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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신견식, <콩글리시 찬가>

by Jaime Chung 2023.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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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신견식, <콩글리시 찬가>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영어로 ‘bilingual’, 세 개의 언어를 구사하면 ‘trilingual’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 개의 언어를 하는 사람은? ‘American!’”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오늘 소개할 이 책의 저자는 무려 15개의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언어 괴물’이라고 한다. 그는 흔히 ‘잘못된 영어’, ‘틀린 영어’라고 여겨지는 ‘콩글리시(’Korean+English’, 즉 한국식 영어 조어)‘를 변호한다. 저자는 콩글리시는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문화유산이며 수많은 언어와 뿌리를 함께한다”라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배운 언어학적 토막 상식이 많은데, 몇 개를 소개해 보자면 이렇다.

  • 귀여운 애완동물로 인기가 많은 설치목 표유류 동물 ‘햄스터’는 직접 어원이 독일어 ‘Hamster’인데, 거기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뿌리는 슬라브어다.
  • ‘핀트’의 직접 어원은 일본어 ‘핀트(ピント)’이다. 원래 ‘초점’을 뜻하는 네덜란드어 ‘brandpunt(독일어 Brennpunkt, 덴마크어 brændpunkt 등에 해당)’에서 앞부분 ‘brand(불, 화재)’가 잘려 ‘punt(점)’만 남아 일본어 ‘핀토’가 되었다. 원래는 렌즈의 초점만 뜻하다가 이제는 주로 말의 요점을 뜻해 ‘핀트가 (안) 맞다’ 따위로 많이 쓴다.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한동안 일본 식민지였던 남태평양 섬들의 몇몇 언어에는 일본어 및 일제 영어 낱말이 꽤 많이 남아 한국어의 외래어와 비슷한 것도 적지 않았다. 예컨대 팔라우어 donts, ranninggui, siats는 도나쓰(도넛), 란닝구(러닝셔츠), 샤쓰(셔츠)를 뜻한다.
  • 다진 소고기로 만든 돈까스 요리를 말하는 ‘멘치까스’는 다진 고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 ‘민스(mince)’를 일본인들이 ‘민치(ミンチ)’ 또는 ‘멘치(メンチ)’로 받아들인 데서 유래했다. 이때 마찰음 [s]가 파찰음 [tʃ]로 변했다.
  • ‘좋아요’를 한국에선 ‘따봉’으로 부르기도 한다. 1989년 델몬트 주스 광고 속의 브라질 농장 장면에서 오렌지 당도를 재는 검사관이 엄지를 치켜세우며 외친 ‘따봉(Tá bom)’이 히트를 치면서 유행어로 한참 회자됐는데 (…) 당시 광고 자막에 “따봉은 브라질어로 매우 좋다는 뜻입니다.”라고 나왔으나 약간 잘못된 설명이다. 포르투갈어 ‘봉(bom)’은 라틴어 보누스(bonus)에서 온 프랑스어 봉(bon), 스페인어 부에노(bueno)처럼 넓게 ‘좋다’를 뜻한다. 여기에 영어 be 동사와 비슷한 계사 estar가 붙은 에스타봉(Está bom)’이 줄어 ‘따봉(Tá bom)’이 된 것인데 위에서 말했듯 ‘좋다’는 적당한 긍정인 OK, ‘그래 뭐 좋아’ 도 된다. 따봉은 딱 그 정도의 뜻이다. 당도 측정에서 정말 따봉을 외쳤다면 OK, 합격의 뜻이지 ‘매우 좋다’는 아니다.

 

콩글리시는 잘못된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의 외래어, 즉 한국어의 일부분이다. 바꿔야 할 대상이 아니라 잘 가꾸어 한국어를 풍부하게 만들 요소라는 뜻이다. 재미있는 토막 상식을 배우면서 읽어 나가다 보면 정말 한국어에 큰 애정이 있기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있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개중에 콩글리시를 진심으로 변호하는 저자의 태도가 가장 잘 보이는 문단을 인용하자면 아마 이 부분이 아닐까.

