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키슬, <어리고 멀쩡한 중독자들>
15년간 알코올 의존증을 앓은 저자가 중독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어떻게 하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희망을 주는 수필이다.
이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초반에는 젊을 적에 어떻게 알코올 중독의 뿌리가 서서히 자라났는지를 묘사한다. 저자는 ‘고도 적응형 알코올 의존증’이었는데, 한마디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고 사회에 잘 적응한 듯 보이지만 실제 삶은 술 중독으로 얼룩진 상태”라고 한다. 그는 취한 어른들을 보며 술을 혐오했으나, 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술의 마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술과의 만남은 점점 긍정적으로 무르익어 갔다. 나는 술과 사이가 아주 좋아졌다. 술은 눈치를 많이 보고 쭈뼛대던 내게 새 친구를 소개해 주는 발 넓은 친구였다. 사람들과 연결돼 있음을 느낄 때마다 술에게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학의 음주 문화는 자유보다 방종에 가까웠다. 나와 친구들은 무서울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다. 어제 세 병 넘게 마셨다며 종일 숙취로 빌빌댄 선배는 저녁 술자리에도 어김없이 나타나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폭음했다. 한 친구는 늘 남자 친구의 등에 업히지 않고는 귀가가 불가능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어떤 선배는 스물세 살의 나이에 술을 마시다 피를 토하며 응급실에 실려 갔다. 엠티에서는 동기가 술에 취해 자다가 구토를 하는 바람에 기도가 막혀 죽을 뻔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분명 정상이 아닌 대학가의 술 문화를 나는 이상할 정도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번 즉각적인 만족감을 느끼면 철컥, 우리는 덫에 걸려든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해방감과 안도감에 도취된 나머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채지 못한다. 스무 살이 된 시점부터 나는 덫에 걸려들었지만 그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고, 가속 페달을 밟기까지 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중독 문제는 눈덩이처럼 몸집을 키워 나갔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 날이 늘었고, 골치 아픈 문제가 있을 때마다 담배에 불을 붙여 대니 하루에 한 갑을 비우는 일이 허다했다. 삶은 점점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찼다. 분명 열심히 살고 있는데 문제는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 아이러니 속에서 나는 빛을 잃어 갔다. 분명 무언가 잘못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저자는 또한 우울증을 진단받았고, 그때부터 식사량은 줄어들었으나 술을 마실 때에만 음식을 그나마 입에 댔다. 알코올 중독과 식이 장애가 한번에 같이 온 것이다.
그 시기의 나는 이미 술 없이는 잠들기가 힘들었고, 상당 수준의 갈망을 느꼈다. 눈 뜰 때부터 얼른 모든 일과를 마치고 술 마실 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인터넷에는 술이 빈 칼로리(empty calories)이기 때문에, 안주를 먹지 않고 술만 마시면 살이 찌지 않는다는 정보가 퍼져 있었다. 듣고 싶은 말을 찾아 헤매던 나에게 그 개념은 그야말로 오아시스나 다름없었다. 술, 마른 몸 둘 다 포기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찾았으니까! 사실 그 정보는 인체의 대사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단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한 것이었다. 빈 칼로리란 칼로리가 없다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 필요한 영양소가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 개념을 철석같이 믿으며 술자리에서는 안주에 거의 손대지 않았고 집에서는 종지에 김치 쪼가리나 시리얼을 한 줌 놓고 혼자 소주를 마셨다.
당시 사귀었던 연인과 헤어진 후에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는데, 간신히 눈을 떴을 때 의사는 “이대로 간 수치가 떨어지지 않으면 2~3일 안에 사망할 수 있다”라고 선언했다. 이 충격 때문에 잠시 술을 끊는 듯했으나 저자는 계속 술을 마셨다. 이 시기에 저자는 공부며 일을 스케줄에 꽉꽉 채워 넣고 많은 것을 성취하며 ‘봐, 알코올 중독자라면 이렇게 열심히 잘 살 수 없을 거야’라며 자신이 얼마나 멀쩡한 사람인지를 증명하려 했다.
진단을 부정하는 것으로 나의 긴긴 중독 여정이 시작됐다. 나는 학업에도 일에도 강박에 가까운 열정을 쏟아냈다. 중독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뭘 하든 좋은 성과를 내는 일이었다.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면 분명 자기 앞가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 테니, 뭐든 완벽하게 해내면 알코올 의존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 아닌가! 나는 ‘좋은 성과’에 집착하는 결과 지향적 사고방식을 갖게 됐다. 해야 할 일을 30분 단위로 적어 놓고 하나라도 지연되거나 건너뛰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완벽한 겉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운동에 쏟고, 음식을 조절했다.
그런 노력은 주변 사람들의 눈에 비친 나를 완벽주의자로 만들어 줬다. 학업이든 업무든 나는 기한을 어기거나 부족한 성과를 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사람들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도 아침이면 누구보다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를 보며 사람들은 감탄했다.
“역시. 술이 문제야? 사람이 문제지. 얘처럼 하면 술 좀 마신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 일도 열심히 해, 공부도 열심히 해, 심지어 그 와중에 몸매도 유지하잖아. 다 의지 문제라니까.”
