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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범, <나를 찾지 마>

by Jaime Chung 2023. 5.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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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범, <나를 찾지 마>

 

 

⚠️ 아래 독서 후기는 김범의 <나를 찾지 마>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일주일간 없는 시간을 쪼개 틈틈이 읽은 책이 내 기대를 박살 내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블로그에 한탄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이 책이 나로 하여금 이런 글을 쓰게 만들었다.

이 소설의 시놉시스를 처음 들었을 때는 무척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간략히 요약하자면, 10년 전 죽은 남편이, 아내의 재혼을 일주일 앞둔 환갑 날에 살아 돌아온다는 것이다. 말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가. 남편이 죽고 나서 온갖 고생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을 아내가 이제 좀 행복해져 보려 하니까 얄궃게도 죽은 남편이 살아 돌아온다? 갈등 구조가 아주 명확히 보이고 벌써부터 재미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됐다.

그러나 내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출판사는 이 소설이 전자책 플랫폼에 사전 연재하는 동안 별점이 10.0이었네, 탑 7 베스트셀러라는 폭발적인 호응을 받으며 종이책으로도 출간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네 어쩌네 하는 찬사를 책 표지 전면에 썼고,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펼치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시원한 스토리텔링의 매력’ 운운하는 책 소개도 각 온라인 서점에 올려 놓았다. 그래 놓고서 이런 책을 나에게 읽게 만드는 건 일종의 사기 아닌가?

 

내가 <나를 찾지 마>에서 마음에 안 드는 건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 환갑을 맞이한 여성이 주인공인데 진짜로 60대의 여성은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가 따져보면, 도저히 모르겠다. 남성 작가들이 여성 등장인물을 잘 쓸 줄 모르는 거야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새로운 일도 아니지만 정말 이렇게까지 못 쓰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글의 주인공으로 60대 여성을 설정해 놓고서 60대 여성이 할 법한 사고 방식이나 말투를 구사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설정을 틀어서 자신이 잘 아는 걸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소설 속 주인공 승희란 인물을 아무리 봐도 우리 주변에서 볼 법한 아주머니의 느낌이 전혀 안 난다. 이건 도대체 뭐지?

뭐, 60대 여성 중에 이런 60대 여성도 있나 보다 하고 넘긴다 치자. 다음 문제는 작가 치고 너무 치명적인 문제다. 글, 특히 소설이라면 ‘보여 주기(간접적인 묘사)’와 ‘말하기(직접적인 묘사)’를 번갈아 하며 적당한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것은 작가 아니라 독자들도 아는 글쓰기의 기본 원칙이다. 예컨대 누가 화가 났다는 걸 그냥 ‘화났다’라고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는 얼굴이 점점 빨개졌다’라든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 같은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처럼 간접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취업 준비생이 이번에도 낙방의 고배를 마셔서 자신감을 잃었고 크게 절망했다면 그걸 직접적으로 ‘그는 절망했다.’라고 말하는 대신에 부모님이 집에 계신데도 불구하고 조용히 집에 들어가 곧바로 자기 방으로 가 문을 걸어잠그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 인물의 심정을 독자가 추측하게끔 만들 수 있다. 물론 모든 장면, 모든 행위나 감정, 생각 등을 다 간접적으로 ‘보여 주’어서 표현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이 소설의 저자가 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말하기’만 하는 것은 좋은 글쓰기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부분들이다.

남자에게 기대는 여자를 경멸했다. 의존은 자기 인생을 갉아먹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언제 어디서나 씩씩하게 자존과 자립을 외쳐댔다. 막상 혼자가 되자 비로소 나 자신을 똑바로 알게 되었다. 난 완벽하게 남자에게 기대는 여자였다. 의존이 너무 편한 인간이었다.

