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by Jaime Chung 2023. 2. 13.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한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장면이 있다. 가족의 구성원이 모두 식탁(의 3면)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요즘은 3대가 같이 사는 집도 흔치 않은 데다가, 모든 이들이 각자 바빠서 같이 한데 앉아 밥 먹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드라마는 아직도 오랜 관습처럼 모든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밥을 먹는 장면을 보여 준다. 그런 TV 드라마를 보며 나는 종종 생각했다. ‘이런 똑같은 이야기 말고, 좀 새로운 거 없을까?’

나는 그 ‘새로운 거’를 이슬아 작가의 <가녀장의 시대>에서 보았다. ‘작가의 말에서’에 저자는 이렇게 썼다.

이것은 제가 아직 본 적 없는 모양의 가족드라마입니다. 늠름한 아가씨와 아름다운 아저씨와 경이로운 아줌마가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지 궁금했습니다. 실수와 만회 속에서 좋은 팀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TV에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며 썼습니다. 작은 책 한 권이 가부장제의 대안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무수한 저항 중 하나의 사례가 되면 좋겠습니다. 길고 뿌리깊은 역사의 흐름을 명랑하게 거스르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쓰고 싶습니다.

<가녀장의 시대>는 정말로 늠름한 아가씨 (=딸) 슬아가 ‘가녀장’으로서 군림하며, 자신이 차린 낮잠 출판사의 직원인 두 직원, 즉 어머니 복희 씨와 아버지 웅이 씨와 가족으로서, 그리고 고용주-피고용인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나는 이 책을 현실에 기반을 두되 재미와 주제 강조를 위해 허구적인 요소를 많이 집어넣은 소설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슬아는 열심히 글을 써서 책을 냈고, 개인 출판으로 돈은 조금 벌었다. 그래서 집을 한 채 샀고, 모부님을 직원으로 고용한다. 웅이 씨는 청소 담당 및 개인 기사이고, 복희 씨는 요리와 출판사 메일 답장을 도맡아 한다.

 

슬아가 가녀장으로서 위엄을 뽐내는 다음 장면을 보시라.

한편 새집에서는 어수선한 이삿짐들 속에서 웅이가 일하고 있다. 그는 창 밖에 슬아가 주차하는 소리를 듣는다. ”집주인 왔다.” 웅이가 속삭이자 복희가 땀을 닦으며 내다본다. 비장한 음악과 함께 슬아가 등장한다. 그는 신발장 앞에서 모부에게 외친다. ”큰일하고 왔습니다.” 복희와 웅이가 입을 모아 말한다. ”축하드립니다.” 큰일을 마치긴 했으나 새집엔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다. 다 정리하려면 한참 걸릴 것이다. 슬아는 짐들 사이에서 네모난 간판을 찾는다. ”이것부터 박읍시다.” 낮잠 출판사의 간판이다. 슬아는 맘 편히 못질할 수 있는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했다. 현관 앞에 서서 위치를 정하고는 말한다. ”여기에 박아 주세요.” 가녀장의 지령이다. 웅이가 망치를 들고 오더니 벽에 꽝꽝 못질을 한다. 슬아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그것을 지켜본다.

 

나는 이 소설에서 보여 주는 전복적인 체제, 그러니까 가녀장의 모습이 너무 좋다. 재미있고 좋아 보인다. 나도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모부님(!)을 고용해서 부리며 살고 싶다. 어차피 나이 들어서까지 일해야 한다면 돈 조금 주면서 막 부리는 고용주보다는 믿고 따를 만한 가녀장인 내가 낫지 않겠는가. 모부님들은 딸 덕분에 고민 없이 편히 먹고 사실 수 있을 것이다. 슬아가 마감을 끝내고 당당하게 모부(!)가 있는 안방으로 가서 잘난 척하는 장면처럼.

