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KC Davis, <How to Keep House While Drowning>
여러분은 일상적으로
- 요리
- 청소
- 빨래
- (아이나 어르신 등) 돌봄 노동
- 개인 위생 활동(이 닦기나 샤워하기 등)
등을 하나요? 혹시 ADHD나 우울증 등 정신과적 문제를 겪고 있나요? 또는 일이나 학업 때문에 위에서 언급한 이런 일들을 할 시간이 없다거나 너무 벅차다고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이 책이 필요합니다!
이 책은 내가 평생 읽은 집안일 또는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관한 책 중에서 제일 현실적이고 제일 실용적이다. 이 책은 집안일과 독자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야를 완전히 바꾸어 준다. “익사하는 동안 집안일하기”는 정말로 산다는 게 익사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이들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팬데믹으로 인한 락다운이 시작할 즈음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산후 우울증과 ADHD와 싸우며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느라 번아웃이 올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본업이 카운슬러인지라, 그녀는 나름대로 익사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집안일들을 처리해 나가는 법을 깨닫는다. 그것은 바로 집안일을 바라보는 시야를 바꾸는 것이다.
저자는 ‘게으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본인이 두 아이를 키우면서 힘들어해 봤고, 그래서 집안일을 정말 잘하고 싶어도 할 기운이 없고 해야 할 일 목록에 압도당하는 기분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 사실, 나는 게으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아는가? 행정 기능 장애, 미루기, 압도되는 기분, 완벽주의, 트라우마, 무동기(無動機), 만성 통증, 피로, 우울증, 기술 부족, 지원 부족, 그리고 다른 우선순위가 존재한다.
ADHD, 자폐증, 우울증, 외상성 뇌손상, 그리고 양극성 장애와 불안 장애는 행정 기능, 계획 세우기, 시간 관리, 작동 기억, 그리고 준비를 더욱 어렵게 하며, 겁을 주거나 지루한 단계를 가진 과제들이다.In fact, I do not think laziness exists.
You know what does exist? Executive dysfunction, procrastination, feeling overwhelmed, perfectionism, trauma, amotivation, chronic pain, energy fatigue, depression, lack of skills, lack of support, and differing priorities.
ADHD, autism, depression, traumatic brain injury, and bipolar and anxiety disorders are just some of the conditions that affect executive function, making planning, time management, working memory, and organization more difficult, and tasks with multiple steps intimidating or boring.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것은 따라야 할 ‘프로그램’ 또는 단계가 아니라 ‘철학’이다. 그 철학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어떤 공간을 모시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공간이 당신을 모시는 것이다(You don’t exist to serve your space; your space exists to serve you.)” 설거지나 집 청소, 빨래를 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제일 뿐이다. 그것을 당신이 하거나, 못 하거나, 잘하거나, 잘하지 못하거나는 당신이란 사람이 얼마나 좋은(good enough) 사람인지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을 듣고 뒷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한 충격을 느꼈다. 뭐라고? 내가 집안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나란 사람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는 사실이었다. 사용하고 난 그릇들이나 입고 난 옷들이 어떤 의지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자기네들을 씻어 주든 말든 걔네가 무슨 판단을 내리겠는가. 빨강이나 파랑 같은 색은 그냥 색일 뿐, 인간이 거기에 ‘이건 여자 색, 이건 남자 색’ 하고 딱지를 붙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따라서 내가 예컨대 청소기를 돌리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거나 덜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이 단순하지만 놀라운 진실에 나는 감동했다.
저자는 집안일을 완전히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기능’에 집중함으로써 집안일을 보는 시야를 바꾸라고 말한다. 예컨대, 방바닥을 쓸고 닦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야 남이 보기에 좋아 보이니까? 아니다. 방바닥이 끈적끈적하거나 쓰레기 또는 먼지로 뒤덮여 있으면 걸어다니기 힘들고 불쾌하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물건을 밟거나 넘어져서 다칠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방바닥을 청소하는 일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해 주는 일이 된다. 부엌 싱크대를 생각해 보자. 부엌 싱크대의 목적 또는 기능은 사용자가 요리를 준비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점을 알고 있다면 나는 부엌을 반짝반짝 빛이 날 정도로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부엌 싱크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싱크대에 쌓인 그릇을 설거지하거나 식기 세척기에 넣고, 쓰레기를 치우고, 전자렌지 위를 닦는 등의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완벽한 부엌’이라는 생각은 추상적이지만 부엌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ADHD, 자폐 스펙트럼 장애, PTSD, 우울증 등의 장애가 있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아도 시작하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럴 때는 다음의 방법들을 한번 시도해 보시라.
