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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책 감상/책 추천] 정희재, <아무튼, 잠>

by Jaime Chung 2023.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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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감상/책 추천] 정희재, <아무튼, 잠>

 

 

잠은 누구나 자는 것이지만 잠과 관련한 특별한 이야기가 많아서 책까지 한 권 쓰는 사람은 드물다. <아무튼, 잠>의 저자는 바로 그렇게 드문 사람들 중 하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잠을 참 열심히 잤는데, 나이가 들어서는 아무래도 삶에서 책임져야 하는 일이 많다 보니 예전만큼 쉽게 잠들기가 어려워서 ‘수면 위생’에 좀 더 신경을 쓰는 등, 잠을 잘 자려고 최선을 다한다고 한다.

첫 번째 꼭지 ‘잠에 진십입니다’에 저자가 쓴 이 문단에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침대로 귀환은 보상이다. 오늘 하루 ‘나’로 분투하며 잘 살았다는 인정이다. 일과를 잘 보내고 떳떳하게 고요한 잠, 거룩한 잠, 어둠에 묻힌 잠을 영접할 것이다. 의식에 차양을 내리고 고치처럼 몸을 만 채. 그러면 이 삶은 다시 견딜 만해지고 의미를 탈환하지 않을까.

잠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 정직해서다. 잠처럼 투자한 만큼 따박따박 대가를 돌려주는 체계도 드물다. 주식과 선물, 가상화폐는 어지간한 영혼은 탈탈 털리고 말 가변성으로 롤러코스터를 태우지만, 잠은 아니다. 잠은 투자한 시간만큼 심장 건강과 체력, 그리고 집중력을 돌려준다. 모질고 거친 세상에서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복원된다.

잔다는 건 결핍과 욕망의 스위치를 잠깐 끄고 생명력을 충전하는 것. 잡념을 지우고 새로운 저장장치를 장착하는 것. 쓰라린 일을 겪고 진창에 빠져 비틀거려도 아주 망해버리지 않은 건 잘 수 있어서다. 잠이 고통을 흡수해준 덕분에 아침이면 ‘사는 게 별건가’ 하면서 그 위험하다는 이불 밖으로 나올 용기가 솟았다. 잠은 신이 인간을 가엾게 여겨서 준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에 집안 문제로 친척네 집에 얹혀살 때, 친척 아주머니의 은근한 부담을 피하기 위해 고등학교 부실에서 몰래 잤던 이야기, 인도 북부 산간 마을에서 (한국인) 비구니 스님네에서 열흘간 같이 숙식한 이야기, 스무 살 당시 직장을 그만두고 입시 학원 종합반을 다닐 때 독서실에서 본 일과 공부를 병행하던 여자 이야기 등 사소한 듯하나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지만, 개중에 사회적인 의미를 담은 꼭지도 있다. ‘잠 억압의 개인사’라는 꼭지인데, ‘타이밍’이라는 졸음 예방약(각성 효과가 있는 일반 의약품)과 근현대사를 연결한 것이다. 나는 이게 무슨 약인가 했는데 (아무래도 1993년에 단종됐다가 2019년에 리뉴얼돼 다시 출시된 약이다 보니) 이게 1960-1970년대에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먹던, 아니 먹어야 했던 약이란다. 구로공단이나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들은, 고용주가 나눠주는 이 약을 먹고 잠도 못 자며 일해야 했다.

청년 전태일이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도 이처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작업 환경을 겪고서였다. 특히 자신보다 어린 여공들의 고생을 늘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시다 하나가 일을 하지 않고 자꾸만 머뭇거리고 있다가 태일이가 쳐다보니까 그만 와락 울음을 터뜨리면서, “재단사요, 난 이제 아무래도 바보가 되나 봐요. 사흘 밤이나 주사 맞고 일했더니 이젠 눈이 침침해서 아무리 보려도 애써도 보이지 않고 손이 마음대로 펴지지가 않아요” 하더라는 것이다.*

  • 조영래, <전태일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20.

눈이 침침하고, 근육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고, 머리가 멍해지는 건 전형적인 수면 부족 현상이다. 시다라고 해봐야 이제 12~15세인 아이들. 그보다 한 단계 위인 미싱사는 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후반까지였고, 이들도 약과 주사를 반강제적으로 먹고 맞았다. 그렇게 잠을 포기한 채 하루 14~16시간이라는 살인적인 노동을 하다 건강을 해치면? 치료나 보상은커녕 바로 해고당했다. 인권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수면권도 짓밟히던 시대였다. 타이밍은 그렇게 우리의 경제와 노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약품이 됐다.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 ‘사당오락’, ‘지금 잠을 자면 꿈을 꾸지만, 지금 공부하면 꿈을 이룬다’ 등, 우리 사회가 내거는 이런 구호들만 봐도 우리 사회가 잠을 얼마나 경시하는지 알 수 있다. 읽다 보니 건강을 희생하더라도 효율성을 얻으려고 하는 이 사회의 태도를 그냥 개인적 경험으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전태일 의사와 그 당시 시대 배경을 설명하며 보여 준다는 점에 감탄했다. 책이나 영화 등, 개인적인 이야기도 물론 재밌고 흥미로울 수 있지만 사회적인 코멘터리까지 하면 그만큼 의미의 층위가 더욱 넓어지니까 말이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저자의 표현이 꽤나 수준급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이런 부분들.

그 시절 간절히 바랐던 것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하는 거였다. 내 촉수에 걸리는 숱한 감각과 인식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 염원이 내 능력과 재능을 벗어난 신기루 같은 것임을 자각할 때면 누군가 클로로포름에 적신 천을 얼굴에 덮은 것처럼 졸렸다.

하루 내내 섣부른 마음이 튀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고 견딘 끝에 받은 보상. 밤은 지친 인간을 감싸는 검은 붕대이자 효과 빠른 진통제다. 밤이면 새장에 검은 천을 씌워주듯, 우주가 어둠의 장막을 늘어뜨려 인간을 진정시키는 시간. 대다수에게는 부활이 보장된 안전한(?) 죽음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 시간의 달콤함을 살짝 유보해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지거나 여럿이 여행을 갈 경우.

인도 북서부에 위치한 도시 데라둔(Dehradun)에 가면 잠을 자면서 수행을 해 깨달음을 얻은 ‘슬리핑 라마(sleeping lama)’가 계신다고 한다.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 잠을 자면서까지 수행을 하기는 어렵겠으나, 적어도 제때 잘, 푹 자고 원기를 회복할 수는 있다. 모든 이들의 고요하고 거룩하며 평화로운 밤을 기원하며, 이 책을 권해 본다.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랑에 빠지듯이, 잠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잠에 들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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