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감상/책 추천] 권진영, <부부의 영수증>
‘확증 편향’은 이미 본인이 가진 신념과 비슷한, 또는 그것과 일치하는 정보만을 취하는 경향성을 말한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과정이 바로 그러했다. <부부의 영수증>은 시골에서 (도시에서 살 때보다) 더 적은 돈을 쓰며 더 여유롭게 살고 싶었던 저자 부부가 남해에서 살면서 겪은 경험을 영수증 형태로 기록한 에세이다. 저자 부부는 일단 남해에서 폐교를 임대에 살다가 1년간 임대해 주는 ‘귀농인의 집’으로 옮겨갔고, 그다음에는 아예 남해에 집을 한 채 샀으며, 게스트하우스와 보틀샵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나는 단연코 ‘도시 사람’이다. 내가 얼마나 바쁘고, 문화와 익명성이 보장된 도시를 사랑하느냐면, 호주에 왔을 때 ‘교외(suburb)’라는 개념에 익숙해지는 데 꽤 시간이 걸렸을 정도다. 슈퍼마켓이나 백화점, 서점, 학교(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걸어서 30분이면 걸어서 갈 수 있는 범위에서 자라고 생활해 온 나는, 내가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시설을 이용하는 데 두 다리로는 부족하고 차가 필요하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부부의 영수증>도 프롤로그에서부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대도시라는 울타리를 떠나 낯선 시골 생활을 자처한 우리는 단순하지만 충만한 삶을 원했다. 꼭 필요한 것만 삶에서 남겨두고 그렇지 않은 것은 비우고 싶었다. 우리가 정말 원하고 필요한 것들이 있다면 소비의 방식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내는 노력을 기꺼이 하기로 했다. 만족 없이 쌓아가고 채워나가기보단, 곳곳이 비어 있는 삶의 여백을 소중히 하며 살길 원했다. 우리 스스로 세운 삶의 원칙들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나가면, 자연스레 우리가 바라던 삶에 가까워질 것이라 기대했다. 적게 일하고, 적게 벌고, 적게 쓰며 살아도 행복한 삶 말이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와 몇 개월을 지내보니, 어찌 된 일인지 생활 전반에서 생각보다 더 많은 돈을 쓰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대중교통이 워낙 잘 되어있으니, 굳이 차를 사야 할 필요를 못 느꼈다. 그런데 시골에 내려오니 마을을 지나가는 버스는 단 1대, 하루에 딱 4번. 게다가 버스비도 비싸고, 환승도 안 된다. 계획에도 없었던 차를 사야 했고, 부랴부랴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학원비도 내야 했다.
이주 후 정착에 드는 초기 비용이라고 치부하기엔, 기본적인 생활비 역시 확실히 더 나갔다. 이곳 남해는 ‘섬’이라서 그런지, 물가가 도시보다 더 비싸다. 지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물건이나 서비스는 양과 질에서 만족스럽지 않다.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적으니 작은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굳이 배송비를 더해 인터넷으로 사야 한다. 병원 진료도 인근 도시에 나가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아, 병원비 영수증에는 주유비가 늘 따라붙는다. 시골은 주유비도 더 비싸다. 볼일을 보러 도시에 나갈 때마다 기름을 가득 채워 들어오곤 한다. 도시에서는 전세로 살며 크게 주거비가 들지 않았는데, 시골에 오니 전세가 거의 없다. 촌집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혹독했다. 그동안은 꼬박꼬박 날라 오는 고지서에 돈만 내면 끝이었는데, 시골에는 여전히 도시가스, 광역 상수도가 공급되지 않는 곳이 많다. 오래된 집에는 이래저래 신경 쓸 것이 많고, 불편을 해결하려면 역시나 돈이 든다.
