안 되는 인생에서 20분의 행동에 대한 대가로는 너무 가혹’ 운운하며 뻔뻔하게 그를 옹호한다.

내가 제일 분노하는 게 그거다. 그가 수영 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성폭행을 저질렀는데 그 와중에 가해자가 미래가 창창한 사람이었다는 게 무슨 상관인가? 가해자의 잠재력은 큰 것으로 여기고 ‘이런 사소한 실수로 인생을 망칠 수 없다’라고 주장할 거라면, 피해자의 삶이 성폭행이 일어난 그 순간 끝이 나고 끝없이 고통 받아야 한다는 사실은 왜 고려하지 않는가? 피해자를 옹호할 때 쓰는 ‘전도유망한 청년(promising young man)’이라는 표현은 왜 피해자에게는 쓰이지 않나?(마고 로비 주연의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Promising Young Woman)>(2020)은 이 표현을 비틀어 제목을 지었다) 피해자의 삶은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아무리 잘났어도 성폭행을 저지른 순간 그냥 그자의 모든 업적이며 잠재력이 다 휴짓조각이 되는 건데. 그걸 범죄자들 옹호하는 데 쓰지 말라고!

기사 끄트머리로 내려가니 이런 문장이 있었다. 해당 여성은 병원에서 회복 중이다. 신입생인 터너는 세 번에 걸쳐 미국 대표 고등학교 수영선수로 선발되었고 자유형 두 종목에서 주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기록 보유자라는 표현이 병원 같은 단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지막 줄은 이렇게 끝났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미국 대표 선발대회에 참가했던 터너가 유죄를 선고받으면 최고 10년형을 받을 수 있다. 내 이름이 실린다면 그들은 뭐라고 말할까? 9시부터 5시까지 신입사원 수준의 일을 하는 샤넬은 런던에 가본 적도 없다. 이런 건 걱정거리도 아니었다. 저비스는 터너가 훌륭한 학생이자 훌륭한 선수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무척 비극적이고 그는 놀랍고도 놀라운… 나는 읽기를 멈췄다. 그가 어째서 훌륭하고, 훌륭하고, 놀랍고도 놀라운 사람이라는 거지?

그날 밤 나는 몇 가지가 사실임을 이해했다. 그 남자가 오크우드 팀을 이끌고 2년 연속 준우승을 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남자가 힘들게 모셔온 운동선수임을, 200야드 배영에서 2등을 한 우수한 수영선수임을 알게 되었다. 평영(breaststroke)에 대한 온갖 농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를 두고 손가락까지 핥을 정도로 맛있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진짜 트라우마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애지, 범죄자가 아니었다. 기량이 뛰어나지, 위험하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된 사람이었다. 나는 이런 일을 겪게 된 하찮은 존재일 뿐이었다.

오전 내내 가슴에서 지글거리며 포효하던 분노가 목구멍에서 죽어가는 몇 개의 장작으로 잦아들었다. 컴퓨터를 끄고 뒤로 몸을 기댔다. 어떻게 내 정체성이 한순간에 필름이 끊이고 강간당한 여자로 쪼그라든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의 롤모델도 될 수 없는, 기껏해야 조심하라는 교훈의 주인공이 될 사람. 누구든 잘못을 헤집자고 덤비면 나는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고 영원히 낙인찍히게 될 것임을 알았다. 나의 이런 부분은 잘라내버려야 했다. 이 모든 난장판을, 이 새로운 장애물을, 불확실한 미래를, 더럽혀진 정체성을 에밀리에게 떠넘겼다. 물 밖에 나와 숨을 쉬는데, 주주새, 헛소리 하고 말하는 친절한 목소리를 떨쳐버리는데 갈비뼈가 떨렸다.

