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제시 싱걸, <손쉬운 해결책>
자존감, ‘그릿’, ‘넛지’, 파워 포즈 등의 개념은 너무나 유명해서 이제 그 개념을 처음 주창한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다 들어 봤을 것이다. 우리 삶의 문제를 한순간에 해결해 줄 것 같은 이 개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을 실제로 개선시켜 주지 못한다. 왜 그럴까? 애초에 이것들이 광고하는 만큼의 충분한 과학적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전문가들뿐 아니라 많은 대중을 매혹시켰고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한 심리학 연구들을 여덟 가지 선정해 그것이 왜 광고만큼 효과가 없는지를 낱낱이 밝힌다. 나는 뭐만 하면 자존감을 운운하는 인터넷 상담글이나 ‘그릿’이 있어야 성공한다는 주장, ‘파워 포즈’를 취하면 자신감이 상승한다는 TED 강연 등을 애초에 믿지 않았기에 이 책이 하려는 말을 들어 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렇게 ‘손쉬운 해결책’이 있을 리가 있냐고요. 세상이 그렇게 쉽기를 바란다면 너무 도둑 심보 아닌가.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너무나 당연한 개념이 되어버린 ‘자존감’이 미국에서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으로 제도화된 것은 캘리포니아주 정치인 존 바스콘셀로스(John Vasconcellos) 단 한 사람의 공적이다. 그는 실리콘밸리를 대표한 민주당 소속 주의회 의원이었는데, “터무니없어 보이는 몇몇 아이디어들로 그는 주 의회 의사당 안팎에서 악명을 얻었다. 예를 들어, 그는 특정한 형태의 ‘대안 출산법’으로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덜 폭력적인 인간으로 자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또 부모와 자식 간 성교가 사실은 아이에게 해롭지 않고 자연스럽고 건강하다는 주장에 최소한 호기심 정도는 가졌던 것이 분명했다. 그는 아버지와 성교로 처녀성을 잃은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여성들에 관한 기사를 읽었고, 소아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을 자신의 ‘성(sexuality)에 관한 네트워크’에 초청했다”. 이런 자가 다양한 사회 문제에 자존감 개념을 적용하는 방법을 탐색하는 걸 목표로 하는 ‘자존감과 개인적﹒사회적 책임감 신장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맡았고, 당연히 “온 나라가 비웃음으로 응답했다”.
사실 “자존감을 만병통치약으로 보는 아이디어가 인기를 얻은 데는 (…) 올바른 마음을 가지기만 하면 긍정적인 (어떤 이야기들에 따르면, 기적적인)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오래된 미국식 믿음에 닿아 있기도 했다.” 자존감 개념이 학교에서 아이들의 성적 향상을 꾀하기 위해 사용된 부분을 읽으면서는 오늘날 한국의 양육법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가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데에 집중하다 보니 기분이 안 좋을 수밖에 없지만 피할 수 없는 일들, 그러니까 훈육 같은 일을 완전히 피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아래 인용문을 보시라.
빨간 펜 사용을 중단한 학교들도 있었는데, 받아쓰기 시험지에 빨간색이 많이 칠해진 것을 보면 아동의 자존감이 손상될 수 있다는 이론 때문이었다. 일부 학교는 ‘당신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같은 글귀가 적힌 거울을 설치했다.
일부 활동은 무해했다. 특히 달리 셈법을 배울 일이 없었을 5세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활동은 확실히 무해했다. 그러나 사회 비평가 스티브 살레르노Steve Salerno에 따르면, 자존감 광풍에서 생긴 특정 개념들은 교육을 나쁜 방향으로 변화시켰다. 그는 논쟁적이지만 충실한 조사를 통해 쓴 책인 『가짜—자기계발 운동은 어떻게 미국을 망쳤는가Sham: How the Self-Help Movement Made America Helpless』에서 쿠시 공과 낯간지러운 문구가 적힌 거울이 다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많은 학교에서 학업의 어려움과 그에 따른 보상에 관한 기존의 가정들이 바뀌었다. 살레르노가 내게 설명해준 바에 따르면, 그 생각은 이렇다. “무엇에 대해서든 아이들을 기분 나쁘게 만들지 말라. 기분이 나쁘면 성적도 나빠질 테니까.” 자존감은 또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비생산적인 방식으로 전국의 사회적 불평등에 관한 장기적 논의 안에 자리를 잡았다. 살레르노는 말했다. “도심 슬럼 지구가 뒤처진다는 느낌이 있었어요. 특히 도심 슬럼 지구의 흑인 아동들이 다른 아동들만큼 잘하지 못한다는 느낌 말이에요. 그리고 그게 그 아동들의 자존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가정이 있었지요.” 그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일 수 있다면, 학력 격차를 좁힐 수 있다. 이 이론의 좋은 점은 교육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손볼 필요가 별로 없다는 점이라고 살레르노는 지적했다. 손쉬운 출구 같은 것이었다. 많은 경우에 “〔자존감 옹호자들은〕 더 좋은 교사를 채용하고, 현실의 학교와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쓰기보다는 자존감에 초점을 맞췄어요. 그것이 실제로 좋은 효과를 낼 수도 있었을 무언가의 대체물이 되었지요”. 이후의 유행들에서도 그런 유형이 반복되었다. 요구하는 것이 제일 적은 개혁이 제일 확산되기 좋은 법이니까.