그뿐인가. 시골에는 젊은이보다 어르신, 또는 최소한 중년층이 많은데, 나이가 들수록 몸에 더 신경 써야 하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아닌가. 그런데 병원에 쉽게 가기 어려운 시골에 살면 아플 땐 정말 어떡하려는 걸까? 병원과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일단 그런 걱정부터 하게 된다. 고질병이 있으면 그걸 꾸준히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병원과 가까운 지역에 살아야지요…
남해에서 보내는 첫 번째 여름, 나는 매주 두 번씩 읍내 병원에 가서 허리 치료를 받아야 했다. 버스를 타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을 올라갔는데도 잠깐 한눈판 사이에 버스가 쌩하니 지나가버리거나, 한참을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면, 절로 신세 한탄이 나왔다.
도시에선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언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집 근처에는 마트, 식당, 병원, 영화관 등이 즐비했다. 그런데 이곳은 작은 슈퍼 하나 없는 시골 마을. 무엇을 하든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대중교통마저 열악하다. 내 차가 필요해졌다.
‘귀농인의 집’의 임대 계약이 만료되어 저자는 다음에 살 집을 찾는 동안 서울에서 머물렀는데, 이때 저자가 가장 먼저 한 일도 치과를 가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치과를 찾았다. 남해에도 치과를 비롯한 많은 병원(대부분 소규모 개인 의원)이 있지만, 작고 오래된 데다 낯선 치과에 가려니 영 내키지 않았다. 그렇다고 1시간씩 차를 끌고서 가까운 도시 진주까지 나가기에는 크게 아픈 곳은 없어 치과 방문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 탓에 잇몸이 나빠진 건지, 서울에 오자마자 찾은 치과에서 앞으로 한두 번 더 치료받으러 와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다.
나는 딱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인프라가 갖춰지지 못한 지방에서는 못 살 것 같다. 지금이야 내가 젊으니까 젊음과 건강을 믿고 지방에 살아도 괜찮지만, 나이가 들면 그런 만용을 부릴 수 없겠지. 이거에 비하면 시내에 있는 미용실을 자주 가기 어려워서 집에서 머리를 직접 서로 잘라 주어야 하는 경험은 귀엽게 느껴질 거다.
다행히 갈수록 사정은 나아졌다. 남편 머리는 잘도 자라서 여러 번 다시 미용가위를 들게 됐다. 이발한 남편 모습은 훨씬 더 자연스러워졌고, 몇 번 해보니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최근에는 반대로 남편이 내 머리를 직접 잘라주었는데, 꽤 만족스러운 단발이 됐다. 남편도 첫 가위질이니, 어쩐지 양쪽 길이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상관없다. 지금까지 미용실에 가지 않고 네 번이나 집에서 서로 머리를 잘라주었으니, 이것저것 사들인 미용 도구의 본전은 건진 셈이다. 읍내에 가서 1만 5천 원을 내고 이발했다는 이장님 말씀을 듣고 나니, 자가 미용실의 이문은 더 크게 잡아도 될 듯하다.
아, 그리고 그거 아시는지? 그나마 서울이나 광역시는 그래도 최저 시급이나 주휴수당을 잘 챙겨 주는 편이다. 정말 시골로 갈수록 질 좋은 일자리는 찾기 힘들다. 저자도 줄어들기만 하는 통장 잔고에 덜컥 겁이 나서 마트에서 물품을 진열하는 단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점주가 말을 바꿨고, 결국 저자는 첫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을 관둬야 했다.
그런데 첫 월급일을 앞두고 갑작스레 일을 관둬야 했다. 분명 공고에는 시급 1만 원이라 쓰여 있었는데, 점주의 말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바뀌었다. 주휴수당을 합했을 때 시급이 얼추 1만 원이라는 것이다. 공고대로 임금을 줄 것을 요구했더니, 공고를 올리고 면접까지 봤던 점주는 자신은 실제 고용 주체가 아니라며 책임을 부인했다. 수년째 같은 방식으로 아르바이트를 구해왔지만 아무 문제가 없었다며, 졸지에 나는 타지에서 온 유별난 사람이 돼버렸다. 결국 나는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갑작스레 받고서, 하던 일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집으로 황망하게 돌아와야 했다.
