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에밀리 헨리(Emily Henry), <북 러버스(Book Lovers)>
⚠️ 이 글에서 언급하는 ‘트로프’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은 이 글을 참고해 주세요.
이런 이야기를 상상해 보시라. 남자 주인공은 어떤 대기업의 직원으로, ‘큰 건’을 맡아 미국 어떤 주의 작은 마을에 출장 발령이 난다. 그가 맡은 일은 자신이 일하는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그곳에 있는 소상인을 밀어내는 일이다. 예컨대 그 대기업이 호텔을 운영한다면, 이 마을에 고급 호텔을 짓기 위해, 이미 망해 가고 있는 그 지역 토박이 가족들이 운영하는 작은 호텔을 매입하는 게 그의 임무가 될 것이다. 자신의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또는 승진하기 위해 그는 이 일에 몰두하지만, 어쩌다 보니 이 지역 출신 사랑스러운 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소박하지만 예쁘고, 돈이나 야심보다는 ‘마음’을 더 소중히 여기는 아가씨. 이 아가씨는 90%의 확률로 남자 주인공이 무너뜨려야 하는 소상인의 딸이다. 그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에 대한 충성심과 ‘금전적 이익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라는 양심의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그는 이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에서 ‘인간답게’ 마을 이웃들과 하하호호 하며 행복하게 살기로 결심한다. 그 마음씨와 얼굴 모두 고운 아가씨와 이어지는 건 물론 덤이다(아예 꽉 닫힌 해피 엔딩을 위해 결혼할 수도 있다). 크리스마스용 넷플릭스 영화에 어울릴 법한 이야기다. 너무 뻔하고 뻔해서 이미 이런 영화를 여러 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가.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이런 남자 주인공이, 소박한 시골 아가씨와 사랑에 빠지기 전 원래 여자 친구가 있었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아마 여자 주인공과의 가장 극적인 대조를 위해 도시 출신이고, 세련되고 비싼 옷만 입으며, 사랑보다는 일을 선택하는 커리어 우먼일 것이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냉정하고, 아마 남자 주인공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는 그런 여자. 어쩌면 아이를 싫어하고 아이를 가질 생각이 전혀 없어서 남자 주인공 입장에서는 ‘내 아이의 어머니’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는 그런 여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골보다 도시를 더 사랑하고, 남자보다 자기 일을 더 소중히 여기며,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일인가? 그게 잘못된 존재 방식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나? 남자 주인공의 사랑 이야기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기 위해 이용되는 이 ‘커리어 우먼’, 또는 ‘도시 여자’에게도 감정과 생각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삶을 살아 왔을까? 그녀도 ‘해피 엔딩’을 누릴 자격이 있을까? 바로 이런 궁금증이 저자 에밀리 헨리로 하여금 이 소설 <Book Lovers>를 쓰게 한 단초였다.
우리의 주인공 노라 스티븐스는 위에서 내가 말한 이야기 속 남자 주인공의 ‘원래 여자 친구’ 같은 사람이다. 그녀는 뉴욕에 사는 저작권 대리인으로, 자기 일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직장에서는 ‘상어(shark)’로 통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남자 주인공을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입고 있는 옷이 얼마짜리인지 바로 스캔해서 알아낼 정도로 고급스러운 옷에 일가견이 있으며,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실내 자전거를 타면서 스트레스를 푼다. 일밖에 모르는 커리어 우먼 같아 보이는 그녀는 놀랍게도 지난 몇 번간 남자 친구들에게 똑같은 이유로 차였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처럼, 남자 친구들이 작은 마을의 소박한 아가씨와 정분이 나서 ‘차갑고 일밖에 모르는 도시 여자’인 노라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차일 때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고, 네가 사람인 건 맞느냐는 타박을 듣는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유일한 약점이 있었으니,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후 유일하게 의지해 온 여동생 리비이다. 리비가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노라는 본인도 학생이면서 밤낮 없이 이런 일 저런 일 가리지 않고 투 잡을 뛰었고, 졸업 후에는 편집자가 되고 싶었고 또 그럴 만한 능력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돈을 많이 벌기 위해 편집자보다는 저작권 대리인의 일을 택했다.
어느 날, 노라는 남자 친구 제이콥에게 차이고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서 차분하게 (그리고 노라 스티븐스의 역사상 처음으로 늦게) 약속 장소에 나타난다. 약속 상대는 다른 출판사 소속 저작권 대리인 찰리 라스트라. 업무적인 이야기를 하러 만났지만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 더스티의 신작이 마음에 안 든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벌써 이 남자가 마음에 안 든다. 게다가 그의 말투가 냉랭하고 톡 쏘기까지 하니 이야기를 더 해서 무엇하나 싶고, 그래서 그날의 업무 미팅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만다. 얼마 후, 리비가 노라에게 ‘셋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 좀 쉴 겸 자매끼리 여행을 가자’고 제안한다. 휴가 따위 체질이 아니지만 요즘 들어 리비가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느낌, 무언가 비밀이 있는 느낌이 들어 불안해진 노라는 리비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같이 4주간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선샤인 폴스(Sunshine Falls)’란 도시로 휴가를 떠난다. 자신이 담당하는 작가 더스티가 쓴 베스트셀러 소설 ‘Once in a Lifetime’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곳에서 노라는 우연히 찰리를 다시 만나는데… 이 정도가 소설 초반의 줄거리이다.