하지만 자존감이 높은 아이가 성적도 더 좋다는 주장은 사실 근거가 부족했다. 자존감은 명확한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문제에 ‘손쉬운 해결책’만 제시할 수 있다면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아주 좋은 예시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 모든 것이 이론에 국한되었다. 자존감 프로그램의 폭발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바우마이스터 팀은 애초에 “자존감 프로그램이나 다른 개입 조치들이 자존감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증거는 상대적으로 거의 찾아내지 못했다”. 광풍이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 견실한 연구는 턱없이 부족했고, 존재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자존감뿐만 아니라 학습법, 시민권, 갈등 감소 및 다른 변수들까지 겨냥하기” 때문에, 자존감의 역할만 따로 떼어내는 방식으로 결과들을 해석하기가 어려웠다.따라서 자존감이 (예를 들자면) 학업 성과의 원인이라는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었다 하더라도, 자존감을 강화할 수 있는 증명된 개입 방법은 없다.
여기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랬다. 자존감과 긍정적인 성과들을 연결하는 정말로 탄탄한 인과적 증거의 토대가 없어도, 그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였다. 바스콘셀로스처럼 쉬이 흥분하는 정치인 입장에서 볼 때, 그 아이디어는 자명한 사실이라서 확실한 증거 같은 것이 필요치 않거나, 아니면 그 정도 증거도 그 아이디어를 밀고 나갈 정도로는 ‘충분’했으리라. 브레이크를 걸어줄 수 있었을 스멜서 같은 유력 인사들에게는 그 자리의 유일한 반대자가 되지 말아야 할 동기가 있었다. 자존감 운동을 또 하나의 사카린 선언, 즉 미국적 강인함의 토대를 갉아먹는 연약한 자기계발 헛소리로 본 보수적 사회평론가 찰스 크라우트해머Charles Krauthammer와 로라 슐레징어Dr. Laura Schlessinger[47] 박사를 포함한 다른 회의론자들이 있긴 했지만, 자존감을 향한 그 엄청난 열광에 쉽게 침몰해버리고 말았다. ‘자존감을 높이면 사람들의 삶과 생산성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같은 간단하고도 전염성 높은 메시지가 실제로는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문제들에 손쉬운 해결책을 제시하며 유행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래서이다.
자존감 못지않은 광풍을 일으킨 개념이 에이미 커디의 ‘파워 포즈’인데, 이에 관한 책 광고도 나는 많이 봤고, 심지어 다른 서적에 인용된 것도 봤다. 하지만 난 늘 의심스러웠다. ‘원더 우먼’ 같은 파워 포즈를 한다고 갑자기 자신감이 차오른다고? 효과를 보기 위해 1-2분이나 그러고 있어야 하는 것도 민망스럽지만, 만약에 그런다 쳐도, 자신감이 드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효과를 주지? 잘못된 답을 자신 있게 외친다고 해서 오답이 정답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6 파워 포즈와 권력감의 관계’라는 꼭지도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파워 포즈가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은 최초의 연구 결과를 재현해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3월에 에바 라네힐Eva Ranehill이 이끄는 연구팀이 약 다섯 배나 많은 200명의 피실험자를 대상으로 원래의 실험 방법론을 ‘엄밀히 따라’ 최초의 파워 포즈 연구를 재현하려 했던 실험의 결과를 발표했다.[12] 라네힐 팀은 파워 포즈와 위험 감수 경향, 또는 파워 포즈와 호르몬 수치 간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어떠한 효과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이는 최초의 연구 결과뿐만 아니라 그동안 발표된 전도유망한 일부 후속 연구들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과였다. 그 재현 실험이 실패하면서, 당시에 아직 걸음마 단계에 있던 재현성 위기에 대한 주류 언론의 관심이 엄청나게 폭증했다. 예를 들어, 앤드루 겔먼Andrew Gelman과 카이저 펑Kaiser Fung은 《슬레이트》에 빈약해 보이는 연구 결과를 감싼 반짝이 포장지에 ‘외부인들’이 속는 건 이해할 만하다지만, “심리학 연구에서의 재현성 위기를 아는 내부자들은 소규모 실험에 기반한 그런 종류의 극적인 주장들을 의심한다. 여러분도 그래야 한다”[13]라고 썼다.(재현성 위기에 관해서는 8장에서 더 깊이 들여다볼 것이다.)
