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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켄지 요시노, <커버링>

by Jaime Chung 2023.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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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켄지 요시노, <커버링>

 

 

저자인 켄지 요시노는 일본계 미국인으로, 로스쿨 교수이다. 나는 그가 이전에 쓴 <셰익스피어, 정의를 말하다>를 읽고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법의 관점에서 이렇게 볼 수도 있구나 감탄한 기억이 있다. 법과 문학이라니! 신선한 시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작년 말에 한 뉴스레터였나, 어딘가에서 <커버링>이라는 책을 썼다는 이야기를 읽고 바로 검색에 들어갔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커버링’은 소수자들이 자신의 소수성을 감추기 위해 하는 행동을 말한다. 어빙 고프먼이 <스티그마: 장애의 세계와 사회 적응>이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도입한 개념이다.

자신에게 가해진 낙인을 (많이 알려졌거나 금방 눈에 띄기 때문에)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사람들도 사실은 그 낙인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커버링이라 부르고자 한다.

소수자들이 주류에 ‘동화(同化)’하기 위해 하는 행동으로는 ‘패싱’과 ‘커버링’이 있는데, ‘패싱’은 예컨대 커밍 아웃 하지 않은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커버링’은 이미 커밍 아웃 한 동성애자가 ‘과하게’ 동성애자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동성애자다운 행동, 예를 들어 자신의 동성 파트너의 손을 잡거나 동성 파트너에게 입을 맞추는 행동 등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커버링’을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여성? 성 소수자? 인종적 소수자? 답은 ‘누구나’이다. 저자는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누구나 커버링을 한다. 커버링이란 주류에 부합하도록 남들이 선호하지 않는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는 것이다. 점점 다양화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주류에서 벗어나 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주류로 보여야 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커버링을 해 왔고, 개인적으로 큰 희생을 감수한 적도 있을 것이다.

유명한 커버링 사례들은 넘쳐 난다. 영화배우 라몬 에스테베스(Ramón Estévez)는 마틴 신(Martin Sheen)으로 개명해서 자신의 민족적 배경을 커버링했다. 영화배우 크리슈나 반지(Krishna Bhanji) 역시 같은 목적으로 벤 킹슬리(Ben Kingsley)로 개명했다.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영국 수상은 발성 코치에게 목소리 음색을 낮추는 훈련을 받음으로써 여성이라는 성별을 커버링했다. (…)

이들 중 커버링이 좋아서 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낙인찍힌 정체성으로 살아가려면 그 정체성의 표현을 자제하라는 부당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을 터다. 마틴 신은 ‘상업적으로 일하기 위해 대중이 발음하기 쉽고 친숙한 이름을 쓸’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결정을 후회하면서 아들 에밀리오(Emillio)와 찰리(Charlie)에게 본래 성(姓)을 사용하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두 아들 중 한 명은 아버지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 커버링을 강요하는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장면이다.

이른바 계몽됐다는 이 시대에, 이러한 커버링 요구가 지속되는 것은 수수께끼다. 오늘날의 미국 연방 민권법들은 인종, 출신 국가, 성별, 종교, 장애를 모두 보호하고 있다. 성적 지향을 민권법에 포함시키는 주와 지방도 차츰 늘어나고 있다. 확신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미국인들은 인종, 성별, 장애, 종교 등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 합의는 차이의 표현을 자제하라는 요구를 받는 개인들까지 보호하지는 않는다. 왜 민권 혁명이 커버링 앞에서 멈추었는지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

커버링은 민권에 대한 보이지 않는 공격이다. 커버링은 동화주의라는 상냥한 언어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오늘날 많은 집단이 커버링을 통해 억압받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종적 소수자들이 ‘백인처럼 행동’하도록 압박받는 이유는 백인 우월주의 때문이다. 여성들이 직장에서 양육 책임을 부각시키지 말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가부장제 때문이다. 그리고 동성애자들에게 ‘티 내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동성애 혐오 탓이다. 이러한 커버링 요구가 계속 존재하는 한, 미국의 민권은 완성될 수 없다.

 

저자는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그리고 게이 남성으로서 본인이 하려고 노력했던 ‘커버링’ 시도들을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자신이 아는 주변 여성의 경우를 통해 여성의 ‘커버링’ 시도도 이해하고 그 외에 다른 마이너한 정체성들의 예시도 다양하게 들면서 이것들이 어떻게 인권 이슈인지를 설명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대부분의 노동자는 직장에 들어설 때 자녀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포기의 정도는 성 중립적이지 않다. 혹실드는 한 대기업을 연구하면서, 고위직 남성 임원은 책상 위에 자녀 사진을 일상적으로 전시해 두지만, 여성 관리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 학위증과 상장을 전시하길 선호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한 여성 관리자가 말했다. “경력을 관리하는 여성들은 함께 일하는 남성들에게 ‘나는 어머니나 아내가 아니라 동료입니다.’라고 밝히기 위해 의식적인 노력을 합니다.”

워킹맘은 역커버링도 요구받는다. 사회학자 신시아 엡스타인(Cynthia Epstein)은 로펌이 커버링을 너무 잘하는 것에 대해서도 여성들에게 죄책감을 주입한다고 설명한다. “여러 변호사들이 여성의 최우선 순위는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뉘앙스의 말을 자주 합니다.” 혹실드는 남성들이 다른 남성에게보다는 여성에게 자녀에 대해 끊임없이 묻거나 또는 “집을 집답게 만들려면 주택 담보 대출금을 갚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지.”라는 식의 비수를 꽂는 지적을 하며 전문직 여성에게 “어머니 정체성”을 속박시킨다는 점을 논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명확하다. 그 누구도 100% ‘주류’일 수는 없으니, 그 누구도 ‘커버링’을 할 필요가 없도록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거다. 그럼 본인도 본래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질 테니 얼마나 좋은가.

민권은 반드시 새롭고, 보다 포용적인 단계로 올라서야 한다. 그것은 주류가 허구임을 인식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가 주류다.”라는 문장에서처럼 특정 정체성에 관해서는 ‘주류’라는 단어가 말이 된다. 그러나 총칭해서 사용되면 이 단어는 의미를 상실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류는 유동적인 연합체이며, 우리 중 누구도 완전한 주류에 속하지는 않는다. 퀴어 이론가들이 인식했듯이 완벽한 정상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표현을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커버링을 하는 자아가 있다.

민권 신장을 인간의 번영이라는 보편적인 과업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민권 운동은 비합리적인 믿음으로 인해 좌절을 겪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번영을 지키고자 항상 노력해 왔다. 하지만 이 열망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더글라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중 한 문장을 인용한다면, “분위기 전환도 할 겸 타인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얼마나 멋지겠느냐고 말했다는 죄목으로 한 남자가 나무에 못박힌 지 거의 2000년이 지난 후”에도 아직 인간이 서로를 대하는 수준이 이 정도라는 게 안타깝다. 엄청 어렵거나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 책은 아니지만 문제의 중대성 때문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그래도 읽어 봄직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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