콩글리시를 몰아내자는 사람들은 이른바 글로벌 시대니까 외국인과 의사소통이 잘돼야 한다는 이유를 논거로 삼는다. 세상에 언어가 영어만 있지도 않고 세상 사람들이 이른바 ‘정통’ 영어만 쓰는 것도 아님에도 이런 주장이 꽤 잘 먹히는 편이다. 외래어를 원어 그것도 영어에 맞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진 사람이 꽤 있는 듯한데, 외래어는 수용되는 언어에 맞게 뜻과 소리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핸드폰은 틀린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에 있는 자생적 외래어일 뿐이다. 미국인들은 가라오케나 카라테를 영어 음운 구조에 맞게 ‘캐리오키’나 ‘커라티’로 부르지만 원래 일본어 발음이 뭔지 구태여 따지지는 않는다. 다른 언어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비슷하다.
(…)
따라서 원래 예전에서 영어에서 저런 표현을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른바 ‘올바른 영어’는 참으로 우습게 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어 안에서 통용되는 콩글리시는 자생적으로 생겼든 일본어를 비롯한 제삼의 언어에서 건너왔든 소위 본토 영어라는 외국어의 잣대로 잴 필요가 없다. 물론 언중의 판단에 따라 본토 영어에 가깝게 다시 바뀌기도 하니 어느 시대에나 다 맞는 정답은 없다. 다만 지금 사람들이 많이 쓰고 잘 통하는 말이 정답에 가까운 것이다.

 

나처럼 공교육을 졸업한 지 오래된 사람이라면 요즘 상당수 화학 용어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뉴스나 인터넷을 통해서만 들었을 것이다. 예컨대 불소는 플루오린, 나트륨은 소듐, 칼륨은 포타슘, 티탄은 타이타늄, 요오드는 아이오딘, 크세논은 제논 등, 영어식 발음으로 많이 바뀌었다. 저자는 이를 강하게 비판하는데, 원소나 화합물 이름은 대개 그리스어와 라틴어의 어근을 기반으로 프랑스나 독일 등지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고, 한국은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상당수 화학 용어가 독일어 또는 네덜란드어에서 일본어를 거쳐 들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술 라틴어와 발음이 유사한 독일어식 종래 표기가 원어 철자를 유추하기에도 알맞다. 과학계에 영어를 쓰는, 또는 영어가 모국어인 학자들만 있는 것이 아닌데 모든 용어를 영어식으로 바꾼다는 게 얼마나 생각이 짧은 일인지, 과학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어이가 없다. 저자는 이렇게 썼다.

비록 자연과학 논문이 대부분 영어로 쓰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언어를 버릴 수는 없는 일이고 과학기술과 공업이 발달한 독일, 일본, 러시아 등 많은 나라에서도 실제 기술 업무에서는 당연히 아직도 자국어를 많이 쓰고 있으며 그런 나라와 교류 협력도 필요한데 국제적 의사소통을 너무 영어에만 맞추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봤으면 한다. 국립국어원 측도 별다른 대응 없이 대한화학회의 이런 일방적인 용어 개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버렸다. (…)
화학 용어라고 해서 화학자만 쓰는 것이 아님에도 일부 전문가 집단의 권위에만 순응하고 전문용어도 역사성이 있음을 도외시한 결과다. 역사성이고 나발이고 어차피 외래어인데 귀찮고 헷갈리게 하지 말고 이왕 하는 김에 싹 다 영어식으로 바꾸자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라면 그냥 우리말 자체를 없애버리고 화끈하게 영어만 쓰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도 받아들여질 것이다. 국제화나 세계화는 영어화나 미국화가 아닌데도 그렇게 착각하는 이들이 안타깝게도 적지 않다. 크게 보면 영어화의 흐름을 사실상 막을 수도 없도 바뀐 표기가 괜찮은 구석도 없지는 않을 테니 모두 꼭 되돌려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말글살이를 총체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전문가가 익숙한 영어라는 좁은 방향만 생각해서 규정을 만든 것이 무척 씁쓸하다.

 

저자 말대로 세계화가 곧 영어화나 미국화는 아닐 것이다. 우리 말을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꿔나가면 될 일이다. 이 책은 독일어, 일본어, 네덜란드어, 중국어 등 많은 외국어가 예시로 등장하지만 결국은 한국어에 관한 글이고, 저자가 한국어에 가진 애정도 담뿍 묻어난다. ‘초전도체’가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발명됐다는 사건으로 한때나마 토익 책을 버리고 불사르는 꿈을 꾼 이들, 잠시나마 한국어의 세계화 가능성에 설레어 본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해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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