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이지향, <세계관 만드는 법>
장르 소설 전문 프로덕션인 ‘안전 가옥’에서 수석 PD로 일하는 저자가 작가들의 세계관 구성을 돕기 위해 쓴 책이다. 간단하게 세계관은 무엇인가 정의하고,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짜인 세계관을 단순히 한 작품(예컨대 웹툰이나 소설)에서 이용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IP(Intellectual Property, 지적 재산)으로, 다시 말해 영화화라든지 연극화 등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이미 세계관이란 말은 익숙하겠지만 그래도 한번 정의를 내리고 시작하자면 이렇다.
서문에서 말했듯, 이 책에서 다루는 ‘세계관’이란 현실 세계와는 다른 사건·요소로 만들어진 ‘가상 세계’(fictional universe) 그리고 이 세계를 구축하는 뼈대인 ‘세계 설정’(worldbuilding)을 뜻합니다.
저자가 세계관을 구성하는 필수 요소 네 가지로 제시하는 것은 캐릭터, 시공간, 톤 앤드 무드, 그리고 설정이다.
가상의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려면, 즉 사람들이 어떤 캐릭터에 공감하고 빠져들 수 있으려면 대상에 대한 감정이입이 필수입니다. 캐릭터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 캐릭터가 끌고 가는 이야기와 세계를 오래도록 볼 수 있겠어요. 당장 더 매력적인 캐릭터의 이야기로 갈아타게 될 겁니다. 이야기의 배경과 분위기, 다른 어떤 요소가 좋아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지 못한다면 이야기의 생명력은 금세 사그라듭니다. 특히 주인공 캐릭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저런 사람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거냐’ ‘그러거나 말거나’ 하는 심정이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 있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고 하죠. 세계관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으로 세계를 설계하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배경이 우리가 창조한 세계가 잘 작동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근거지 역할을 해 주기 때문입니다.
시공간은 세계관 설계 과정에서 비교적 이른 시점에 만들어집니다. 브레인스토밍을 하며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첫 단계에서부터 만들어지기도 하죠(가령 ‘경성 시대물을 해 보고 싶은데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물 어때요?’ 하는 식으로요). 시공간은 나중에 변경하려면 대공사가 일어나는 부분이라, 명확한 기준에 입각해 신중하게 고안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공간을 설계할 때는 다음 부분을 꼭 유의하며 진행하려고 합니다. (…)
톤 앤드 무드는 세계의 분위기와 온도입니다. 바꿔말하면 창작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인 건데요. 이 세계관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어떤 심상을 느낄지, 어느 정도의 사건을 기대할 수 있는지가 상당 부분 톤 앤드 무드에서 결정됩니다. 특정 시공간과 특정 인물, 특정 사건이 마련됐다 해도 어떤 톤 앤드 무드로 방향을 잡느냐에 따라서 이야기가 흐르는 방향은 천차만별입니다. 관객들이 장르 영화를 볼 때 장르 관습에 따라 기대하는 바가 다르듯, 각 세계관의 톤 앤드 무드에 따라서도 수용자가 기대하는 세계의 감각이 달라집니다.
중요한 건 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현재보다는 미래 시점에 대한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가난은 현재의 굶주림이라기보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음을 의미한다고 했는데요. 세계관에서 톤 앤드 무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세계가 지속된다고 했을 때 창작자가 미래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보여 주는 것이 톤 앤드 무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장에서 이야기할 것은 세계관 설정에 관한 내용입니다. 서사 콘텐츠에서 세계관을 만든다는 건 우리가 사는 현재 세계와 어떤 의미로든 다른 특정한 틀을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실 세계와 같은 ‘설정값’과 ‘규칙’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굳이 세계관이라는 말로 일컬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요. 새로운 세계를 설정할 때 고민의 출발점을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What if
현실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상상할 때, 그 시작점에서 ‘만약 ~한다면 어떨까?'라고 가정해 봅시다. 새롭게 만들 세계의 법칙에 대한 약속을 궁리해 보는 거죠. 이 가정, 즉 'What if’는 독자와 관객들이 의심 없이 믿고 따라가야 하는 대전제입니다.
기존 안전 가옥 시리즈를 좋아하고 많이 읽은 이라면 ‘어, 이 작품 내가 아는 건데!’라며 반갑게 느껴질 수도 있을 정도로 저자는 안전 가옥 작품을 예시로 많이 든다. 나는 안전 가옥 시리즈가 딱히 취향은 아니라서 많이 읽지도 않았기에 별 생각이 없었으나, ‘안전 가옥’을 몇 권 읽어 봤는데 정말 취향이 아니었다 하시는 분들이라면 ‘정말 이런 사람의 조언을 들어도 되는 것일까’ 의심이 들지도 모르겠다. 내가 제3자로서 공평하게 말하자면, 안전 가옥에서 일하는 PD로서 자기네 시리즈 홍보용으로 몇 마디 언급할 수도 있지 싶긴 하다. 그 작품들은 다 다른 작가들이 쓴 거고, 저자의 도움으로 세계관이 잘 만들어졌다 해도 정작 작품 자체는 독자인 나에게 별로 재미가 없거나 잘 쓰였다는 인상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말이다. 다행히도, 잘 활용되는 슈퍼 IP이자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세계관의 좋은 예시인 마블 슈퍼 히어로 영화들이라거나 아이돌(엑소, 에스파 등), 그리고 <왕좌의 게임> 등도 자주 언급되니, 안전 가옥 시리즈를 안 좋아하거나 잘 몰라도 저자가 제시하는 개념들을 무난하게 이해할 수 있다.
작법서이긴 하지만 170쪽(종이책 기준)밖에 안 되는 분량이 강점이 될 수도 있고, 단점이 될 수도 있겠다. 강점이라고 생각하자면 간단명료하고 쉽다는 것, 단점으로 보자면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야기,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쉽사리 떠올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건 입문용 서적으로 보시는 게 좋겠다. 더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을 원한다면 다른 작법서를 찾아봐야 할 듯. 나야 세계관이 필요한 글을 쓸 건 아니라서 흥미 위주로 가볍게 읽고 말았지만, 진짜 글을 본격적으로 써 보고 싶은 분이라면 이 글이 갈증 해소에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 같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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