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원도,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

by Jaime Chung 2023. 6. 7.
반응형

[책 감상/책 추천] 원도,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

 

로또, 그것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영업자 및 직장인들의 꿈과 희망이자 일주일을 견디게 해 주는 5천 원짜리 에너지 드링크가 아닐까. ‘난 안 될 거야’라는 생각에 복권 한 장 내 돈으로 사 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도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농협 본점에서 이를 수령해 가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그리고 나도 일확천금을 바라는 수줍은 마음으로 원도 작가의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를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은 구성부터 아주 재미있다. 표지 그림과 본문 삽화는 <무슨 만화>, <어떤 만화>, <골목 방랑기> 등을 그린 정세원(OOO) 작가가 그렸고, 프롤로그 이후 첫 번째 꼭지부터 에필로그를 포함한 일곱 편의 꼭지의 제목에 각각 숫자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첫 번째 꼭지는 ‘고작 1번의 만남으로도’, 두 번째 꼭지는 ‘4바퀴로 가는 꿈’, 세 번째 꼭지는 ‘낙지 다리는 8개지’ 하는 식이다. 또한 꼭지의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새 꼭지가 시작됨을 보여 주는 간지(間紙)에는 로또 용지가 그려져 있고 해당 꼭지에 언급된 숫자가 칠해져 있다. 마지막에 다 모아 놓고 보면 로또 숫자 일곱 개(보너스 번호 포함)를 골라 찍은 것처럼 보인다. 퍽 귀엽고 재미있는 발상이다.

 

책 내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15억짜리 ‘케이크’는 프롤로그에서 설명되는, 한 사람이 평생 벌 수 있는 금액을 가리키는 비유이다. 원도 작가가 경찰공무원 시험을 위해 공부하던 시절 (이 책의 저자가 <경찰관속으로><아무튼, 언니>를 쓴 작가라고 내가 말했던가?), 공무원의 부정 부패에 대한 징계 절차를 가르치던 교수님이 “뇌물을 받으려면 15억 이상 받아라.”라는 폭탄 발언을 하셨단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대략 이러하다. 학원 수강생 나이가 평균 30살이니까 그때 순경으로 입직해서 30년간 근속 후 경감으로 정년 퇴직하면, 그동안 받을 수 있는 월급과 수당이 대략 15억 정도가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뇌물을 받은 게 적발돼 파면되면 모든 기대 수익이 사라지니까, 이왕 파면될 거라면 평생에 거쳐 받을 노동 수익인 15억을 상회할 수 있는 금액을 받으라는 것이다. 물론 수험생의 잠을 깨우기 위한 농담이지만, 이 말이 저자의 뇌리엔 아주 깊이 박혔다. 저자에겐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성실하게 치열하게 산 결괏값으로 쟁취할 수 있는 게 15억이라는 전제가 충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돈을 쓸 때마다 15억만큼의 부피를 가진 케이크를 포크로 야금야금 퍼먹는 기분에 병적으로 시달리게 되었다. 옷 한 벌에 포크 한 입, 덜덜 떨며 경조사용 명품 가방을 결제했을 땐 숟가락으로 크게 한 입. 해외여행 경비를 준비할 때는 아예 칼로 케이크 조각 하나를 똑 떼서 입에 털어 넣는 기분이 들었고, 이는 고스란히 악몽으로 이어졌다. 꿈의 내용은 언제나 같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테이블이 쓰러지면서 평생에 걸쳐 구워낸 15억짜리 케이크가 모조리 쏟아지는 상황. 부서진 케이크를 손바닥으로 미친 듯이 쓸어 담으며 목이 쉬도록 절규하지만 어쩐지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기포만 뽀글뽀글 올라올 뿐. 장면은 비현실적이지만 절망적인 기분은 초현실적이던 악몽. 땅으로 사라지는 케이크를 보며 기절해버리고, 꿈에서의 기절로 현실에서 내가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심신이 피폐해졌다.

 

그렇게 꾸기 시작한 악몽 때문에 저자는 로또를 사기 시작했다. 저자 말마따나, “1등 당첨이 비현실적인 열망이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또 당첨만이 가장 현실적인 케이크 확인 방안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저자의 어머니가 친구분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로또를 구입하는 모임인 ‘또로회’의 수장일 정도로 로또에 열성적인 분이시라는 사실도 이에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그래서 저자는 매주 5천 원어치 로또를 사게 되었고, 로또를 향한 열망을 담아 이 책을 썼다. 프롤로그에 쓴 저자의 표현대로,

로또라는 물성을 띠었을 뿐, 내가 매주 구입했던 건 희망이었다. 유통기한은 단 일주일. 명확한 일정도 목적지도 없지만 언젠가는 현실이 개선될 거라는 희망을 보증하는 서류. 이번 주도 당첨이 아니면 어떠리. 나의, 우리 모두의 5천 원짜리 애닳는 꿈인 것을.

한 가지 확실한 건, 30년 만기 15억짜리 케이크는 지금 이 순간에도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1년 4월 나의 실수령액은 1,684,000원이었다. 부처나 부서에 따라 얼마든지 차등이 있겠지만, 어쨌든 내 월급은 이랬다.

우리에겐 지금 당장 새로운 케이크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경찰관속으로>를 읽었을 때 아무래도 순경인 저자가 경험한 사건사고 현장 및 그에 대한 감상이라는 주제 때문에 글이 무겁고 어두워서 분명히 좋은 글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선뜻 권하기가 어려웠다. <아무튼, 언니>는 여자라면 누구나 느낄, 언니라는 존재를 향한 애정과 따뜻한 눈길이 담겨 있어서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추천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번 책은 팍팍한 현실에 불로소득을 꿈꾸는 이들이라면 많이 공감할, 희망(=로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유머러스하고 가볍게 쓰였기에 읽기에도, 추천하기에도 부담이 없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지 않아 긴 글이나 어려운 글은 부담스럽다 하는 분들이라도 이 책은 재미있고 쉽게 즐길 수 있을 듯하다. 로또 대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어 보시는 건 어떨지. 우리 모두 농협 본점 앞에서 만나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