 

둘째, 스탠퍼드대는 샤넬이 스탠퍼드대 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에 샤넬에게 적극적으로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다. 샤넬의 피해자 진술서가 미국 전역뿐 아니라 전세계에 퍼져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그제서야 스탠퍼드는 부랴부랴 그 사건이 일어난 곳, 즉, 쓰레기통 뒤편에 벤치를 만들고 명판을 세우기로 한다. 그러면서 그 명판에 들어가는 문구로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말랑말랑한’ 메시지를 제안한다. “나 여기 있어, 난 괜찮아, 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이 무슨? 스탠퍼드대는 캠퍼스 내 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스탠퍼드는 ‘감상적인’ 메시지 몇 개를 제안하고 샤넬이 이에 분노해 사건의 심각성을 제대로 표현하는 문구가 들어가야 한다고 하자 이를 거절한다. 이렇게 ‘체면’이 구겨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세계 정상급 대학이라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 그 대신 사과씨앗은 다음 인용구를 제안했다.

나 여기 있어, 난 괜찮아, 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이건 보기에 따라 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다. 아이러니와 부조리가 너무 명백했다. 이건 내가 가장 괜찮지 않았던 순간에 병원에서 나온 직후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 말은 내 경험을 압축하고 있었고, 나는 거의 승인할 뻔 했지만 당연히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터무니없게도 맥락이 완전히 지워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이 스탠퍼드에서 성폭행당한 사람 한 명당 정원을 한 개씩 조성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하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몇 천 제곱미터에 걸친 정원이 조성되지 않을까? 조경 작업 예약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까? 건조한 산비탈에 벤치가 흩어지고, 포장 재료들이 쌓이지 않을까? 모든 정원에는 이 동판이, 우리가 스스로에게 했던 이 거짓말이 새겨지겠지. 난 괜찮아, 다 괜찮아.

사과씨앗이 제안한 다른 두 인용구는 내 진술서 마지막 단락에 있는 문장이었다. 당신이 혼자라고 느끼는 밤, 제가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건 내가 희망 말고는 그 무엇에도 의지할 수 없던 때, 필라델피아의 고층 아파트에서 혼자 길러낸 깊은 희망의 장소에서 써내려간 말들이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이 말들을 썼다. 어떻게 지난 2년 동안 나를 내팽개쳐놓고는 다시 나타나서 이 말들을 가져갈 수 있단 말인가. 피해를 숨기기 위해, 그리고 이제는 빛나는 광채를 내세우기 위해. 나는 학생들에게 연대의 마음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내게 희망을 느낄 이유를 한 번도 제공하지 않았던 스탠퍼드에 희망의 말들을 내줄 수는 없었다. 나는 피해자들에게 거짓된 꿈을, 평온하고 눈이 반짝이는 존재를 팔아먹을 수 없었다. 당신이 혼자인 밤, 당신은 혼자다. 이 가운데서 어느 인용구가 좋은지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그때 손을 뗐어야 했는데’라는 말은 할 만큼 했다. 그 대신 나는 새로운 인용구를 보냈다. 당신은 나의 가치를, 나의 프라이버시를, 나의 에너지를, 나의 시간을, 나의 안전을, 나의 친밀함을, 나의 자신감을, 나의 목소리를 앗아갔습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사과씨앗은 이 인용구를 기밀 지원팀과 공유했다고 말했고, 그다음 문장은 감사하게 생각하지만이라는 말로 시작되었고, 그다음 단어는 이번에도 우려된다였다.

그녀는 이 인용구가 치유를 하기보다는 자극적이고 속을 뒤집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것 가운데서 고르거나, 아니면 좀 더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문구를 찾아달라고 말했다.

나는 생존자로서 회복의 복잡함에 대한 현실적인 관점을 제시할 의무를 느낀다. 내가 여기 있는 건 그가 캠퍼스에서 어질러놓은 난장판을 다시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저지른 일을 사회가 소화할 수 있는 치유의 말들로 마법처럼 바꿔놓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다. 나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등대, 당신의 정원에 만개한 꽃이 되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는 내 변호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기회가 될 때 언제든 (사과씨앗에게) 내가 인용구를 제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알려주세요.