이런 식의 엇나간 칭찬은 환자라는 낙인을 외면하려 갖은 애를 쓰는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 됐다.
책 중반에서는 실제로 알코올 의존증이 어떻게 자신을 갉아먹었는지를 고백한다. 위에서 말했듯 저자는 열심히 이것저것 성취함으로써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지만 ‘중독된 뇌’는 술병 때문에 출근을 미룰지언정 술 마시는 일은 절대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중독 뇌’는 다음 날 어떤 일이 있든 음주 자체는 양보하지 않으려 애썼다. 제발 한 병으로 끝내자고 다짐한 날에는 기어코 두 병을 마셨고,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금주하자고 생각한 날에는 더 많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응수했다. ‘중독 뇌’의 발악과 규칙 준수 사이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몸만 축내고 있었다.
‘중독 뇌’의 집요한 패악에 나는 새로운 대응 방식을 선택했다. 일정을 최대한 뒤로 미루고, 더러는 아예 취소해 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이어리에 빨간 취소 선을 그으면서, 이것이 내게 꼭 필요한 스케줄은 아니었다고 자위했다. 나는 규칙을 지키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사실은 일을 포기하고 마음껏 술을 마시기 위한 조작에 불과했다. 내가 세운 규칙을 지키면서 술도 마시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더 이상 일하지 않는 것이었다.
술이 인간을 끌고 내려갈 수 있는 바닥에 ‘끝’ 같은 건 없었다. 술을 끊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더 지독한 거짓말을 하다가 결국 나 자신마저 스스로에게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계속해서 술잔을 쥐고 있으면, 결국 도착하는 곳은 정해져 있다.
죽음이다.
저자의 ‘중독 뇌’는 결국 자신이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해내던 모든 일도 무너뜨렸다.
내가 주로 거짓말한 경우는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도저히 출근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망가진 상황이었다. 외근을 주로 하는 회사에 다닐 때는 존재하지도 않는 타 업체와의 오전 미팅이나 답사를 만들어 면피할 수 있었지만, 이런 호사는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이때 선택할 수 있는 거짓말은 뻔했다. 내가 아프다고 하거나 가족이 아프다고 하거나. 거짓말은 “병원에 들렀다 가겠습니다” 정도의 가벼운 내용으로 시작됐다. 숙취 때문에 늦게 일어나 부랴부랴 준비하면서 급한 대로 변명해 두는 것이다. 이런 거짓말은 큰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유발하지는 않았고, 정말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중독이 깊어지면서 뒤늦게 출근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날이 늘어 갔다. 출근하지 않으려면 더 큰 거짓말이 필요했다. 거짓말은 나의 수술, 가족 구성원의 입원, 친척의 죽음 등으로 점점 커졌다. 운전 중 사고가 났다거나 타이어가 펑크 났다는 거짓말은 애교 수준이었다. 남들은 차마 상상할 수 없을 이상한 핑계 역시 많이 만들어 냈는데, 지금껏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한 수치스러운 거짓말도 있다. 이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영원히 들려줄 수 없을 것이다. 술은 나를 거짓말쟁이에다 사기꾼, 허언증 말기로 몰아갔고, 기어이 일을 그만두게 했다.
게다가 저자가 사랑하는 이와 같이 살게 되자 알코올 중독을 속이기는 더욱 힘들어졌다. 남자 친구가 일하러 나갔을 때나 외출했을 때에만 술을 마시고 그 증거를 인멸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는 자신이 알코올 중독임을 사랑하는 이에게 밝혔고, 그는 자신이 도울 게 있으면 무엇이든 돕겠다며 저자를 다독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끊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후반은, 저자의 강연이나 유튜브를 모르는 상태에서 보면, 조금 당황스러울 수 있다. 저자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난 힘의 원천이 다소 ‘영성’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자는 계시라고 할지, 깨달음(epiphany)이라고 할지, 어떤 메시지를 받는다.
어떤 상태를 ‘정상’이라고 정의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정상적인 사람으로서의 나는 끝난 것이 자명했다.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더 이상 자기연민도, 자기혐오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계속 낮술인지 아침 술인지도 모를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 어떤 메시지가 떠올랐다. 목소리 같기도 하고, 형체 같기도 하면서, 정확한 실체는 없는 그 메시지는 이랬다.
‘네 영혼은 이제 죽었다.’
메시지는 명확했다. 사망 선고였다. 온몸이 쭈뼛 서는 서늘함을 느꼈다. 술을 마시기 시작한 뒤 나는 줄곧 헛것을 보거나 망상에 시달려 왔지만, 지금처럼 ‘메시지’를 받은 경험은 없었다. 공포가 일었다. 나는 이 감정에 익숙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더 많은 술을 마시고 완전히 취해 버린 것이다. 오후 내내 잠을 잤고, 자다 깨서는 이른 저녁 식사를 핑계로 곧장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때, 또다시 ‘그것’이 메시지를 보냈다.
‘네 영혼은 이제 죽었다. 네 목숨은 완전히 끝났다.’