파워 포즈는 효과가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도 문제적이다. 다시 말해, 제도나 환경을 바꿀 생각을 하기보다는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같은 구인 공고를 봐도 남성들은 예컨대 열 개 항목 중 대여섯 개만 해당이 되어도 그 일에 당당히 지원하는 반면, 여성들은 열 개에 모두 해당되지 않으면 섣불리 지원하지 않는다. 이걸 여성들이 문제라고 주장한다고, 여성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일단 지원서를 넣어 봐야 한다고 독려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인가? 열 개 항목 중 대여섯 개만 해당이 되어도 적당한 후보로 여기고 서류를 통과시킬 거라면 애초에 왜 주요 항목들만 공고에 쓰지 않는가? 아니면 여성을 일정 수 이상 고용해야 한다는 쿼터제를 도입하거나 여성들의 고용 형평성을 위한 정책을 펴지 않는가? 또는 여학생들이 정답을 알고 있어도 섣불리 답을 말하지 않고, 그래서 남학생들이 틀린 답을 자신 있게 말하는 교실이 많다면, 그게 여성들 잘못인가? 남성과 여성에게 다른 기대치를 가진 사회에서 정책과 환경을 바꿀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커디가 한 주장들은 너무 충격적이라 어떤 식으로든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파워 포즈의 성공은 당시의 특정한 페미니즘 흐름과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에 어느 정도 여기에 빚을 지고 있었다.
입소문 난 커디의 TED 강의가 있은 지 약 1년 뒤인 2013년, 페이스북 최고운영책임자인 셰릴 샌드버그Sheryl Sandberg의 『린 인—여성, 일, 앞서나가는 의지』가 유성처럼 미국 문화계를 강타했다. 카니와 얍, 커디의 연구 결과를 인용한 그 책은 직장 내 여성 문제와 만연한 미국의 성차별 관행에 대해 폭발적인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샌드버그의 핵심 주장은 여성들이 직업적 환경에서 무력하게 2등급 지위를 감수하도록 사회화되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앞서 나가려면 여성들은 좀 더 악착같이 다가들어야 한다. 즉 미국의 이사회와 중역실을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과 동등한 자리, 자신의 정당한 자리를 주장해야 한다. 그 주장은 용기를 북돋는 메시지였고, 수백만 권에 달하는 판매고와 함께 『졸업생들을 위한 린 인』이라는 일종의 속편이 그 반향을 증명했다.
커디의 『프레즌스』와 샌드버그의 『린 인』은 여성 개개인이 지닌 행위주체성agency을 강조한다. 이 시대의 고전적인 자조 방식으로, 두 책은 ‘우리가 우리의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라고 강조한다. 동시에 둘은 전통적인 페미니즘 운동의 관심사들에다 제도와 사회구조보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는 자기계발적 요소들을 결합하는 특정한 21세기식 페미니즘 브랜드가 시작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페미니즘 모델은 문제들이 사회와 조직에(둘은 종종 중첩된다) 관련돼 있다고 보지만, 내놓는 해결책들은 거의 늘 개인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근거가 확실한지, 재실험을 해봐도 비슷한 결과가 나오는지 확신할 수 없는 논문들을 주워섬기는 ‘심리학’ 책들 여럿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제목을 밝히진 않겠지만 대충 책 좀 읽는다 하는 분이라면 최소 두세 권은 떠올릴 수 있으실 듯. 그냥 흥미 위주로 ‘아 그렇구나’ 하고 읽으면 큰 문제는 없겠지만 이제 그걸 진지하게 믿고 실제 정부나 기업 정책에 적용하려 들면 시간과 돈만 낭비하게 될, 그런 ‘손쉬한 해결책’ 심리학들… 이거야말로 우리 사회를 더 낫게 만들기는커녕 자원과 행정력만 낭비하는 문제다. 심리학의 껍데기를 쓴 기존의 자기개발서가 지겹고 피곤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만에 하나 누가 묻는다면 왜 그런 책들을 안 읽는지 조목조목 설명해 줄 수 있을 테니까!
'책을 읽고 나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감상/책 추천] 권진영, <부부의 영수증> (0) | 2023.09.04 |
---|---|
[월말 결산] 2023년 8월에 읽은 책들 (0) | 2023.09.01 |
[책 감상/책 추천] 양다솔, <아무튼, 친구> (0) | 2023.08.25 |
[책 감상/책 추천] 김아미, <온라인의 우리 아이들> (0) | 2023.08.23 |
[책 감상/책 추천] 카라타치 하지메, <저는 왼손잡이도 AB형도 아니지만> (0) | 2023.08.18 |
[책 감상/책 추천] 신견식, <콩글리시 찬가> (2) | 2023.08.16 |
[책 감상/책 추천] 레슬리 컨, <여자를 위한 도시는 없다> (0) | 2023.08.14 |
[책 감상/책 추천] 송동화, <산부인과툰> (0) | 2023.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