 

이 책에는 가슴이 타들어가는 괴로움을 솔직히 표현한 구절이 많아서 무엇을 인용해야 할지 고르기가 무척 어려웠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샤넬이 어떤 심정으로 썼을지 생각하니 그냥 넘길 수 있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고르고 골라 조금만 보여 드리고자 한다. 아래는 피해자 진술서를 쓸 때를 회고하는 부분에서 가져왔다.

그날 밤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넌 자리에 앉아서, 그 모든 걸 다 느끼게 될 거야. 어둡고, 고약한 것들이 너에게서 슬금슬금 기어 나올 거야. 이미지가 다시 떠오를 거야. 모든 단계에서 느꼈던 불확실함과 고립감이 되살아날 거야. 속이 메슥거리고 슬플 거야. 이건 재밌지 않을 거야. 못하겠다는 기분도 느낄 거야. 하지만 해낼 거야. 해야만 해. 지금의 내가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 바퀴 달린 들것에서 깨어난 여자아이를 만나고, 그 아이가 서서히 진실을 알아가게 되는 동안 같이 손을 잡고 끔찍한 기억의 시간을 되짚어 가기 시작할 것이었다. 글을 쓰는 동안 얼굴이 구겨졌고, 큰 소리로 떠들기도 했고, 어느 때는 목의 피부가 팽팽해졌고, 혼자 중얼거렸고, 고함을 쳤고, 눈물로 시야가 흐려졌고,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벌떡 일어섰고, 자리에 털썩 앉았고, 원을 그리며 방 안을 걸어 다녔지만, 지금의 나는 계속 과거의 나에게 멈추지 말라고, 움츠러들지 말라고, 그냥 걸어서 통과하면 된다고 다독였고, 내 머릿속의 두 자아는 계속 걷고 또 걸었다. 현시점까지 온 힘을 다해 글을 썼고, 그러고 나서 멈췄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서로 포옹했고, 그러고 난 뒤 과거의 나는 사라졌다. 아침 7시였다. 나는 9시간에 걸쳐 두서없이 28쪽의 초고를 작성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평화롭게 자고 있는 루카스를 들여다보았다. 잠옷 바람으로 럭키참스 시리얼을 먹으면서 정적 속에서 내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옅은 노란 해가 건물을 물들이고 있었다. 저 아래쪽에서 작은 직사각형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멈추고, 사람들이 길을 건너는 모습이 보였다. 또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무사했다. 이야기가 나를 집어삼키지 않은 것이다.

 

아래는 샤넬이 쓴 피해자 진술서의 일부이다.

캠퍼스의 음주 문화라. 우리가 거기에 반대한다고요? 당신은 내가 지난 한 해 동안 무엇에 맞서 싸웠다고 생각합니까? 캠퍼스 성폭력이나 강간에 대한 의식이 아니라, 동의를 확인하는 법에 대한 교육이 아니라, 캠퍼스 음주 문화라니요. 잭 다니엘 타도. 스카이 보드카 반대. 사람들에게 음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면 금주 모임에 가세요. 음주상의 문제와 음주를 하고 난 뒤 누군가와 강제로 성관계를 하려는 게 다르다는 건 이해하시나요? 남자들에게 술을 적게 마시는 법이 아니라, 여성을 존중하는 법을 보여주세요.

음주 문화와 거기에 따르는 성적 문란함이라. 무슨 부작용처럼, 당신의 음식 주문에 딸려 오는 감자튀김처럼, 거기에 따르다니요. 문란함이 대체 어디서 끼어든 건가요? ‘브록 터너, 과음과, 거기에 따르는 성적 문란함이 유죄임’이라는 헤드라인은 보지 못했습니다. 캠퍼스 성폭력. 당신의 첫 번째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는 이것입니다. 믿어도 좋습니다. 당신이 발표 주제를 수정하지 않으면 내가 당신이 가는 모든 학교를 따라다니면서 보충 발표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말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하룻밤의 음주가 한 인생을 망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라고.