나는 이미 죽는 것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또다시 사망 선고가 떨어지자 알 수 없는 설움이 복받쳤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됐고, 왜 죽어야 하는가? 내 영혼은 왜 사망 선고를 받아야 할까? 이렇게 될 때까지 나는 대체 뭘 한 거지? 나에게 죽음을 알리는 저 존재는 대체 누구인가?
온갖 질문이 나를 덮쳤고,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괴로움에 흐느끼며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술을 끊고 싶다고. ’술을 끊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10년을 훌쩍 넘겼지만 이제까지의 바람은 진심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나는 살고 싶다고.
이 메시지를 받은 다음 날, 저자는 남자 친구가 외출한 사이에 보드카를 사서 마시다가 어느 순간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는다는 걸 인지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망 선고 메시지를 받고 ‘여기서 한발짝만 더 떼면, 돌아오지 못하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는 걸 느낀다. 그가 선택한 행동은 반쯤 남은 보드카를 싱크대에 전부 버리는 것이었다.
빈 술잔에 다시 보드카를 따르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여기서 한 방울의 술이라도 더 마시게 되면 나는 이 지독한 연인과 영영 헤어지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여기서 한 발짝만 더 떼면, 돌아오지 못하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나는 다음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벼랑에서 내려와 삶을 선택할지, 벼랑 밑 연인의 품으로 떨어져 사망 선고를 현실로 만들지. 메시지는 선택을 독촉했다.
나는 보드카를 들고 싱크대로 갔다. 마개를 열고, 반쯤 남은 보드카를 전부 부었다. 말로만 떠들던 이별이 마침내 행위로 연결되는 순간이었다. 이어 냉장고에 남아 있던 술, 요리할 때 쓰겠다는 핑계로 보관했던 술, 선물 받은 술, 남자 친구가 잠들면 몰래 마시기 위해 옷장과 가방에 숨겨 둔 술까지 모두 꺼내 남김없이 흘려보냈다. 벼랑 아래에서 울고불고 매달리는 연인 앞에서 나는 최초의 단호함을 내보였다. 말뿐인 이별 통보가 아니었다. 2018년 9월 24일, 나는 정말로 술과 이별했다.
15년에 걸친 음주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소 영적인 경험이라 할 수 있는 ‘사망 선고’ 이야기나 알코올 중독에서 허우적댈 때에도 자신이 술을 완전히 끊은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는 저자의 말은 신비주의처럼 들릴 수 있다. 책 뒤 ‘에필로그’에 네빌 고다드라는 형이상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만 보아도 저자가 어떤 류의 영성을 추구하는지는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그것이 잘못되었다거나 사이비라고 주장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국내에도 이런 류의 영성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은 걸로 안다). 다만 이런 영성 콘텐츠에 익숙하지 않은 이가 본다면 다소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중독을 벗어난 이야기를 하랬더니 왜 무의식적 신념이니 뭐니 하는 말을 하는 거야?”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이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였으며 결국 이겨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같은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본다. 어차피 저자가 의사나 전문가의 말을 무시하라고 조언한 것도 아니고 사이비도 아닌데(저자는 “목숨이 위태로운 정도의 상황이라면 반드시 전문적인 치료를 병행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뭐 어떤가. 저자는 그냥 그 길을 걸어 본 사람으로서 ‘멘탈 코치’를 자처하는 것뿐이니까,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다고 본다. 정 자기랑 안 맞으면 그냥 책을 내려놓고 의사나 전문가를 찾아가면 될 일이다. 어쨌거나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 주고 당신은 할 수 있다고 해 주는데 거기에 침 뱉을 필요는 없잖아요?
알코올 중독뿐 아니라 그 어떤 중독이 됐든, 중독 문제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이 인용문을 전하고 싶다.
어떻게 다시 집으로 돌아왔냐는 질문, 그러니까 그렇게 심각한 중독을 끊어 내는 게 어떻게 가능했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15년의 어두운 세월을 떠올린다. 살아 온 인생의 절반가량 술을 마셨고, 마시는 동시에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 고뇌의 시간 1분 1초가 모두 내게 필요한 과정이었다. 시간의 잔해가 한 켜 한 켜 쌓이지 않았다면 나는 저 높은 곳에 위치한 회복이라는 깃발을 결코 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탕자에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그 길이 어딘지 알지 못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지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잘못 들어선 길이 늘어날수록 헤맬 확률은 줄어들고 새로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도 알게 된다. 어쩌면 의외의 곳에서 반가운 단서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집에 다 와 간다는 희망의 메시지 말이다.
술을 끊고 난 뒤에 만난 많은 사람이 비결을 물어온다. 그러나 내가 찾은 것은 ‘내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이지 다른 사람의 집을 가리키는 지도가 아니다. 탕자에게는 각자의 집이 있다. 그리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갈 방법은 자기 자신만이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하나의 길을 찾을 때까지 마음을 열고 가능한 한 전부 가 보라고 말한다. 지독하게 길고, 무척이나 힘들 것이다. 자주 지치고 많이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누구든 집으로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당신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거의 다 왔다. 당신의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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