지역에서 꽤 규모가 있는 마트에서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지역 내 다른 일자리에 대한 기대가 싹 사라졌다. 듣자 하니, 사장이 친구네 부모님이거나 직원이 친한 동창의 조카인 경우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좁은 지역사회라, 불편 사항이나 문제를 공공연히 꺼내기 어렵다고 했다. 나 역시 부당 해고를 신고하려 했지만, 그랬다가 작은 섬 안에서 원치 않는 상황과 부딪히게 될까 봐 괜히 꺼려지긴 마찬가지였다. 일자리가 부족한데 그나마 있는 것도 만족도가 높지 않아 청년들이 계속 타지로 나가버리니, 군청에서도 고민이 많다고 했다.
괜찮은 일자리가 있어도 제약 조건이 많다. 대부분 일자리가 읍내나 외곽의 관광 구역에 집중돼, 차량이 없으면 일하기 쉽지 않다. 얼마 전 우리 마을에 새로 이주한 또래 친구 한 명이 다른 면에 있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구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스스로 그만뒀다. 차로 30분이면 갈 거리를 버스 노선이 없어서, 마을에서 읍까지, 읍에서 또 카페가 있는 곳까지 여러 번 버스를 갈아타면서 출근하는 데만 3시간 넘게 걸렸기 때문이다. 지인들의 차를 얻어 타며 며칠 꾸역꾸역 버티다, 결국 백기를 들었다.
시골의 안 좋은 점만 꾸준히 나열하는 것 같지만, 이 글은 책 소개이자 내 ‘확증 편향’ 이야기를 하는 공간이니까 이것까지는 보여 드려도 괜찮을 것 같다. 시골이라 벌레가 많은 것까지는 예상 가능하고 따라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범위라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놀란 건 “외진 마을이라 업자를 부르는 일이 쉽지 않기에”라는 부분이었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외진 곳이면 기술자를 부르기도 쉽지 않은 거지? 내가 모든 기술을 다 배워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기술자를 못 부르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임시 거처였던 폐교를 떠나 새로 이사 온 귀농인의 집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일단 너무 삭아서 살짝만 만져도 부서질 정도인 방충망부터 교체하기로 했다. 동네 친구로부터 방충망 교체에 필요한 재료를 얻었다. 외진 마을이라 업자를 부르는 일이 쉽지 않기에,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을 찾아보며 직접 작업을 했다. 마당에 나와 작업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신기해하시며 우리를 ‘기술자’라고 칭찬하셨다. 하지만 방충망 교체로는 어림도 없었다. 어느 틈으로 들어왔는지, 지네, 돈벌레, 그 밖의 이름 모를 온갖 벌레들이 집안 곳곳에서 나와 하루에도 여러 번 파리채를 들어야 했다.
‘떠나온 후에야 보이는 서울의 매력’이라는 꼭지에서 저자는 이렇게 썼다.
도시에 살 때는 서울의 불편한 점만 보였고, 시골의 좋은 점만 보였다. 그런데 도시를 떠나 시골에 살아보니, 시골의 불편한 점도, 도시의 좋은 점도, 골고루 알게 되었다. 양쪽을 보다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보다 공평해진 시선으로 다시 따져보아도, 여전히 아직은 도시보다는 시골이, 서울보다는 남해가 더 좋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온전히 경험해보았으니 이제 말할 수 있다. 막연하게 서울이 싫어서, 시골이 좋아서가 아니라, 우리는 우리만의 셈법으로 시골살이를 ‘선택’한 것이라고.
나는 도시에 살 때에도 도시의 좋은 점만 보였고, 시골의 좋은 점은 하나도 안 보였는데… 여기 호주에 와서 보니까 서울처럼 복작복작한 도시의 좋은 점이 더욱더 잘 보인다. 하, 도시 너무 좋아…! 다시 도시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책 후기를 썼는데 도시 찬양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골이 좋다고 하시는 분들 존중합니다. 제 취향은 언제나 도시지만요. 도시와 시골 중 고민하시는 분들, 또는 시골에서 살아 보고 싶은데 좀 마음의 준비와 현실적 준비가 필요하시다 하는 분들이 읽으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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