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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윤태진, 김지윤,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by Jaime Chung 2023. 6.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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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윤태진, 김지윤,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

 

 

이 책은 온라인 서점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발견했을 때부터 읽고 싶어서 이북으로 출간되기를 기다렸던 작품이다. 얼마 전에 이북 출간 알림이 왔길래 바로 다운로드 받아서 읽었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책이었다.

제목 <여성 게이머는 총을 쏠 수 있는가>는 철학자 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의 저서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의 오마주이자 패러디라고 하는데, 사실 그건 몰라도 상관없다. 이 제목은 ‘과연 여성이 게임(업계)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게임을 플레이할 (=총을 쏠) 수 있는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들은 첫 번째 장, ‘여성 게이머는 보이지 않는다’를 이렇게 연다.

여성 게이머에 대한 논의는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주제이다. 여성 게이머는 어디에나 있다. 50세 미만 여성의 80% 이상이 게임을 이용한다고 답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 필자가 직접 행한 게이머 조사에서 흥미로운 결과 하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남성 응답자의 절반 이상(53.8%)은 우리나라 게이머 중 남성의 비율이 70% 이상일 것이라 짐작한 반면, 여성 중 같은 짐작을 한 비율은 반에도 미치지 못했다(47.5%). 남성 게이머들은 우리나라 게임 이용자의 절대 다수가 남성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보인 건데, 의외로 게임을 제일 많이 하는 10대 및 20대 응답자들이 남성 게이머의 비율을 높게 추정했다. 남성들 눈에는 여성 게이머가 실제보다 잘 안 보이는 셈이다. 그나마 눈에 보이는 여성 게이머들은 대개 조연이거나 훼방꾼이다. 미국에서도 남성들은 여성 게이머를 ‘섹시한 보조자’거나 ‘어리바리한 초보자’ 혹은 ‘자칭 게임광이라 사기 치는 존재’ 중 하나로 인식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러다 보니 여성 게이머에 대한 (농담으로 포장된) 희롱이나 (진지한) 비난은 일상다반사가 되었고 이런 경험이 축적되면 여성 게이머는 게임의 즐거움을 잃게 된다. 여성 게이머, 이들은 누구이며, 왜 눈에 보이지 않는 걸까.

사실 여성 게이머들이 없는 게 아니다. 그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다른 이들이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이란 ‘남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으며, ‘진지한’ 게이머는 당연히 남성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언급하듯이, 여성 게이머는 ‘섹시한 보조자(남성을 보조하는 역할, 예컨대 서포터나 힐러)’, ‘어리바리한 초보자(복잡하거나 ‘진지한’ 게임을 못하는 게이머)’ 혹은 ‘자칭 게임광이라 사기 치는 존재(엉터리 게이머가 아닌 ‘진짜’ 게이머인 척하는 사기꾼)’라는 좁디 좁은 분류로 욱여넣어진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는 여성 게이머는 (적어도 남성 게이머들에겐) 존재할 수 없다. 이런 인식의 가장 적절한 예가 2016년 ‘오버워치’ 프로 경기에서 탁월한 성적을 보인 ‘게구리’ 선수에 대한 의혹이다.

(…) 당시 여고생이던 게구리 선수는 핵 사용 의심을 받았다. 제작﹒배급사인 블리자드로부터 부정행위가 없었다는 확인까지 받았지만 논란은 완전히 가시지 않았고, 이후 방송에 직접 출연해서 실력을 입증함으로써 겨우 결백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일부 남성 게이머들은 이 논란 자체가 그저 실력 뛰어난 선수를 둘러싼 의혹 제기일 뿐 성별이 관여된 사건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온라인을 뒤덮었던 여성 비하적 표현들은 여성 게이머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을 보여줬다. 일상적으로도 드물지 않은 광경이다. 출중한 실력을 보이는 여성 게이머는 일단 의심부터 받고, 의혹을 벗은 다음에는 “여자치고 참 잘한다.”는 모호한 칭찬을 듣고, 그 이후에도 같은 티어의 남성 게이머보다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이상한 궤적을 밟게 된다.

