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영화 추천] <Ron’s Gone Wrong(고장난 론)>(2021)
⚠️ 아래 영화 후기는 <Ron’s Gone Wrong(고장난 론)>(2021)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독: 사라 스미스, 진-필리프 바인, 옥타비오 E. 로드리게즈
이 영화는 인기가 많았고 다들 많이 본 거 같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배경은 근미래, 아이들이 비봇(B-Bot)이라 불리는 AI 로봇을 핸드폰이나 태블릿 PC처럼 데리고 다니는 세상이다. 이 비봇은 한마디로 내 말을 이해하는 로봇 친구인데 다 있는 비봇이 바니(잭 딜런 그레이저 목소리 연기)만 없다. 안 그래도 돌이나 좋아하는 괴짜로 소문 나서 쉬는 시간에 운동장에서 같이 놀 친구도 없는데.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는 바니를 보고 바니의 아빠(에드 헬름스 목소리 연기)와 할머니 동카(올리비아 콜맨 목소리 연기)는 바니에게 생일 선물로 비봇을 하나 사다 준다. 이 비봇의 문제는 ‘정식 셀러’에게 산 정품이 아니기 때문에 보통 비봇이 가진 기능도 없고, 보통 비봇처럼 인간 아이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프로그램도 없다는 것이다. 바니는 실망하지만 그래도 이 ‘론(자흐 갈리피아나키스 목소리 연기)’이라는 비봇에게 친구가 되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다음에 더 많은 일이 일어나지만, 뭐, 일단 대충은 그런 전개의 이야기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다혜 기자의 이 트윗이 떠올랐다(여러분이 아시는, <씨네 21> 기자이자 책 칼럼을 쓰는 그 작가분 본인 계정이 맞다).
(출처)
또한 심너울 작가의 <나는 절대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에 수록된 단편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도 떠올랐다. 내용은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경상도의 어느 작은 분교에 하나뿐인 학생이 ‘친구 봇’과 친구가 되는 이야기이다. 인공지능 로봇이라지만 상대가 하는 말을 적당히 알아들은 척하고 맞장구 쳐 주는 기능밖에 없는 이 친구 봇을, 이 학교의 유일한 학생 유림이는 아끼고 진짜 친구처럼 대한다. 이 단편에 대해 심너울 작가는 이렇게 썼다(출처는 이 단편집 맨 뒤에 있는 ‘작가의 말’인데, 인터넷 서점의 책소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공학과 교육학의 통섭에 대하여>를 말하려면 내 친구의 놀이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는 사람 얼굴처럼 보이는 것들을 찍어서 인스타그램의 ‘얼굴첩’에 올린다. 예를 들면, 건물의 창문 두 개와 문이 각각 두 개의 눈과 입처럼 보인다든지, 콘센트의 구멍들이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든지. 하하, 사람들은 세 개의 구멍이 있으면 그걸 두 눈과 입 같다고 느낀다.
나는 사람의 그 특성이 좋다. 생명이 없는 사물에서 사람을 연상해내는 작용이. 물론 그것은 사람이 사람의 표정을 인식하고 해석하기 위해 나타난 진화적 적응이겠지만… 나는 거기서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사람이 사람이 아닌 것에서 사람의 속성을 본다는 것은 사람의 정신이 그만큼 다른 것도 포용할 수 있다는 증거 아니겠냐고.
평범한 착즙 가지고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니냐 물을 수도 있다. 맞다.
이 두 편의 글에 깊이 공감하면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책, 그러니까 글을 사랑했고 어떻게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로다’일 뿐인 종이쪼가리를 통해 우리 인간이 울고, 웃고, 화를 내는 등 온갖 감정을 느끼게 되는지 신기하게 여겨 왔다. 그런 재능을 나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림도 비슷하다. 어떻게 단순하게 그린, 그리는 데 5초도 안 그렸을 것 같은 저 론의 얼굴을 보고도 우리는 귀엽다고 느끼고 사랑스럽다고 느끼지? 세로로 긴 타원 두 개, 그리고 짧은 곡선 하나. 이것만 가지고도 눈과 입을 가진, 감정이 있는 존재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게 정말 너무 신기했다. 것도 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재능 못지않게 너무 대단하구나! 나도 그런 재능을 가지고 싶다!
아 정말 너무 귀엽지 않냐고요! 🥰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모습을 짤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코 이거다.
론의 귀여움에 반해 내내 엄마 미소를 하며 보았는데, 마지막에 결말을 보고 나도 사망했다. 스포일러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 무슨 일인지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영화가 끝날 즈음 내 안의 무엇인가도 죽어 버렸다는 말 정도는 해 두겠다. 결말의 여파로 나도 한동안 우울했다. 제작자들이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를 보고 조금만 배웠더라면 싶었다. 너, 그러니까 나에게 소중한 존재가 없는 세상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자기 희생은 영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이 애니메이션의 교훈을 전달받지 못했나 싶고 원통스러웠다. 나의 론이, 나의 론이! 😭
어쩔 수 없다. 귀여운 론이 ‘디키 디키 다카’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는 영상이나 돌려 보면서 마음을 달래는 수밖에. 아니면 내가 결말을 감당할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기면 (아마 FBI의 반(反)고문 훈련을 수료하고 나면?) 영화를 다시 볼 수도 있겠다. 언제쯤 그럴 힘이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 론이 귀여운 거 모르는 사람 없게 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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