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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주한나, <아무튼, 정리>

by Jaime Chung 2023.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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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주한나, <아무튼, 정리>

 

 

정리나 청소를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살림을 제법 잘하는 이들은 물론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일주일에 최소 한 번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 최소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청소기를 돌리는 일, 그리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불이나 지난 계절 옷을 정리해 넣는 일 등등을 ‘좋아서’ 하는 사람은 지극히 적을 것이다. 본업이 있다면, 그리고 혼자 사는 1인 가족이라면 살림을 잘하고 좋아하기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저자는 성인이 되어 ADHD 진단을 받았다. 이십대엔 저자가 성장한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삼십대엔 영국에서, 사십대엔 미국에서. 상담 치료를 받은 적도 없고, 지난 3, 4년을 제외하면 약도 거의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십대의 본인에 비하면 지금은 그럭저럭 정리정돈을 잘하는 편이라고(그러니까 이 책도 썼겠지!). 약물 치료를 받아서나 정신력이나 극기력이 늘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특별한 계기도 없다. 다만 “변화는 느리고 꾸준했다.” 저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ADHD인답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는 않은 20년간의 어수선한 변화의 기록이자, 정리 정돈을 강력히거부함으로써 발생한 혼돈이 천천히 소멸해가는 과정이다.”

 

본업이 개발자인 덕분에 청소 및 정리를 소프트웨어 개발 과정에 비유한 부분들이 있는데, 저자 특유의 독특한 시각이 빛이 난다.

나는 정리를 잘 못할 뿐이지 정리에 무관심하지는 않다. 오히려 그 반대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일할 때의 사고 처리 방식에 따라 정리 정돈에 대해 생각하는 습관마저 있다. 생각하는 시간에 정리나 더 하지, 지적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다 보면 너무 시급한 버그가 발생해서 신제품 개발이고 뭐고 다 놓고 버그부터 고쳐야 할 때 ‘Firefighting(불끄기)’ 모드로 들어간다. 얼마나 급한 버그인가에 따라서 ‘Sev(심각도)’ 등급을 매기고 그에 따라 일 순서를 정한다. 집 안에서 Sev 등급이 제일 높은 경우는 보통 부엌이다. 당장 뭘 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설거지가 쌓였다든가 음식 쓰레기가 썩어나고 있다든가 하는 경우다. 심각도 등급을 매긴 다음에는 ‘Triage(분류)’에 들어간다. 사안을 하나하나 보고 누구에게 맡길지 어떻게 처리할지 빨리 결정해야 한다. 응급실에 온 환자들을 분류할 때도 같은 단어를 쓴다고 들었다. 위협이 되는 요소가 ‘Mitigate(경감)’될 수 있는 것들은 그렇게 한다. 빨래를 미루고 미뤄 당장 입을 수 있는 깨끗한 옷이 없을 때 정 급하면 빨래 통에서 냄새 덜 나는 옷을 골라내 입는 방법처럼 말이다.
(…)
직장에서도 이번 스프린트에 할 거라고 만들어둔 작업 카드가 밀리고 밀리다가 나중에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 리스트지만 결국 반 이상은 조용히 소멸하는 망각의 바다, 백로그로 들어가버리는 일이 때로 발생한다. 역시나 첫 번째 스프린트에는 열심히 잘 정리해서 라벨까지 붙여둔 여섯 개의 박스와 그 안에 넣어두었던 가지런한 옷가지들이, 조금 더 발전한 시스템에서 효과적으로 돌아가기는커녕 늘어지는 빨래 사이클과 매일 아침의 급박한 뒤적거림으로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게다가 회사 일과 달리 집 안 정리는 1인 프로젝트여서 눈치 주며 닦달할 프로젝트 매니저도 나 자신이다 보니까 아예 기억에서 없애버리고 프로젝트를 엎어버리기도 쉽다. 아니면 훨씬 더 시급하고 Sev 등급이 높아 보이는 ‘부엌 정리’ 아이템의 중요도를 상향 조정하여 이번 스프린트에는 이 시급한 아이템 때문에 ‘옷장 프로젝트’에는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음을 스스로 어필하면서 뭉개버리든가.