고통의 밤을 지나 원고를 발송하고 난 뒤, 이슬아는 의기양양하게 안방으로 들어가서 말한다. ”모부들아, 난 다 썼다.”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던 모부는 건성으로 박수를 치며 말한다. ”대표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선 자기들끼리 중얼거린다. ”역시 성공한 애는 달라.” 이 대사는 그들 사이의 유행어다. 부지런함을 뽐내며 거들먹거리는 이슬아를 비아냥거릴 때 주로 쓰는 대사다. 이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들먹거린다. 글을 다 쓴 뒤엔 유능감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마감을 마친 작가들에게는 아드레날린이 돈다. 출판계에서는 그것을 마드레날린이라고 한다. 슬아는 마드레날린으로 약간 흥분해 있다. 그는 모부에게 시건방진 말투로 묻는다. ”당신들도 성공하고 싶어? 그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요가를 해.” 그러자 복희가 대답한다. ”아니. 우리는 성공 같은 건 하기 싫어.” 웅이도 대답한다. “맞아. 우리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슬아는 답답하다. ”당신들도 빚 갚고 집 사고 해야 할 거 아니야. 언제까지 내 집에 같이 살 수는 없어.” 복희는 대답한다. ”우린 집 안 사도 돼. 네가 내쫓으면 쬐그만 빌라 월세나 전세 얻어서 살 거야.” 웅이도 거든다. ”너는 성공해서 부자지만 우리는 아니잖아.” 복희가 슬아에게 묻는다. ”근데 우리 언제 내쫓을 거야?” 슬아는 고민하다 대답한다. “일 년 뒤?” 웅이가 놀란다. “그렇게 빨리?” 복희가 웅이에게 말한다. “자기야, 우리 저금 열심히 하자.” 웅이가 복희에게 중얼거린다. “우리가 잘하면 쟤 마음이 바뀔 수도 있어. 계속 같이 살게 해줄지도 몰라.” 복희도 웅이에게 중얼거린다. “맞아. 쟤는 바빠서 집안일할 팔자가 아니야. 옆에서 청소하고 밥 차리고 도와주는 사람 있어야 해. 게다가 쟤 된장국 없으면 밥 안 먹는 스타일이잖아.” 웅이가 슬아를 보고 말한다. “그냥 우리를 입주 가사도우미라고 생각해 줘.” 복희도 슬아를 보고 말한다. “일하는 아줌마랑 아저씨한테 방 하나 주는 셈이라고 쳐.” 슬아가 묻는다. “더 넓은 집에 따로 살고 싶지 않아?” 복희가 대답한다. “쓸데없이 넓어서 뭐해. 우리는 방에 이불이랑 테레비만 있으면 돼.” ”아무쪼록……” 중얼거린 뒤 웅이가 슬아에게 말한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들의 집에는 가부장도 없고 가모장도 없다. 바야흐로 가녀장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우리 집도 이렇게 화기애애한 가녀장의 현장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몇 년간 슬아는 놀라운 생산력으로 여러 권의 양서를 출간해 왔다. 슬아가 만든 책을 관리하는 게 복희와 웅이의 일이다. 해가 뜨면 모부는 각종 서점에서 들어온 도서 주문을 확인하고 발주를 넣는다. 재고도 파악하고 파본도 회수하고 독자 문의 메일에 답장도 쓰고 회계 장부도 적는다. 낮잠 출판사의 잡무를 모부가 맡아주는 덕분에 슬아는 창작에 집중할 수 있다. 사실 슬아의 능력은 어딘가 불균형적이다. 그는 훌륭한 작가지만 숫자에 취약하다. 0이 여러 개 붙은 금액을 잘 읽지 못한다. 백만 원을 천만 원으로 착각하여 심각한 실수를 저지른다. 그럼 복희와 웅이가 수군댄다. ”쟤 바보 아냐?” ”가끔 보면 좀 모자란 것 같아.” 대표에 대한 뒷담화는 안방에서만 이루어진다. 안방은 지하에 위치해 있다. 낮잠 출판사의 맨 아래층이다. 맨 위층에는 슬아의 고풍스러운 서재와 침실이 있다. 그 아래엔 출판사 사무실이 있고 더 아래엔 슬아의 옷방이 있다. 복희와 웅이의 공간은 가장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슬아의 공간들에 비해 어딘가 남루하다. 언젠가 웅이는 영화 <기생충>을 보다가 기시감을 느끼고선 중얼거렸다. ”우리집 구조랑 비슷하네.” 낮잠 출판사는 그다지 수평적이지 않은 직장이다. 집 구조도 위계질서도 수직적인 편에 가깝다.

 

이 소설은 ‘아버지’ 또는 부모와 자녀(딸)의 위계질서를 뒤바꿈으로써 우리에게 웃음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여 주면서 가부장제를 무너뜨릴 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는 웃으면서 글을 읽는 와중에 작가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의 모부님을 얼마나 잘 알고 또 얼마나 많이 대화를 나누었을지가 머릿속에 그려져서 더욱 감탄했다. 생각해 보시라.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모델이 되는 인물들이 눈앞에 있는데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로는 글을 이끌어나갈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이슬아 작가가 전작들에서 모부님과 조모부님을 인터뷰하며 그들의 삶에 많이 배웠기에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소설 속 ‘복희 씨’와 ‘웅이 씨’를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모부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이런 전복적인 소설에 모부님의 성함을 들먹이며 등장시킬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런 문단들을 마주칠 때마다 모부님과 정말 사이가 좋구나, 서로 많이 사랑하는구나 느꼈고 참 부러웠다.

세 번의 출장을 마치고 나면 복희는 된장과 함께 돌아온다. 출판사 현관에 들어서는 복희의 얼굴은 피로와 보람으로 가득차 있다. 그를 위한 출장 수당은 몹시 지당할 것이다. 슬아는 지체하지 않고 복희 계좌로 보너스를 입금한다. 그럼 낮잠 출판사 부엌에 된장이 넉넉히 쌓인다. 슬아는 삶의 여러 노동을 집안 어른들에게 의탁하며 살아간다. 노동의 대가를 돈으로 지급하지만 어떤 것들은 돈 주고도 사기 힘든 노동이다. 슬아는 개미처럼 글을 쓰면서도 된장은 담글 줄 모른다. 복희는 글을 쓸 줄은 알지만 그걸 하느니 차라리 된장을 담그겠다고 말할 것이다. 복희의 엄마 존자는 된장 담그기에 도가 텄지만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 각자 다른 것에 취약한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로 살아간다. 복희가 죽으면 어떡하지? 그것은 슬아의 오랜 질문이다. 복희는 영원히 살지 않을 텐데, 복희가 죽으면 된장은 누가 만들 것인가. 중년이 된 슬아가 노년의 복희로부터 된장을 전수받을 것이다. 아니면 마트에서 파는 된장을 사먹으며 엄마와 외할머니를 그리워할 것인가. 그러다 목이 메어 눈물을 훔칠 것인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삼십대의 슬아는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로 글을 쓰고 있다.

시트콤 소설이라 불러도 될 이 소설은 유쾌하고 혁명적으로 전복적이며, 때때로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이슬아 작가가 자신의 모부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깊이 탐구하고 배웠듯이, 나도 가녀장으로 살면서 우리 모부님에 대해 더 알아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새로운 형태의 가족 형태를 보고 싶거나, 재미있는 현대 소설을 찾으시는 분들께 권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