깡숙 때문에 애를 끓이게 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 애에 대한 내 적개심이었다. 그 감정은 흔히 사랑싸움에서 일어나는 질투와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그때엔 이미 놈에 대한 사랑 따위는 거의 말라버린 다음이었다. 놈은 그저 놈이 자주 지껄이던 대로 내 가족일 뿐이었다. (…) 그런데 난 왜 그렇게 애를 태우며 날을 세웠던 걸까? 혹시 내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확실한 정답은 아니었다. 물론 자존심과 유사한 무언가가 몹시 걸리긴 했다. 하지만 그건 자존심과는 조금 다른 종류였다. 가장 가깝게 표현하자면 두려움이었다. 그 애로 인해 내 가정의 일부가 부서지고, 그 부서진 틈 때문에 내가 쌓았던 모든 게 한꺼번에 다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바로 그것이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하기’가 많은지 모르겠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기만 하는 걸 읽다 보면 ‘저자는 이러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는 있었는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썰을 푸는 것 스타일 이외에 완전히 소설 형태로 그걸 구현해 내기를 어려워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저자에게 호의적으로 이래야만 했던 이유를 짜내어 보자면, 전자책 플랫폼에 사전 연재를 할 시절에 분량이 정해져 있어서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분량을 조절하는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던 게 아닐까…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 분명 더 생생하고 은유적으로, 그러나 더욱 효과적으로 인물의 성격이나 사건을 보여 주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단점은 엉성한 이야기이다. 10년 전 갑자기 사라진 남편이 아내의 환갑날에 역시나 갑자기 나타나 한바탕 파문을 일으킨다는 핵심 아이디어만 놓고 보면 정말 흥미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아내이자 주인공인 승희는 현재 돈도 많고 다정하며 곧 재혼할 예정이던 남자 친구 민재가 있는데 다시 찾아온 남편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다가 결국 언제나 ‘바위’처럼 자신만을 바라보았던 남편에 대한 사랑과 믿음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민재와 헤어진다. 그 남편이란 자가 금의환향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바뀌었다는 모습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란다. 어떻게 바뀌었느냐면, 촌스럽게 믹스 커피만 마시던 남편이 이제는 카페 키오스크도 세련되게 잘 이용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그게 정말로 남편의 바뀐 모습 중 하나로 제시된다. 딸인 지은이가 블루베리케이크를 먹고 싶어 했는데 딸기케이크만 사다 주던 것을 후회하고 블루베리케이크를 딸에게 (카카오톡 선물로) 보낸다는 일화 같은 건 그래도 ‘아, 자식에게 사과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하고 바뀌었음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굳이 키오스크나 카카오톡 선물을 잘 쓴다는 점이 부각되어야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게 사람의 태도, 인성이 바뀐 거란 무슨 상관이람?