- 첫째, 음악을 이용해 볼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발을 꼼지락거리면 작은 움직임이 시작된다. 조금 더 나아가 음악에 맞춰 팔다리를 움직일 수 있고, 거기서 또 조금 나아가면 앉아서, 또는 일어서서 춤을 출 수 있다.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면 가속도가 붙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쉽다.
- 아니면 모든 걸 한 번에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5퍼센트의 에너지가 있다면 집안일의 5퍼센트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은 부분적으로나마 할 가치가 있으니까(Anything worth doing is worth doing partially).’
-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기다리는 동안 재빨리 집안일 하나를 해치울 수도 있다. 예컨대,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그걸 기다리는 동안 재빨리 청소기를 돌리는 것이다. 배달 음식이 도착할 때까지만 하면 되니까 부담도 덜하다.
- TV나 오디오북, 팟캐스트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즐기는 동시에 집안일을 할 수도 있다. 우리 어머니가 흔히 하셨던 대로, TV를 보며 빨래를 갤 수도 있고(이거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이 있을까?), 오디오북이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이를 닦거나 샤워를 할 수도 있다.
- 혼자 하기보다는 친구 또는 가족과 같이 해 보라. 같이 일을 해 줄 상대가 여의치 않다면 (그리고 본인이 전화 통화를 좋아하는 경우) 전화 통화를 하면서 집안일을 할 수도 있다. 그냥 누구와 같이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적 부담이 덜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또 두 번째로 감동받은 부분은 이것이다. 15장의 제목은 ‘당신이 우울하다면 우림을 지킬 수 없다(You can’t save the rain forest if you’re depressed)’인데, 하루하루를 살아내기가 힘겹다면, 일단 자신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어서든, 직장 일이 너무 힘들어서든 간에 개인으로서 기능하기가 힘들다면 중요한 것은 재활용이나 환경 보호가 아니다. 스스로 끼니를 챙겨 먹기 힘들다면 그게 비건식이든 아니든, 생태계 보존에 도움이 되든 안 되든 일단 당신은 먹고 봐야 한다. 소고기든 패스트푸드든 일단 당신의 몸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무엇이든 먹어라. 당신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면 지속 가능성을 따질 때가 아니다. 오해 마시라. 환경 보호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저자도 나도 그런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실질적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데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이다. 일단 개인이 건강해야 그다음에 재활용이니, 패스트 패션 줄이기니, 윤리적인 소비니 하는 것을 신경 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 최우선이다.
그 누구도 언제나 선한 일을 할 수는 없으며 그러기를 기대하는 것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억압적인 완벽주의를 낳을 뿐이다.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불완전할 필요가 있다.
No person can do all the good things all the time and expecting yourself to just sets up an oppressive perfectionism to which no one can live up. Imperfection is required for a good life.
이 말에 정말 100% 공감한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이자 미덕은 독자를 배려한다는 점이다. 신경 발달 장애가 있는 독자들 위해 산세리프 폰트에 왼쪽 맞춤 되어 있으며, 문단과 각 장(章)은 짧은 편이다. 정 급하면 요지만 읽어도 되도록 굵게 처리되어 있다. 알쏭달쏭한 비유도 없고 해석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여지가 없도록 언어를 가능한 한 단순하고 평범하게, 쉽게 표현한다. 책을 일단 핵심 요약 정리부터 읽고자 하는 독자들을 위해 ‘요약본을 원하는 독자는 이 장이 끝나면 n장으로 가세요’라며 친절하게 안내까지 해 준다. 저자 본인이 산후 우울증과 ADHD로 고생해 보았기에 비슷한 문제로 힘들어할 독자들을 이렇게까지 배려해 주는구나.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읽은 책 중 이 정도의 배려심을 보인 책은 처음이었다.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좋은 책이 왜 아직까지 국내에 정식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신경 발달 장애가 있는 독자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없는 것도 아닌데. 이 책은 짧으면서도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조언들로 가득하니 이거야말로 국내에 들여오면 정말 대박이 날 거다. 나도 다시 한 번 읽을 의향이 있다. 만약 이 글을 출판사 관계자분이 읽고 계시다면 이 책의 판권을 사서 번역해 보시는 건 어떨지 제안드립니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유로워지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강력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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