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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김용언 외 7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by Jaime Chung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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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김용언 외 7인, <여자를 모욕하는 걸작들>

 

 
나는 독서를 좋아하고, 목록도 좋아한다. 그래서 ‘대학생/직장인/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 100권’ 같은 책 추천 목록을 보면 개중에 내가 몇 권이나 읽었는지, 무엇을 더 읽어야 하는지 세어 보곤 한다. 목록을 채우면 짜릿함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자주 추천되는 고전 문학, 또는 ‘수준 높은’ 문학을 읽으면 나의 교양과 가치까지 덩달아 상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그런 나도 절대 안 읽는 책들이 몇 권 있으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류의 책들이다. 한마디로, 여성 혐오가 짙게 배어 있어 무슨 수를 써도 ‘흐린 눈’을 하고 그 안에 있는 다른 ‘좋은’ 다른 점을 찾기가 힘든 책들을 말한다.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책들을 다시 읽으며 진정한 고전 또는 걸작의 의미를 재정의한다. 그저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고전이나 걸작이라 할 수는 없다. 그것이 처음 발표된 당대에도 동시대인들에게 어떤 생각거리를 던져 줌과 동시에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해야 한다. 그 안에 담긴 생각이나 표현이 현대와 맞지 않거나 현대인의 기준으로 볼 때 더 이상 용납 가능하지 않다면, 그걸 우리가 예전과 똑같이 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용언 외 7인이 재독하며 그 안에 담긴 여성 혐오를 찬찬히 뜯어보는 여덟 권의 책은 다음과 같다.

  • 셰익스피어, <말괄량이 길들이기>
  •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 사랑>
  •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 앙드레 브르통, <나자>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 이상, <날개>
  • 에우리피데스, <메데이아>

그중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에 대해서는 저번 서평, 박윤진의 <벌레가 되어도 출근은 해야 해>에 관한 책 리뷰에서도 잠시 인용했으니 다른 책을 살펴보자.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제목부터 여섬 혐오의 냄새를 풍기고 실제로 본문도 여성에 대한 (’길들이기’라는 명목으로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을 담고 있기에 이게 여성 혐오적 텍스트라는 점은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아주 낭만적인 소설로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 작품에 대한 비평을 간략히 요약하고 싶다.
나는 학부 시절에 교수님께 <위대한 개츠비>, 그러니까 <The Great Gatsby>의 제목이 오역이라는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개츠비의 삶에 대한 별로 큰 낭만이나 동경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교수님은 이 제목은 ‘위대한’ 개츠비보다는 ‘대단한(한 연예인의 유행어처럼 “대다나다”라고 할 때의 진심이 하나도 담기지 않은, 비꼼이 묻어나는 그런 느낌으로)’ 또는 ‘잘난/잘나신’ 개츠비로 옮기는 게 더 적절하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개츠비의 삶은 정말로 위대할 게 없기 때문이다.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여자를 사랑하다 못해 강하게 집착한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큰 부(富)를 모았지만 데이지는 절대 개츠비의 것이 되지 않는다. 개츠비는 결국 자신의 아내를 차로 치어 죽인 뺑소니범으로 오해한 한 남자(실제로 데이지의 남편인 톰이 이 남자의 아내 머틀과 불륜 중이었고, 머틀을 죽인 사고를 낸 것은 데이지였다)에게 총을 맞아 죽는다. 바즈 루어만 감독이 만든 영화 버전 <The Great Gatsby(위대한 개츠비)>(2013)에서 묘사되었듯이, 개츠비가 사는 집과 그가 여는 파티는 분명히 화려한 눈요깃거리를 제공하지만, 그렇게 살았어도 결국 그는 허무하게 죽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물질적 부를 모으기 위해 한 일을 통해 천직을 찾았다는 기쁨을 누린 것도 아니다. 데이지에 대한 애증으로 부를 모으기 위해 자신을 갈아넣다가 뺑소니범으로 오해받아 죽은 인간이 뭐가 위대하다고, 어떤 정신 나간 (전) 연예인 (현) 범죄자는 자신을 개츠비에 빗대기까지 했지만.
어쨌거나, <위대한 개츠비>가 보여 주는 그 외적 화려함에 주의를 빼앗기면 그 안에 담긴 여성 혐오는 인식하기 힘들다. 사실 데이지를 비롯한 소설 속 여성 인물은, “’못된’ 존재로 타자화”되며, “이들의 ‘소란스러움’, ‘부도덕함’, ‘사치와 향락에 이끌리는 경박함’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묵하는 개츠비를 실제보다 더 부풀려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소모될 뿐이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성 인물이 192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신여성의 모습, 즉 ‘플래퍼(flapper)’인데 이들은 하나같이 “천박하거나 자기 과시적이거나 부도덕하게 재현”된다.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 ‘광란의 20년대’ 또는 ‘재즈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그 당시 미국은 엄청난 경제 호황 속에서 전방위로 사회문화적 변화를 겪는 중이었다. 이 변화를 가장 극적이면서도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신여성(the New Women)이다. 미국에서는 1848년 처음으로 조직적인 여권운동이 펼쳐진 후 72년이 지난 1920년부터 여성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여성상(예컨대 ‘가정의 천사’)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새로운 여성 유형이 나타났다. (…)
플래퍼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의 사회 참여와 함께 등장한 교육 수준이 높은 개혁적 성향의 신여성이었지만 대중의 관심은 이들의 화장법과 패션, 행동 방식에 쏠렸다. 진한 얼굴 화장과 짧은 치마, 단발머리(bobbed hair short), 공개적으로 남성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춤을 추는 젊은 여성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플래퍼를 가십과 볼거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 플래퍼는 점차 ‘버릇없고 성적으로 난잡한 이기적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 결국 새로운 라이프스타일과 전위(前衛), 여성해방의 상징이던 신여성은 흥청망청한 전후 미국의 과도한 소비주의와 황금만능주의, 그에 따른 도덕적 타락을 대변하는 ‘노는 여자’ 플래퍼가 되고 말았다.
(…)
이들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지, 고등교육을 받았는지, 직업적으로 프로페셔널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겉보기에는 파티에서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노는 여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경박한’ 이미지가 내면을 평가하는 근거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이는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성 인물(그들이 중심 인물이든 아니든, 상류층이든 아니든)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그들은 모두 자기 과시적이고 부도덕하며 오직 돈만을 쫓는 ‘속물’이다.