이 소설의 엉성한 이야기 중 또 우스운 것은, 남편이 제발로 장기를 팔러 가서 각막까지 빼먹힐 위험에 처했다가 어찌어찌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전개이다. 일제 강점시대 조선인 노동자처럼 옥수수죽만 먹으며 강제 노역을 하다가 어찌어찌 빠져나와 집으로 가려고 무작정 걷는데 두 갈래 길에서 신 같은 노인을 만나고, 그 노인이 땅바닥에 ‘Right, meet your family. Left, see your enemy.’ 같은 글귀를 썼다고 한다. 주인공이 신 같은 존재를 만날 수는 있는데 왜 그 신이 갑자기 영어를 한단 말인가? 중국 간 거 아니었어? 기독교 신이라서? 그러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써야 하는 거 아닌가? 이런 전개를 전자책 플랫폼에서 실시간으로 본 독자들이 정말 평점 10.0을 줬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중에 내가 제일 이해 못 하겠고 우습다고 생각하는 것은, 승희와 남편이 운영하던 공장에서 일하던 여직원 강숙을 가지고 작가가 만든 삼각 관계다. 강숙은 주인공의 남편을 마음에 두고서 정말 부단히도 유혹하려 하는데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주인공의 오빠(역시나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와 불륜을 한다. 애초에 강숙이 왜 주인공 남편을 마음에 두었는지도 이해가 안 가는데(잘생기지도 않고 별 볼 일 없는 아저씨를 왜? 게다가 강숙은 늘 따르는 남자가 많은 여자라는 설정이다), 나중에 강숙은 주인공의 남편과는 일말의 무엇도 없었으며 오히려 주인공의 오빠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게 밝혀지고 나서 강숙의 입으로 ‘사장님(=주인공의 남편)은 사모님만 바라보는 바위 같은 남자예요’ 운운하는 대사를 치게 만드는 건 정말 개오버였다. 중년 남성인 작가가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자는 멋진 법이지’라며 약간 이상적인 자기 모습에 취해서 쓴 대사 같달까. 그걸 보고 여자가 감동을 받는다고? 결혼을 했으면 이혼을 바라지 않는 이상 바람피우지 않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양쪽이 모두 서로에 대한 정절을 지켜야 하는 건데 이 작자는 그 당연한 걸 했다고 ‘멋진 남자’로 칭송을 받고 싶다고? 여성은 집안일 하는 게 당연해서 집안일을 아무리 잘해도 밑져 봐야 본전인데 남성이 설거지 좀 하고 쓰레기 좀 갖다 버리고 하면 갑자기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이 되는 거랑 마찬가지 논리인가 보다. 설마 승희가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그거랑 대비해 ‘네 남편은 강숙이랑 썸씽도 없이 너만 바라봤어!’ 하고 은근히 비난하려는 의미에서 남편을 띄워주는 건 아니겠지. 남편이 10년 전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서 잿더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죽은 줄 알고 뼛가루까지 뿌렸는데, 그럼 새 인생을 시작해도 무죄인 거 아닌가?

어쨌든 요약하자면 내 여자 하나만 바라보는 바위 같은 남자 운운하는 게 정말 중년 남성의 셀프 모에화 같아서 불편했다. 그래 놓고 또 결말에는 승희가 남자 친구랑 헤어지고 남편이랑 어떻게 잘되나 했는데 남편이 또 다시 돌연 사라진다. 그래 놓고도 승희는 ‘내 남자는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며 지켜 줄 것이다’ 라면서 흐뭇해한다. 이게 무슨 개소리람? 저자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썼다는데 그래서 무조건 이 남편의 편만 드는 건가 싶다. 소설에 나오는 일화들은 모두 허구이고 지어낸 거라는데 그럼 그게 본인 아버지랑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남편 캐릭터에 이입해서 이쪽을 멋있어 보이게 만들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갑자기 사라졌다가 또 뜬금없이 나타나서 다시금 사라지는 결말은 뭐란 말인가.

 

이 외에 굳이 불필요한 검열(카카오톡을 굳이 ‘SNS’라고 돌려 말한다든가, 만월관이라는 호텔 레스토랑 이름을 ‘M관’이랬다가 만월관이라고 밝혔다가 오락가락하는 등)이나 오탈자, 맞춤법 틀린 것 정도는 별로 놀랍지도 않은 자잘한 오류에 속한다. 이것들까지 따지고 들 필요도 없이 너무나 크고 명백한 단점이 많기 때문에 굳이 그 얘기까지는 길게 하지 않겠다.

한마디로 기대에 비해 실망이 너무 큰, 엉성한 이야였다. 이 저자를 가지고 한국의 오쿠다 히데오라고 하던데, 이건 오쿠다 히데오 측 입장도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크레마 클럽을 첫 달 무료로 사용하는 와중에 이걸 크레마 클럽에서 발견해 읽었기에 망정이지, 내가 그것도 모르고 내 돈 주고 사서 읽었으면 정말 출판사에 항의 메일을 보낼 뻔했다. 내게 이런 걸 추천해 주다니 이젠 장강명 씨도 못 믿겠군요… 장강명 씨는 믿었는데! 어쨌거나 시간을 낭비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 책은 찾지 마시라. 심지어 책 제목도 그 점은 경고하고 있으니 제발 제목을 믿으시라. 안 보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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