한 인생, 하나의 인생, 당신의 인생, 당신은 내 인생은 잊었군요. 내가 당신을 위해 문장을 손봐드리겠습니다. 사람들에게 하룻밤의 음주가 두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당신과 나. 당신이 원인이고 나는 결과입니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나를 이 지옥으로 끌고 들어왔고, 나를 그날 밤 속으로 다시 떨어뜨리고 또 떨어뜨렸습니다. 당신은 우리의 탑 두 개를 모두 쓰러뜨렸고, 나는 당신과 동시에 무너졌습니다. 내가 피해를 면했다고, 다치지 않고 살아남았고, 그래서 당신이 가장 힘든 타격으로 힘들어하는 동안 내가 햇볕이 쏟아지는 거리를 활보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승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큰 타격을 입었고, 우리 모두 이 모든 고통 속에서 일말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당신의 피해는 구체적이었습니다. 선수권과, 학위와, 입학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죠. 나의 피해는 내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내 안에 품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가치를, 나의 프라이버시를, 나의 에너지를, 나의 시간을, 나의 안전을, 나의 친밀함을, 나의 자신감을, 나의 목소리를 앗아갔습니다. 오늘 이 순간까지.

우리 두 사람 모두 아침에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점이 우리의 한 가지 공통점이죠. 나는 고통에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나를 피해자로 만들었습니다. 신문에서는 내 이름이 “의식불명의 술 취한 여성”이라는 열 개의 음절이고, 그뿐이었습니다. 한동안 나는 그게 나라는 사람의 전부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나의 진짜 이름을, 나의 정체성을 다시 익히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습니다. 그게 나라는 사람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익히기 위해. 당신은 일류 대학을 다니는 미국 대표 수영선수이고, 유죄가 증명되기 전에는 무죄이고, 걸려 있는 게 아주 많은 사람인 반면 나는 쓰레기통 뒤에서 발견된 남학생 사교클럽 파티의 술 취한 피해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인간이었고, 내 인생은 내가 쓸모가 있기는 한지 생각해내느라 1년 넘게 유예되었습니다.

 

샤넬이 성폭행을 당한 이후, 샤넬의 가족(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샤넬의 동생 티파니)는 물론이요, 티파니의 절친 줄리아와 줄리아의 어머니, 그리고 샤넬의 남자 친구 루카스까지, 너무나 많은 이들이 그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는 걸 내가 간접적으로 느꼈을 때는 숨이 헉 막힐 정도로 너무 괴로웠고 슬펐다.

줄리아 역시 의견서를 제출했는데, 주로 티파니의 변화에 대해 적은 글이었다. 이 역시 충격이었다. 영향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보다 더 널리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나의 고통을 개인적인 비구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진술서들을 읽다 보니 하늘 전체가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모든 피해를 활자로 옮겨 늘어놓으니 어마어마했다. 모두가 이 범죄의 피해자였다. 모두에게 각자의 이야기가 있었고, 모두가 각자의 문 뒤에서 남몰래 힘들어했다. 하늘이 개게 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 책의 원제는 <Know My Name: A Memoir(내 이름을 알아 두어라: 회고록)>인데 여기에서 ‘내 이름이 뭔지 똑똑히 기억해라’라는 강인함이 느껴진다면 번역하면서 <디어 마이 네임>이라고 옮긴 건 결국 되찾은 이름을 소중히하고 나 자신으로 살겠다는 부드러운 사랑이 느껴져서 좋다. 적당히 잘 옮긴 듯.

문장마다 샤넬이 느낀 고통과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져서 읽으면서 나도 마음이 힘들었지만, 이 책 자체는 정말 모든 이들이 한 번쯤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폭행이나 성추행 관련 기사에 피해자를 모욕하거나 조롱하는 댓글을 다는 이들이나, 애초에 그런 기사에 필요 이상으로 범죄의 세부 사항을 자세히 묘사하거나 피해자의 신원을 노출하는 기자들로 하여금 이걸 꼭 읽어 보게 강제해야 한다. 내 서평에 이 책을 읽고 느낀 모든 점을 다 담을 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다. 정말 강력히 추천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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