프로그래밍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tmp’라는 변수를 써본 적이 있을 것이다. A의 값은 1이고 B의 값은 2인데, 그 두 개의 값을 바꾸려면 제3의 tmp라는 변수를 두어야 한다. 정리할 때도 마찬가지다. 서랍 두 개를 정리하려면 우선 서랍 안의 모든 물건을 임시 공간에 비운 다음 다시 정리해 넣어야 한다. 그럴 공간이 없다면 아예 옴짝달싹할 수가 없다. 테트리스 게임을 상상해보자. 아직 공간이 넉넉할 때는 커다란 한 방을 위해 차곡차곡 블록을 쌓아 올려갈 수도 있고 실수를 만회할 수도 있는데, 어느 정도 레벨을 넘어가면 아주 좁은 공간 안에서 블록을 맞춰야 하니 어찌해보기가 힘들어진다. 결정 내릴 시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해결 방법도 보이지 않는데 쌓이기는 더 빨리 쌓인다.

그래서 삶의 호흡이 그렇게 가빠질 때면 비어 있는 서랍을 열곤 한다. 공간이 넉넉한 벽장을 연다. 괜히 수납장을 열었다 닫았다 한다. 그리고 아직 빈 공간이 있음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아직 이번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빈 공간이 있다. 나는 작고 좁은 공간에 갇혀서 몸부림치고 있지 않다. 임시 저장소가 바로 여기 있다. 발 뻗을 곳도 있고, 무언가를 잠깐 놔둘 공간도 있다. 정리할 수 있다. 나는 여유가 있다. 나는 내 공간을 지배할 여력이 있다. 빈 서랍 하나는, 휑한 벽 한쪽은 그렇게 아직도 내 인생은 정리가 가능하다는 위로가 되어준다.

 

내가 특히 공감한 부분은 이 부분이다. 저자는 밀린 세금 신고를 하려고 아예 일주일을 통으로 휴가를 냈는데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다른 일을 하다가 금요일이 되어서야 세금 관련 서류 작업에 착수한다. 그리고 그 일은 막상 별로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미뤘던 걸까? 허무함과 동시에 찾아오는 저자의 깨달음에 어찌 공감하지 않을 수 있으랴!

금요일. 나는 할 것이다! 세금 서류 정리를 정말 끝낼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다 끝냈다. 막상 시작해보니 끝내기까지 두 시간밖에 안 걸렸다. 반 년 가까이 미루고, 거기에 일주일 휴가까지 내고도 이걸 피하느라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허무함이 몰려왔다.
(…)
세상일이 참 다양하지만 본질은 비슷할 때가 많다. 집안일이든 회사 일이든, 보고서든 원고 작업이든, 할 일을 정의하고 그 일을 효율적으로 처리할 방법을 찾고 시간을 계획하여 작업을 시작하고 깔끔하게 정리해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런데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언제나 제일 하기 싫다. 나는 지금 당장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그리하여 대체할 활동을 찾는다. 코드 재정리 대신에 서랍과 옷장을 뒤집어 정리한다. 디자인 문서를 훑어보며 수정하는 대신에 부엌 바닥을 스캔해 구석구석 걸레질을 한다. 그렇게 꼭 해야 할 일은 미룬 상태로, 뭔가 정리하고 해냈다는 성취감을 얻는다.
(…)
그렇게 일요일 저녁이 왔다. 회사 일은 들춰보지도 않았고 원고 역시 한 자도 더 쓰지 못했다. 그래도 하루 종일 바빴고 뭔가 했다는 자부심이 해야 할 일을 미뤘다는 자괴감과 불안감을 덮어준다. 이렇게 살지 않았다면 직장에서 훨씬 더 성공했을지 모르겠다. 집안일 역시 좀 더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잘했을지 모르겠다(도피형이나 회피형이 전체 집안일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듯하니 말이다). 그래도 어쨌든 집은 그렇게 비정기적으로 깔끔해지고 냉장고에 음식은 채워지고 옷장은 정리되고 안 쓰는 물건은 집을 떠난다. 회사 일에 쫓기는 시기를 지나서 집 안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오면 반대로 회사 일로 도피하며 돌려 막기를 한다. 빚쟁이처럼 급한 일을 피해 딴짓으로 도망 다니며 살지만 그 덕분에 어떻게든 삶의 어느 한구석이라도 정리가 되니 다행이 아닌가.

 

청소 및 정리가 너무 어렵다 싶은데 그렇다고 실질적으로 이를 도와주는 실용서를 볼 마음은 차마 나지 않는다면, 이렇게 허우적거리는 게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안을 받고 싶다면 이 책이 딱이다. 사실 청소가 어렵다는 문제뿐 아니라 세상살이 속 모든 문제에서 ‘이런 문제로 힘들어하는 게 나뿐만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아는 건 큰 위로도 되고 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되니까, 이건 문제를 회피하는 것도, 게으른 게 아니다! 잠시 이 책을 읽으며 도피하다가 ‘그래도 조금 청소를 해 볼까?’ 하고 용기가 날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리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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