현대 사회는 생산성과 이익에 큰 의미를 두다 보니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드러나지 않는’ 일을 간과하거나 평가 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돌봄 노동이 그렇다. 정치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출산과 육아, 친구나 가족 등 주변 사람을 돌보는 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청소를 하고 요리를 하는 ‘돌봄 노동’이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비경제적이며 하찮은 것으로 여겨지며 동시에 여성들이 해야 할 일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을 비판했다. 다시 말해, 여성들이 이러한 일을 그만둬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회가 돌봄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대로 된 보상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이 돌봄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고 사회에서 말하는 ‘남성적인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 ‘돌봄의 위기’를 경고하는” 것이다. 게임 이야기를 하다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저자들은 이런 경향을 게임 속 ‘서포터 역할군’에 대한 경시와 연관 짓고, 둘 사이의 유사한 측면이 있음을 보인다. 예컨대 “돌봄을 통해 노동자들이 생활을 유지하고 기력을 되찾아 다시 일터로 나가듯이, 게임에서 서포터들도 딜러와 탱커들이 다시 ‘한타(양 팀이 짧은 시간 동안 겨루는 대규모 교전)’에 뛰어들 수 있도록 그들의 체력을 유지하고 회복시키는 역할을 한다.” 서포터 직군도 분명히 게임 속에서 필요한 직군일진대, 그것을 ‘보조적’이고 ‘부차적’인 것, 더 나아가 ‘여성적’이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서포터 직군에 대한 경시는 그것들이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대상, 즉 여성에 대한 혐오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이 게임을 한다면 서포터 직군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게임을 잘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또는 남자 친구/남편과 같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서, 큰 컨트롤적 재능이 필요하지 않은 서포터 직군을 하는 여성’이 존재한다는 생각, 그리고 여성 게이머들을 무조건 ‘혜지’로 싸잡아 부르는 못된 용어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다. 아주 간단하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여성 혐오는 게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서포터 직군에 대한 무시와 폄훼는 그냥 수많은 예시들 중 하나일 뿐이다.

 

이외에도 나는 게임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학문의 분야가 따로 있는 줄 몰랐기에 이 책을 통해 그런 학자들의 이론 및 분석을 접했을 때 너무너무 신기했고 감탄했다. 게임 같은 새로운 미디어도 따로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구나! 사실 나도 게임과 여성, 그러니까 게임 속 여성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의견, 게임을 즐기는 여성들의 경험 등에 큰 관심이 있었지만 딜루트의 <나는 게이머입니다, 아 여자고요> 외에 여성과 게임에 관한 대중적인 서적을 찾아보기 어려워 목말라하던 상태였다. 그 와중에 이 책을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미디어 속 여성의 재현을 연구하는 여성학자들이 이쪽도 조금 더 주목해 주면 좋겠다. 물론 이 주제에 관한 게임업계 전문가들의 의견도 들어보고 싶으니 책이 나오면 삐삐 주시라. 바로 달려가서 읽어 볼 테니.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읽고 나서도 현타가 왔다. ‘게임은 재미있으려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하는 건데 여자들은 게임을 하면서도 마음 편하게 즐기지 못하나?’ 게임 좀 하려고 하면 진지하지 못한 게이머 취급을 하거나 아무리 게임을 잘해도 ‘여자인 네가 그럴 리가 없다’며 무조건 의심하고 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여성들이 이입할 수 있는 여성적인 서사를 가진 게임이나 게임 속 등장인물이 많은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게임을 만들려고 해도 업계 내에서 절대적으로 여성의 수가 적으니 게임 개발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게임업계에도 인식이 크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여성주의적 움직임이 현재 필요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게임업계는 그런 움직임이 더더욱 필요해 보인다. 좋은 시작점이 될 듯. 일단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 게임업계에서 의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나도 참여하고 싶다. 일단 이 책을 통해 ‘게임하는 여성’ 또는 ‘게임 만드는 여성’, 또는 ‘게임 속 여성’에 대한 이론적 이해를 쌓아 두시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쩄거나 이 책은 게임과 여성에 대한, 아주 보기 드문 책이다. 게임이라는 주제는 젊은 층에 특히 친근하게 느껴지니 게임을 좋아하는 학생, 또는 미디어 속 여성의 재현에 대해 관심이 있는 학생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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