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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이은조, <게임의 사회학>

by Jaime Chung 2023.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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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이은조, <게임의 사회학>

 

 

게임은 환상(여기에 공상이나 상상 등 비슷한 의미의 다른 단어를 집어넣어도 좋다)에 기반한 것이지만, 그것을 만들고 플레이하는 사람은 인간이기에 게임은 인간의 모습을 닮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게임 내에서 아이템을 거래할 때도 사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싸게, 파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고 싶어 한다. 어떤 새로운 맵이나 던전이 공개되면 누구보다 빨리 달려가 정복하고 싶어 하고, 자신의 분신과도 다름없는 캐릭터는 예쁘고 멋지게 꾸미고 싶어 한다. 당연하다, 그게 인간이니까.

이 책은 게임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에서 어떻게 활동을 하고, 그게 얼마나 현실의 삶에 가까운지, 게임 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사회가 있어서 그것을 ‘연구’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그래서 제목도 ‘게임의 사회학’이다.

MMORPG 속 가상 세계는 얼핏 보기에 용과 마법이 등장하는, 현실과 전혀 다른 세상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실 세계와 매우 유사한 경제·사회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가상 세계 속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은 표면적으로 보면 그저 유희를 추구하기 위한 행동 같았으나 실상은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하는 행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가상 세계 안에서도 생산이나 소비, 물물교환, 경매 등의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가상 세계 속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친구 관계를 맺거나 공통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조직을 만들어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했고,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다툼을 벌이는 등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주고받았다. 심지어 현실 세계와 유사한 범죄 행위들이 생기기도 했고 개중에는 마치 마피아와 비슷한 범죄 조직을 결성하는 사례도 있었다. 즉, 겉으로 보이는 형태만 다를 뿐 그들이 하는 행태는 비슷했다. 캐스트로노바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이 경제·사회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관계였다.
이렇듯 사람들이 가상 세계에서도 현실과 다름없는 행태를 보인다면 현실 사회를 연구하듯 가상 세계 속 사회도 연구하지 못할 법은 없을 터였다. 어쩌면 가상 세계를 연구하는 것이 현실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며, 심지어 그동안 사회과학이 갖고 있던 한계를 돌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이것이 여러 사회학자가 캐스트로노바의 연구에 주목하며 가상 세계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였다.

 

다른 곳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게임에 관한 연구 결과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무척 흥미롭고 의미가 있다. 현실에서 쉽게 연구하기 어려운 현상들도 게임에서라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세계의 종말이라는 게 분명히 언젠가는 오겠지만 지금 우리가 현실에서 그걸 연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게임은 인기가 없다거나 수익이 좋지 않다, 또는 새 서버/게임 개발을 위해 서버를 종료하는 일이 종종 있다. 즉, 세상의 종말인 것이다. 그런 기회를 이용하면 세계가 끝장날 때 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연구할 수 있다. 아래 인용문을 한번 보시라.

강아름 교수는 2011년 12월 8일부터 2012년 2월 20일까지 약 11주간 진행된 〈아키에이지〉 4차 베타 테스트 동안 발생한 게임 사용자의 활동 로그 데이터를 분석했다. 이는 총 8만 1,174명의 사용자에 대한 약 2억 7,000만 건의 방대한 기록이었다. 사용자들이 수행한 활동의 종류는 75가지였는데, 강아름 교수 연구 팀은 이를 크게 11개의 범주로 나눈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활동량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추적 관찰함으로써 게임 사용자들이 처음 게임에 들어온 때부터 서비스가 끝나기까지 일주일 단위로 활동 유형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분석했다.
논문에 따르면, (저자의 예상과 달리) 테스트 종료가 가까워져도 게임 사용자들은 캐릭터 육성이나 생산, 소비 등의 활동에 큰 변화가 없었다. 물론 캐릭터 성장과 관련된 임무 수행이나 경험치 획득 같은 활동량은 소폭 줄어들었으며, 경제활동에서 생산에 비해 소비 비율이 늘어나는 경향이 보이기는 했으나 종말을 앞둔 시점의 변화라고 하기에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어쩌면 베타 서비스가 끝나면 그동안 캐릭터가 보유한 가상 재화는 모두 사라지고 캐릭터 활동도 불가능하므로 욕구조차 사라지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베타 테스트 참여자들은 이미 한시적인 서비스임을 알고 참여했기 때문에 일반적인 종말을 앞둔 사람들과 상황은 많이 다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가상 세계 속 사람들은 ‘내일 세상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마르틴 루터까지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파국으로 치닫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저자는 캐릭터 간의 채팅 데이터를 이용해 소통량의 변화도 분석했는데 서비스 종료가 가까울수록 함께 임무를 수행할 새로운 모임을 구하는 내용은 줄어들지만 기존 모임의 구성원들과 주고받는 대화량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심즈 온라인의 사용자들이 그러했듯 〈아키에이지〉의 사용자들도 종말을 앞둔 남은 시간을 새로운 인간관계를 쌓는 데 낭비하기보다는 이미 친분이 있던 사람들과 추억을 나누며 보내고 싶었던 듯하다. 비록 이런 행동 변화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공개된 자료만으로 파악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서비스 종료를 앞두고 더는 다른 이들과의 사회적 협력이나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태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지 않나 싶다.

여담이지만, 나는 종말이라고 하면 <Seeking a Friend for the End of the World(세상의 끝까지 21일)>(2012)이나 <Don’t Look Up(돈 룩 업)>(2021)을 떠올리는데(둘 다 좋은 영화니까 추천!) 세상의 종말이 이 연구 결과처럼 고요하고 편안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다.

 

이 외에 책에서 언급되는 게임 논문 중에 흥미로운 게 많은데, 특히 ‘리니지’에서 한 서버를 장악하며 악정을 펴던 세력에 맞서 싸워 이를 쓰러뜨리고 그 자신도 변질되어 버려 다시 새로운 혁명을 유발시킨 이야기(’바츠 해방 전쟁’ 참고)는 정말 무슨 판타지 대서사시를 연상시킨다. 게임 속 최초의 역병 사건이라 불리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오염된 피’ 사건은 또 어떤가. 게임 속 재화를 얻기 위해 불법적인 수단(’파밍’)까지 이용하는 조직을 마약 판매 조직에 비유한 것도 흥미로웠다.

이 책의 단점이라고 한다면, 저자가 말하듯이 아직 게임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야가 크지 않고 게임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가 쉽지만은 않은 탓에 연구 재료가 다른 분야만큼 풍부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저자가 ‘들어가며’에서도 인정하고 명시해 놔서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게임도 더 활발하게 연구가 되어 궁극적으로 인간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밝혀 주면 좋겠다. 게임과 관련한 사회과학 도서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 읽어 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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