 
이 책에서 유일하게 논의되는 한국 문학인 이상의 <날개>는 이상이라는 작가의 불가해하고 신비한 이미지 때문에 이를 제대로 읽는 이들이 많이 없는 듯하다. 나도 정희진이 쓴 꼭지를 읽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여성 혐오적(참고로 이 꼭지에서 저자는 ‘미소지니(misogyny)’라는 용어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다)인 텍스트가 버젓이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 운운하는 좁디 좁은 해석만으로 이해되는 것인지 놀라움을 금치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영화 <Glass Onion(나이브스 아웃: 글래스 어니언)>(2022)의 마일스 브론(에드워드 노튼 분)처럼, 권위 있어 보이는 남자가 뭔가 좀 있어 보이는 소리를 진지하게 하면 그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고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비록 진실이 너무나 뻔하게 눈앞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정희진은 이렇게 말한다.

<날개>를 판단 중지 상태에서, 그대로 읽기를 권한다. ‘글자 그대로’라는 말은 가능하지 않지만, 최대한 머리를 비우고 우리가 몰랐던 작품이라 여기고 낯설게 익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작품은 식민지 시대 실업자의 골치 아프고 유치한 자의식 이야기일 뿐이다.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이 경제력 있는 여성이라는 사고는 당시나 당대나 변함이 없다. 이 일은 위험한 직종이다. 그래서 상품(여성)을 보호, 관리하는 포주나 ‘기둥서방’이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고 보디가드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날개>의 주인공은 아내를 ‘손님’에게서 보호하거나 가사노동을 하기는커녕, ‘분명히 아내가 손수 지은 밥’을 받아먹고 용돈을 타 쓰면서도, 자신에게는 필요 없는 돈이 든 벙어리를 ‘변소에 갖다 버리고’ ‘꾸지람을 기다리면서’ 피해자를 자처한다. <날개>의 화자가 질병으로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실제 환자가 아니라면, “나는 가장 게으른 동물처럼 게으른 것이 좋았다. 될 수만 있으면 이 무의미한 인간의 탈을 벗어 버리고도 싶었다”(91)라는 진술은 비윤리적인 자기 연민, 합리화다.

<날개> 주인공의 결론은 ‘노동을 하자’, ‘노동하는 아내를 존중하자’, ‘나 자신을 알자’가 아니다. 그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116)라고 다짐한다. (…) <날개>는 노동하지 않음, 노동하기 싫음을 초월적 자아로 포장한다. 이는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상태다. ‘날자’는 날고 있는 상태의 실행이 아닌 다짐의 심리로, 수동적 공격성﹒방어기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이 두렵다. 공사 영역 모두에 걸쳐 아내의 노동에 빚지고 있는 작중 화자는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생존이 외부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스프레가 아니다.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기 때문에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일 수밖에 없다.

 
오해는 마시라. 대체로 백인 중산층 남성들에 의해 ‘걸작’이라는 칭호를 받은 책들을 다 불태워 버리거나 금지하자는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최소한 이것들을 읽을 때 이러한 점에 대해 인지를 하자는 것이다. 만약 이 작품들을 교과 과정 안에서 가르친다면 그 안에 담긴 구시대적 사고를 인지하고 조심할 수 있도록 그에 따른 적절한 안내를 제공해야 할 것이고 말이다. 우리가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그게 신분제 사회하는 과거의 특수성 안에서 쓰였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제는 그런 신분 따위로 사람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것을 완전히 이해하듯이 말이다. 시대가 다르면 작품 해석도 달라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지금까지 백인 중산층 남성들이 ‘고전’, ‘걸작’이라 치켜세운 작품들(또는 그런 작품들을 찬양하거나 비판 없이 소개하는 책들)을 꾸역꾸역 읽으면서 그 안에 담긴 여성 혐오적 메시지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래서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런 이들이야말로 이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이 책은 또한 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 또는 ‘여성주의’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을 시절부터 이런 작품들을 접했을 때 어렴풋이 느꼈을 그 불편함을 정확히 설명해 주므로, 자신의 불편함에 언어를 주고 싶은 여성들에게도 강력히 추천한다. 훌륭한 기획이 좋은 작가들을 만나 멋진 결실을 맺었으니, 가능하다면 시리즈물처럼 계속 내 줬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다룬 여덟 권 말고도 여성 혐오의 악취가 짙게 배인 작품들이 아직 많으니까 말이다. 나의 이런 작은 소원이 성취되기를, 그래서 이 세상에 여성 혐오라는 독을 없앨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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