이 책의 매력이자 재미 포인트는 흔한 ‘트로프’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한다는 점이다. 일단 내가 위에서 설명했듯 주인공 노라 스티븐스의 캐릭터가 그렇고, 노라와 리비의 성격이 완전히 딴판인 것도 ‘성격이 다른 형제자매’ 트로프이다.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첫 만남부터 서로를 싫어하는 건 아주 고전적인 ‘loathe at first sight’ 트로프이며, 노라와 리비가 ‘작은 마을’로 휴가를 가는 것도 트로프이다. 리비가 노라에게 휴가 기간 동안 하고 싶은 일을 목록으로 쭉 적어서 제시하는데 거기에 있는 항목을 결국 다 해내는 것도 트로프라고 볼 수 있겠다. 주인공들이 저작권 대리인들이라 트로프를 들 잘아서 자신들이 맞닥뜨리는 트로프에 대한 메타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재미의 일부이다. 예컨대 이런 부분.
(남자 친구 제이콥에게 차인 후)
그리고 바로 그게 내가 이 점심 미팅에 늦은 이유다.
그게 내 인생이니까. 내 나날들을 지배하는 트로프이니까. 내 세부 사항에 덧씌워진 원형(原型)이니까.
나는 도시 사람이다. 섹시한 농부를 만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다.
고요한 해변 사진을 띄우는 스크린 세이버가 눈에 띄지 않고 컴퓨터 스크린에 흘러가는 동안 실내 자전거 위에서 원고를 읽는, 깐깐하고 매니큐어를 바른 문학 저작권 대리인.
나는 차이는 쪽이다.
And that’s why I’m running late to this lunch meeting.
Because that’s my life. The trope that governs my days. The archetype over which my details are superimposed.
I’m the city person. Not the one who meets the hot farmer. The other one.
The uptight, manicured literary agent, reading manuscripts from atop her Peloton while a serene beach scene screen saver drifts, unnoticed, across her computer screen.
I’m the one who gets dumped.
(남자 주인공 찰리 라스트라와의 첫 만남에서)
나는 그가 마음에 안 든다. 내가 ‘도시 사람’의 원형이라면 그는 음침하고, 설득할 수 없는 벽창호이다. 그는 으르렁거리는 인간 혐오자, 불평꾼 오스카, 2막의 히스클리프, 나이틀리 씨의 가장 나쁜 부분이다. I do not like him. If I’m the archetypical City Person, he is the Dour, Unappeasable Stick-in-the-Mud. He’s the Growly Misanthrope, Oscar the Grouch, second-act Heathcliff, the worst parts of Mr. Knightley.
그리고 여자 주인공과 남자 주인공이 티키타카가 잘되어서 서로 재치 있는 대화(banter)를 주고받는 것도 재미있다. 이런 대화를 어떻게 생각해 내는지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다.
“자신이 크루엘라 드 빌이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영감을 준 사람이라는 걸 깨달은 여자치고 꽤 만족한 것 같아 보이는군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찰리는 눈을 굴렸다. “그러지 말고, 마티니 한 잔 사죠. 아니면 강아지 털로 만든 코트나.”
“You seem pretty pleased with yourself,” he says, “for a woman who just found out she was the inspiration for Cruella de Vil.”
I scowl at him. Charlie rolls his eyes. “Come on. I’ll buy you a martini. Or a puppy coat.”
“뭐, 어찌 됐든, 오늘 밤이 되기 전까지 난 당신이 일하지 않을 때는 청소도구함에 들어가서 ‘에너지 절약 모드’에 돌입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둘 다 놀랐나 보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가 말했다. “내가 일하지 않을 때 나는 오래된 빅토리아풍 대저택의 지하실에 있는 관에 들어가 있다고요.”
나는 내 잔에 대고 코웃음을 쳤는데, 그걸 보고 그가 인간다운 진짜 미소를 지었다. 살아 있네, 하고 나는 생각한다.
“Well, for what it’s worth, before tonight, I assumed you went into a broom closet and entered power saving mode whenever you weren’t at work, so I guess we’re both surprised.”
“Now you’re being ridiculous,” he says. “When I’m not at work, I’m in my coffin in the basement of an old Victorian mansion.”
I snort into my glass, which makes him crack a real, human smile. It lives, I think.
개인적으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여기. 자기 같은 여자가 ‘악역’으로 자주 그려진다는 걸 알고 또한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 생각하는 노라에게 남자 주인공이 위로해 주는 장면이다. 내 개인적인 경험이 덧대어져 더 울컥했던 것 같다.
“노라.” 그는 내 턱에 손을 대어 살짝 들어올린다. “당신의 예전 남친은 당신을 망할 황무지에 홀로 버려 놨고, 노라 당신은 최선을 다했어요. 당신은 그의 이야기에서 악당이 아니에요. 악당은 그 자신이지. 그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라, 당신이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쪽이 된 그 순간 당신과의 관계에서 퇴장했기 때문에요.”
“Hey.” He touches my chin, lifts it. “Your ex left you in the fucking wilderness, Nora, on your own, and you did your best. You’re not the villain in his story. He is—and not because he fell for someone else, but because he exited your relationship the second you were the one who needed something.”
이 책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어 출판되지 않았기에(아직까지는 같은 저자의 <People We Meet on Vacation>만이 <우리의 열 번째 여름>이란 제목으로 정발돼 있다) 영어 오디오북으로, 대체로 일할 때만 듣느라 끝내는 데 약 3주나 걸렸다. 하지만 재미가 있었기에 그럴 시간을 쏟을 만했고, 읽고 나서 뿌듯했다. 시골보다 도시를 선호하고 남자나 아이보다는 내 삶을 우선하는 등, 기존 로맨스 소설에서 잘 등장하는 않지만 내가 공감할 만한 여자 주인공이 그려졌다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든다. 이런 여자들도 ‘해피 엔딩’을 누릴 자격이 있다! 트로프를 영리하게 잘 쓰는, 가벼우면서도 너무 경박하지 않고 재미있는 로맨스 소설을 찾는다면 <Book Lovers>를 권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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