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Fire Island(파이어 아일랜드)>(2022)
⚠️ 아래 영화 후기는 <Fire Island(파이어 아일랜드)>(2022)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앤드류 안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21세기 게이 남성들을 데리고 재해석한 영화. <오만과 편견> 속 ‘베넷’ 가족의 역할은 다섯 게이 남성과 한 레즈비언 여성이 맡았다. 이들은 10년 전에 한 레스토랑에서 같이 일하면서 만난 사이인데,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일을 관둔 후에도 다들 매년 한 번씩 만나 시간을 같이 보낸다. 에린(마거릿 초)은 운 좋게 한 레스토랑에 갔다가 음식에서 작은 유리 조각이 나와서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고, 이걸로 ‘게이들의 성지’ 파이어 아일랜드에 집을 하나 샀다. 에린이 다른 다섯 게이 친구들의 정신적 ‘엄마’ 격이기 때문에 모두 이곳에 모인다. 다섯 ‘딸들’ 역을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일단 노아(조엘 킴 부스터 분)가 있고 그와 단짝인 하위(보웬 양 분)가 있다. 이 둘은 다섯 게이 친구들 중 유일한 동양인들이라 유독 더 친하다. 그 외에 루크(맷 로저스 분), 키건(토마스 마토스 분), 그리고 맥스(토리안 밀러)가 있는데 루크와 키건이 또 무척 가까운 사이고, 맥스는 다섯 중에 제일 조용하고 얌전한 타입이다. 어쨌거나 이들이 파이어 아일랜드에 놀러 왔는데 아쉽게도 에린이 투자를 잘못해 자금 사정이 안 좋아졌고, 그래서 파이어 아일랜드에 있는 이 집을 팔아야 할 상황에 처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여섯 명이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하는데 서로 다 같이 뭉치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 거라는 우울한 예측. 노아는 어차피 이번 휴가가 마지막이 될 거라면 최고로 좋은 기억을 남길 수 있게, 하위를 전적으로 도와주기로 한다. 하위는 자신이 못생기고 몸매도 별로여서 남자 친구를 사귈 수 없을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아는 하위에게 관심 있어 보이는 찰리(제임스 스컬리 분)라는 남자와 잘되게 분위기를 잡아 주려 애쓴다. 문제는 찰리와 같은 별장을 쓰는 찰리의 친구들이 재수가 없다는 것. 쿠퍼(닉 아담스 분)는 대놓고 하위가 외모가 딸려서 자기네들과 같이 놀 급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윌(콘래드 리카모라 분)은 그 정도로 속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친구 쿠퍼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하위를 의심하는 듯하다. 그래서 노아에게 윌의 첫인상은 아주 별로다. 그렇지만 그 재수 없는 윌과 마주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노아는 하위가 찰리랑 잘되게 도와주고 싶다. 하위는 과연 찰리와 이어질 수 있을까?
위에서 썼듯이, 이미 몇 번이고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진 제인 오스틴의 명작 소설을 이번에는 21세기 게이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새롭게 꾸며냈다. 정말 대단하다. 원작이 재미가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만든 이 영화도 재미있다. 원작의 중요한 플롯 포인트나 등장인물의 특징을 꽤 충실하게 가져오되, 현대적인 이야기로 잘 각색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첫 장면, 첫 내레이션부터 노아가 <오만과 편견>을 인용하는데 (저 유명한 첫 문장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꼭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다.”) 자기는 ‘아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도 아주 자연스럽게 위트 있게 드러낸다.
한 처음 20분 정도 봤을 때는 ‘그래, 노아가 엘리자베스(리지) 베넷 역인 건 알겠어. 근데 누가 누구지?’라고 생각했다. 메리와 캐서린은 솔직히 원작 소설에서도 큰 비중이 없고, 리지를 제외하면 제인과 리디아만 유의미한 사건이 있는데 아무리 봐도 누가 제인과 메리인지 모르겠는 거다. 그래서 계속 보다가 중반쯤 되어 서서히 이해가 갔다. 아하! 역할만 따지고 보면 하위가 제인이고 찰리가 빙리 씨, 루크가 메리, 그리고 노아와 잠시 썸을 탔던 덱스(제인 필립스)가 위컴 씨에 해당하는데 이게 또 기가 막힌 페어링이다. 원작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베넷 가의 다섯 딸들 중에서 제인이 제일 미인이라는 설정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파이어 아일랜드>에서는 제일 자기 외모에 자신이 없는 하위에게 제인의 역할을 맡김으로써 이야기를 한번 비틀어 꼬면서 의미를 더한다. 내가 게이 남성은 아니니 이렇다고 딱 단정해 말할 순 없지만,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는 ‘외모’가 큰 권력이라고 들었다. 게이들은 즉석 만남, 빠른 만남에 거부감이 없는데 짧은 시간 내에 누군가를 만날 때 가장 쉽게 바로 파악할 수 있는 게 아무래도 외모(얼굴과 몸매)이다 보니까 잘생긴 게이들은 계속 인기가 있고, 상대적으로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게이들은 그런 즉석 만남에서 인기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하위도 그런 고민을 한다. 자기는 남자 친구가 한 번도 없었다고, ‘너(=노아)’랑 나랑은 같은 아시아인이어도 외모의 급이 다르니까 제발 너 같은 애들(=잘생긴 애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를 나한테도 해당하는 것처럼 하지 말라고 말한다. 😥 그래서 빙리 씨의 누이 캐롤라인이 ‘베넷 양(=제인)’과 자기 오라버니를 떨어뜨려 놓으려고 애쓰는 게 여기에서는 외모가 부족하다고 비웃고 깎아내리는 걸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찰리’라는 이름도 빙리 씨의 이름 찰스에서 가져온 거 아닌가요. 찰리나 빙리 씨나 둘 다 친구들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게 똑같다. 진짜 어떻게 이렇게 원작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기가 막히게 각색을 했는지!
그리고 리디아와 위컴 씨 역에 대해 말하자면 이것도 정말 잘 썼다. 원작에서 리디아는 위컴 씨와 야반도주를 해서 베넷 가가 발칵 뒤집어진다. <파이어 아일랜드>에서는 루크가 덱스랑 원나잇을 하는데 루크가 하도 취해서 정신이 없을 때 덱스가 그의 얼굴이 완전히 다 나오게 섹스 비디오를 찍고 인터넷에 이를 올려 난리가 난다. 노아는 자기랑 썸을 탔던 덱스가 루크랑 잤다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렇게까지 덱스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루크가 헤롱헤롱할 때 그의 동의 없이 섹스 비디오를 찍어 유포했다는 데 극대노한다. 다행히 윌이 변호사라 그럴듯하게 법을 들먹여가며 겁을 줘서 덱스가 인터넷에 올렸던 섹스 비디오도 지우고 본인 핸드폰에서도 삭제하게 만든다. 윌이 이 일 일어나기 전에 안 그래도 노아에게 덱스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주의를 주길래 ‘도대체 어떤 나쁜 놈일까?’ 했더니… 완전 핵폐기물급. 하긴, 원작에서도 위컴 씨는 협잡꾼이었지…
노아와 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각각 리지와 다아시 씨 역을 잘 살려 서로 으르렁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그 점도 무척 마음에 든다. 둘이 위트 있게 주고받는, 장난스러우면서도 날카로운 대화(banter)를 참 잘 썼다. 각본을 노아 역의 조엘 킴 부스터가 썼다는데 정말 천재 아닌가 감탄 또 감탄. 솔직히 말하자면 윌 역의 배우를 처음 봤을 때 ‘저 히쭈구리한 남자가 다아시 역이라고…?’ 하고 의심했는데 연기와 각본의 힘 덕분에 뒤로 갈수록 윌이 잘생겨 보이고 매력 있어 보인다. 보니까 배우가 아시아인(아버지가 필리핀인이시라고 한다)과 백인 혼혈이라 오묘한 느낌도 있더라. 잘생김을 연기하는 배우는 베네딕트 컴버배치 이후로 오랜만이라 참 신기했다.
영화가 시작할 때 다섯 남정네들이 폭스 서치라이트 픽처스(Fox Searchlight Pictures) 인트로 음악을 빰빠라밤~ 빰빰빰 빰빠라밤~ 하고 따라하는데 아주 정신없고 귀엽고 재미있다(하위와 키건, 루크는 극 중에서 노래도 부른다). 영화 내내 이 다섯 남자들은 자신의 ‘게이다움’을 패싱이나 커버링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소위 ‘끼순이’라고 하는, 게이라고 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전형적인 ‘여성스러운’ 게이 남성의 모습에 별 불쾌감이 없다면 이 영화를 한번 살펴보는 건 어떠신지. ‘게이’ 영화이지만 정말 재미있는 로맨틱 코미디라고요! <오만과 편견>의 팬이신 분들에게도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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